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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여대생 시절 경험한 6개월간의 군복무
북한RT 2012-01-27 07:25:43 원문보기 관리자 4287 2012-01-31 01:27:50

국수떡과 더불어 배가 고팠던 소리를 하자니 이런 말들이 생각이 난다.

 

"금강산 구경도 식후경." "식의주."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의 유산인 “지원의 사상” 이 떠오른다.

 

“지원의 사상” 이란 아사, 동사, 타사를 이르는 말이다.

 

풀어서 얘기 하면 얼어 죽을 각오, 맞아죽을 각오, 굶어죽을 각오를 의미 한다.

 

나도 지원의 사상을 받들어 굶어죽을 각오는 하고 교도(대학생이 6개월간 군 복무하는 것-역주)로 갔다.

 

북한 여대생들은 2학년때 의무적으로 교도라는 이름으로 군복무를 해야 한다. 주로 위의 사진과 같은 14.5미리 4신 고사(대공)기관총, 37미리 고사포 등 대공부대에서 복무한다. 남학생들은 85미리, 57미리 고사포처럼 구경이 커서 포탄이 무거운 부대로 보낸다.

사람은 먹기 위해 사는지 살기 위해 먹는지 나는 참 모르겠다. 아마 살기 위해 먹는 것 같다. 나도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위해 교도기간 못해 본 일이 없다.

 

오늘은 내가 진지 근무를 서는 날이다. 근무 시간은 저녁 7시부터 다음 날 아침 7시까지이다. 지긋지긋한 아침 기상소리가 울린다. 그것도 새벽 4시에. . .

 

허둥지둥 옷을 입고 눈도 채 못 뜬 채 우리는 부업밭 김매기를 간다. 꼭두새벽부터 이슬에 푹 젖은 풀을 쥐어뜯는 것이 오늘 조기 작업이다.

 

나는 눈을 비비며 고랑을 밟고 나가다가 바스락 소리에 놀라 밑을 보니 개구리도 가엷다는 듯이 나를 바라본다.

 

"넌 왜 이 아침부터 나와서 고생이냐? 들어가 내 몫까지 더 자고 나와"라고 나는 중얼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개구리는 어디론가 가버린다. 아마 잠자러 갔을 것이다.

 

나는 허리를 구부리고 이랑의 풀을 뜯어 나간다. 얼마나 했을까? 해가 동쪽 하늘에서 솟아  올랐다. 그와 동시에 7시를 알리는 나의 위가 출석을 부른다. 아침밥을 먹으라는 신호이다.

 

시국에 맞게 나의 위도 따라 주었으면 좋으련만 하루의 결석 지각도 없이 불러댄다. 그러나 말거나 10시 거의 되여서 식사 구령이 울린다.

 

승냥이 배 마냥 앞 가죽이 등가죽과 연애를 하는 것을 겨우 말리며 병실로 나는 걸어간다. 공기의 절반도 되나마나 하는 강낭밥을 먹고 숨 돌릴 사이도 없이 또 오전 작업을 한다.

 

나는 은근히 좀 피곤하긴 하지만 싫은 소리를 안 듣는 진지근무를 기다린다.

 

오전 오후 작업을 끝내고 간단한 저녁식사를 하고 나를 비롯한 세 명의 친구들이 서서히 진지로 향한다.

 

3.5키로 자동보총, 탄창주머니, 추위를 견딜 헝겹동복 까지 둘러멘 우리는 발이 달린 자동보총마냥 맥없이 올라간다. 서로 말 한마디 없이 터벅터벅. . 거의 40분 걸려서야 우리는 진지에 도착했다.

 

도착 하자마자 우리는 리론식사를 하였다. 리론식사란 말로 이전에 먹었던 맛있는 음식 소리를 하는 것이다.

 

"그만하자. 먹는 소리를 하니 또 배가 고프다"하고 나는 말하고 600곡집을 펼치자고 했다.

 

600곡집이란 내가 아는 노래가 대략 600개가 되니 그 노래를 다 차례로 부른다는 소리이다. 한참 노래를 부르다가 나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야. 우리 세 명 중에 한 명이 시내로 가서 먹을 것을 가져올까?” 그러자 두 명의 친구가 말하기를 자기들은 아는 친척이 없다는 것이였다.

