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마음으로] 통일후 국호와 상징에 대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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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달아 글을 남깁니다. 이 심각한 상황에서 김칫국부터 마시는 것이 옳은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치열한 논쟁으로 데워진 머리도 식힐 겸 잠깐이라도 “통일 이후”라는 즐거운 상상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습니다 (물론 이 블로그엔 소말리아 해적 운운하며 “통일 이후”를 멸망의 길이라 규정하는 분들이 몇 계시지만).
대다수의 남한 분들은 통일 이후 남한이 북한을 흡수하면서 자연스럽게 대한민국의 국호와 상징이 그대로 사용되는 것을 당연한 전제로 하거나 이것이 바람직한 방안이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 의견은 조금 다르며 이하와 같습니다.
1. 국호
국호란 것은 결국 시대의 필요에 따라 돌고돌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아래에서는 통일의 시점에서는 무엇이 가장 실천적(practical)일까를 논의하자는 것입니다.
조선인민공화국이야 최초 건국 참여 세력들의 열정은 논외로 하고 현실적인 전개에 있어서는 한반도의 물질문명사상 가장 암울했던 시기 중 하나인 이씨 조선왕조(사학자들 간에 조선의 재평가 움직임이 있으나 반대입니다)를 그대로 답습한 또다른 세습왕조국가의 명칭이었으니 “조선”이라는 명칭의 극복은 필요한 시점일 것입니다. 물론 그 유래를 따라가면 고조선에까지 이르지만 이에 대하여는 할 말이 많구요… 미련이 남으시면 나중에 논의하기로 하고 패스. 평양의 단군릉이야 더 말하기도 싫구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조의 국명은 이성계가 명 황제에게 조선과 회령 중 골라달라고 하여 황제가 골라준 이름입니다.
대한민국이라는 명칭은 대한제국에서 따온 것이고, 그 유래는 삼한(三韓)입니다. 후당서와 일본서기를 보면 고구려, 백제, 신라가 삼한으로 불리는 경우도 있긴 합니다만, 신라가 양맥(고구려, 백제) 함락 후 “삼한일통” 이데올로기를 주창했을 때의 삼한은 (대동강 이남으로 비정되는) 마한, 진한, 변한의 3한입니다. 물론 韓의 고대 중국어 음가는 “한”이 아니라 간(g(h)an) 혹은 갈(g(h)ar)[일본서기에 남아 있는 예맥어의 고대 음가로는 가라(gara)]로서 고대사서를 보면 干 등으로도 표기되며 몽골의 칸(汗)과 같은 어원이니 참으로 위엄이 있고, 또 공자가 편집한 시경에 나오는 한후와의 관련성도 비치니 어렴풋하나마 그 유래가 장구합니다. 그러나 韓은 어디까지나 한민족의 근간이 된 수많은 종족들(한/예/맥족을 근간으로 하여 흉노스키타이계, 연/제/진 귀화인(중국인), 낙랑인(중국인), 왜인이 섞임)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아울러 쭝궈 동북공정의 핵심은 현재 우리 민족은 고구려와는 전혀 무관하고 대동강 이남의 “삼한부락”(꼭 “부락” 자를 붙입니다)의 후손들이며 삼한부락-신라 후손인 왕건이 고려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신성로마제국이 로마 후손을 참칭한 것이나 다름 없고 여진족으로부터 대동강 이북 영토를 뺏으려는 이데올로기적인 수작에 불과하다는 스토리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통일 이후에 만주(한족들이 동북삼성이라 부르는)에 접경하며 중국과 맞짱을 떠야 할 우리 입장에서 보다 실천적인 국호는 고려라고 생각됩니다. 고려는 왕건이 고구려를 따서 붙인 이름이라고 착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고구려가 이미 장수왕 때 고려로 국명을 바꾸고 그 이후 중국, 일본의 사서에는 줄기차게 고려로 나옵니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쓸 때 당시의 왕조인 고려와 구별하려고 일부러 계속 고구려라고 칭한 것이 굳어졌을 뿐입니다. 고려의 명칭의 유래 또한 장구해서 후한서를 보면 고구려의 모태인 부여의 시조가 탁리국/색리국(“고리국”의 오자인 것으로 추정)에서 왔다는 기술이 있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보면 고구려 왕실이 스스로를 중국 삼황오제 시절의 고신씨(高辛氏)의 후예라 부른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오히려 중국 동북공정 학자들이 고신씨와 고구려의 연계를 소리높여 주장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어쨌든 고신씨의 후예가 정말 맞다면 기원전 25세기로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장구한 이름인 셈입니다. 유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천적으로 서희가 요나라 소손녕과의 담판에서 고려가 신라가 아닌 고구려를 계승한 것이라는 세치 혀의 논리만으로 청천강 이북 땅을 확보했을 정도로 파괴력이 있는 명칭입니다. 유전적으로 보면 발해를 멸망시켜 주민을 흡수한 요가 대동강 이남의 일부 인구만을 흡수한 신라의 후손보다 더욱 고구려의 피를 진하게 갖고 있을 수도 있었는데도, 국호가 가지고 있는 명분의 힘이 이를 압도했던 것입니다.