 

결국 대학 다니는 언니라도 있는 것이 나 밖에 없었다. 괜히 말했다고 나는 즘자리고 있었다.

 

그러자 그들은 내가 언니에게 가서 맛있는 것을 좀 가져오라고 사정 하였다. 혹 떼려다 혹을 단 격이였다. 하는 수없이 친구들에게 떠밀려 나는 언니에게 가기고 결심했다.

 

"내가 어디 갔는가고 누가 물으면 변소 갔다"고 말하라고 시키고 나는 동냥을 떠났다.

 

아찔한 산비탈을 쏜살같이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넘어지고 딩굴면서 드디여 나는 시내로 들어섰다.

 

시내로 들어서자마자 곧바로 언니를 찾아 대학을 갔다. 대학 기숙사에서 밖으로 나오는 언니를 우연히 만났다. 그러나 언니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해빛에 새까맣게 탄 얼굴이며 산에서 딩굴어 땀에 범벅인 나의 모습을 보는 언니는 그만 울고 말았다.

 

나도 설음에 언니 품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한참 울다가 언니는 나를 배가 고프겠다고 하면서 식당에서 밥을 사주었다.

 

정신없이 다 먹고 배가 부르니 친구들 생각이 났다.

 

나는 언니에게 오늘 오게 된 동기를 이야기 하자 언니는 국수 방아간에서 국수떡을 5키로를 사주는 것이였다.

이것이 북한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국수이다. 북한 국수는 옥수수로 만든다. 국수떡은 색깔이나 뽑는 방식은 국수와 똑같지만, 다만 가는 오리로 뽑지 않고 한국의 떡국대보다 더 굵게 뽑아낸 것을 말한다.

 

나는 밥알을 눕힐 사이도 없이 국수떡을 안고 진지를 향해 달렸다. 수류탄을 안고 적의 화구를 막는 리수복 영웅(6.25전쟁 때 19살에 기관총 화구를 막았다고 본보기로 내세우는 영웅)마냥 나는 국수떡을 안고 기뻐서 달렸다.

 

친구들의 배를 불릴 수 있다고 생각 하니 마음은 즐겁고 힘든 줄 몰랐다.

 

드디여 진지로 도착 했고 눈이 빠지게 나를 기다리던 친구들을 만났다. 우리는 셋이 돌려가며 국수떡을 뜯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국수떡은 인차 식는데 굳으면 돌처럼 딴딴하다.

 

그래서 서로 돌리며 이발로 뜯어 먹었다. 다섯 키로 떡은 용감한 세 병사에 의하여 순식간에 사라지고 한 키로 가량만 남았다.

 

더는 배안에 들어갈래야 갈수도 없었고 더구나 돌 보다 굳어서 더 먹다가는 이발을 뽑힐 것 같았다.

 

나는 더는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 하고 국수떡을 풀 속에 힘껏 던져 버렸다. 배가 든든히 부른 우리는 근무를 잘 섰고 다음날 무난히 인계인수 하였다.

 

그로부터 일주일 지나서 우리 셋이 또 근무를 올라가게 되였다. 그런데 한 병사가 탈령하는 바람에 밤에도 인원 점검을 해서 더는 시내로 먹을 것을 구하러 내려가기 힘들어 졌다.

 

하는 수 없이 우리는 중국 마을의 전등수를 센다거나, 노래를 부르다거나 하다가 더는 할 일을 찾지 못했다.

 

그 순간 나의 머리에 일주일전에 던진 국수떡 생각이 떠올랐다. 배고픈 우리 셋은 국수떡 찾기 전투에 진입했다.

 

쥐가 물어 갔는지 아니면 다른 사람이 주어 먹었는지 도저히 국수떡은 보이지 않았다.

 

숲속을 참빗질 하듯 싹싹 뒤져 나가던 나는 한참만에야 가랑잎에 숨겨서 먼지로 뒤범벅이 된 국수떡을 드디어 찾았다.

 

“찾았다.” 나는 너무 기뻐 큰 소리로 웨쳤다. 그러자 두 명의 친구는 바람처럼 나에게로 날아 왔다. 굶은 사람들 같지 않게 그야말로 샐샐 날아오는 것이였다.

 

우리는 떡을 들고 근무 장소로 와서 유심히 살폈다. 양 좌 우로 떡을 굴리며 나는 생각했다.

 

"혹시 쥐가 먹지 않았을가?" 하고 말이다. 목구멍이 포도청 이라고 우리는 그러나 말거나 먹기로 결심했다.

 

돌보다 더 단단한 떡! 전혀 이먹지 않았다.

 

돌로 두드려도 보고 이발로 뜯어도 보고 총탁으로 내리쳤으나 국수떡은 ‘강성대국’이였다. 우리는 든든하면 다 ‘강성대국’에 비하군 하였다. 강하다는 뜻으로 말이다.

 

그래도 물러설 우리가 아니였다. 우리는 이악하게 돌려가면서 이발로 조금씩 뜯어 먹었다. 올리 빨고 내리 빨고. . .

 

나는 원래 동생이 먹던 음식도 안 먹는 까칠이였다. 그러나 배고프니 친구들이 빨던 것을 서슴없이 빨고 또 빨았다. 2시간이 걸려서야 우리는 드디여 국수떡을 점령했다.

 

1211고지도 십분만에 점령 했다는데 우리는 셋이서 주먹만한 국수떡을 2시간만에야 겨우 점령했다. 2차세계대전만큼 치렬한 전투 끝에 말이다. 참으로 ‘국수떡 먹기 전투’였다.

 

필자 김소원 (역주-2011년 3월 탈북해 한국으로 직행해 왔습니다. 북한식 표기를 그대로 두었습니다.)

 

원문출처 : http://unian.org/board/free/view/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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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연 ip1 2012-01-31 11:12:39
    참 너무나도 생동하고 유머적으로 글을 써서 재미있게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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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갑이 ip2 2012-02-01 15:38:11
    북한의대생생들은 교도대 안나가는데...ㅎㅎㅎ몰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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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북 ip3 2012-02-02 09:33:56
    志遠 지원...뜻을 멀리 가지라. 푼다면 뜻을 크게 가지라는 말입니다. 아사 . 동사, 타사는
    3대각오로 굶어 죽을 각오 맞아 죽을 각오 얼어 죽을 각오로 임하라는 뜻입니다.
    이북의 대학생이 어근의 뜻과 구별도 못하는 정도이니 대학교를 나왔다는 소리를 남한의 어데 가서 하지 마세요. 우리 다 그렇치 않은 탈북자 출신 대학생들이 부끄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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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옥성관 ip4 2012-02-04 11:24:14

    - 옥성관님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2012-02-04 11:2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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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구름하늘 ip5 2012-02-04 13:36:57
    남한생활 행복하길기원합니다 ^^뜻문자틀리면어떼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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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옥성관 ip4 2012-02-04 16:53:08
    바람구름하늘님 그런게 아니구요 회원님들 필모가 좀 그래서요제가 미안한마음 ? 그래서 글을삭제했는데 저도회원님들 행복하길 진심으로바람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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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두의 ip6 2012-02-07 16:32:32
    아 교도가면 그렇쵸 좋은일만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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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두의 ip6 2012-02-07 16:34:48
    제여동생도 의학대학을졸업했는데 교도를안가고 군진이라고 하면서 갔던생각이 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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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타소녀 ip7 2012-02-13 15:09:22
    참으로 웃지도 울지도 못할일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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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앙 ip8 2012-02-26 21:56:57
    잘보고 가요.. 여대생들이 군복무 한다는건 처음들어봐서 ... 쪼큼 충격이네요
    새로운 정보를 얻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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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무총 ip9 2012-03-12 00:31:15
    이북님의 말이 옳습니다. 지원이란 뜻을 크게 가지라는 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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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패 ip10 2012-03-12 03:05:19
    지원 ㅋㅋㅋㅋ 김일성이 아버지 김형직 지원 ㅋㅋㅋㅋ놀고 있네 다시 옛날로 되돌아가나 . 지원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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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창범 ip11 2012-03-14 17:38:28
    오 잘보고갑니다 한국에서 힘내세요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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