고씨의 고려야 말할 것도 없고 왕씨의 고려 또한 몽골이 쳐들어와 150년간 쑥밭을 만들기 전만 해도 매우 강력한 문명이었습니다. 군사력, 외교력, 문화력에 있어 조선과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병자호란 때 조선 조총 부대 4만명이 후금 기병 300명에게 전멸당한 것과 고려 때 강한찬(강감찬은 오기) 장군이 21만명으로 당시 최강인 요군 10만명을 귀주에서 거의 전멸시킨 것이 대조가 됩니다(무엇보다 당시 인구로 21만 정예군을 동원할 수 있었다는 점). 단순히 당시 대륙의 정세의 차이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측면이 있다고 생각됩니다(조선에는 수레가 다닐 수 있는 길이 없었고(박지원 열하일기에 나옴), 2층 이상 건물을 지을 기술도 없었음(송나라 사람이 쓴 고려도경을 보면 고려에는 복층 건물이 즐비하다고 나옵니다)). 고려가 Corea이고 곧 Korea이며 장수왕 이후의 고려=왕건의 고려=통일 고려가 곧 삼위일체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따지고 보면 백두산 이북(실은 그 이전의 청천강 이북은)은 같은 고려 후손인 건주여진의 고토이고 우리 민족이 봉금지역에 야금야금 들어가 무단 점거한 것이긴 하나 어쨌든 통일 이후 동북아의 헤게모니를 다투는 과정에서 고려의 적통이라는 명분은 산해관 이북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한족을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점에서 북한의 고려연방제 통일방안에 있어 오로지 작명법만은 우리가 취함이 타당하다고 생각되는 바입니다.
윗글이 쓰고 보니 너무 만연한데다 밤이 늦었는데 내일 출근이 걱정되니 아래는 요점만 쓰겠습니다.
2. 국기
태극기는 1882년 박영효가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하러 가던 중 메이지마루호 선상에서 졸속으로 만들었다는 견해가 현재의 다수설입니다. 물론 고종이 사전에 도안을 지시했다는 유력한 반대 견해도 있습니다만. 어쨌든 태극은 주역에서 비롯된 것이고 팔괘는 복희씨가 만든 것으로서 중국에서 기원한 것은 분명한 사실인데 더 큰 문제는 박영효가 아무 생각 없이 팔괘에서 사괘를 빼고 나머지 사괘만 남겨서 이상한 상징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상한 문양을 흔드는 것은 동양 철학에 대한 예의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중국의 모든 것이 “환국”으로부터 나왔으므로 복희씨도 한국인이라는 유사역사학계의 주장이 나오겠지만 패스.
인공기야 색상의 선택이라든지 도안에 있어 심미적인 고려가 전혀 없는 디자인이므로 더 이상 논하기 싫습니다. 패스.
압록강 두만강 이남 한계를 선언하는 하늘색 한반도기도 별로입니다.
우리 문화유산들로부터 우리 조상 고유의 문양을 적극적으로 발굴하여 상징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예컨대 삼태극은 중국에는 없는 우리 고유 문양이라고 합니다. 삼족오는 고구려 사극 때문에 요즘 사람들이 유난히 집착하는데 중국에서 들어온 문양이고 일본 축구협회 엠블럼입니다.
3. 국가
애국가의 가사는 생경하고 추상적이며 우리 민족의 역사나 현실적인 고민, 정서를 담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교분리 나라의 국가라 보기에는 다소 특정 종교에 편향되어 있습니다. 애국가의 선율은 서양문명 우위론이 팽배할 때 작곡된 것으로서 (일본 기미가요처럼) 고유의 선율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곡의 모태가 된 한국환상곡이 일본 괴뢰 만주국 군가와 너무 유사하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뭐 삼성경제연구소 주장대로 외국인 노동자 천만명 받아서 다민족 할 거면 다 부질없는 얘기긴 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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