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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전향 후 15년간 무슨 일을 해왔나?
데일리NK 2012-05-17 18:09:18 원문보기 관리자 671 2012-05-21 23:43:43

"80년대 학생운동을 주도한 '주사파' 핵심세력이 북한에 포섭돼 조선노동당에 가입한 뒤, 남한 내 혁명조직인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을 결성한 사실이 드러났다. 국정원은 민혁당 핵심조직원인 김영환 등 4명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송치했다."

1999년 9월 9일 지하 혁명조직인 '민혁당' 사건에 대한 국정원 조사 결과가 언론에 대서특필되자 민혁당의 총책이자 '강철서신'이란 문건을 통해 대학가에 주사(주체사상)파 운동을 확산시킨 서울대 법대 출신의 김영환 씨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다. 김 씨는 이미 2년 전인 1997년 북한 체제에 대한 회의감 아래 민혁당을 해산했지만, 한 차례나 밀입북해 김일성에게 직접 대남 혁명 공작 지시를 받은 전력이 화제가 된 것이다.

그로부터 13년이 지난 후 김 씨의 행보가 다시금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달 14일 김 씨가 중국 다롄(大連)에서 랴오닝성 국가안전청(國安)에 의해 체포돼 50여일 가까이 구금되어 있다는 소식이 전해진 이후 언론은 '강철서신의 저자', '주사파의 대부'라는 설명으로 그를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90년대 중반 '북한의 수령론은 사기극'이라는 글을 말지에 게재하고 북한민주화 운동가로 공개 전향한 후 그의 행보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것이 없다.

김 씨는 13년간 한국 내에서 묵묵히 북한인권개선과 민주화 촉진에 대한 연구, 저술 활동을 해왔다는 것이 김 씨 주변의 평가다.



▲ 2005년 열린 북한인권국제대회에서
발표하고 있는 김영환 씨 ⓒ데일리NK

지인들에 따르면 김 씨는 주사파 운동을 주도했던 사람으로서 당시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을 모두 전향시키지 못했다는 점을 안타까워했다.

때문에 1980~90년대 학생운동 경력을 지닌 대부분의 인사들이 현실 정치에 직접 뛰어들며 이름을 드러낼 때도 공개적인 활동은 삼가했다고 한다. 지난 17대, 18대 총선 당시 정치권에서 다양한 영입 제의가 있었음에도 이를 끝까지 고사했다는 후문도 있다.

그는 특히 1980년대 주체사상 이론을 대학가에 전파하며 당시 청년들에게 북한에 대한 맹신(盲信)을 심어줬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크게 갖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심경은 민혁당 사건으로 조사 받을 당시 작성한 반성문에도 잘 드러나 있다.

"이렇게 사상을 완전히 전환하고 지금은 북한 민주화 운동에 전념하고 있지만 제가 과거에 했던 활동들로 인해 생긴 여러 나쁜 영향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것이었습니다. 제 잘못 중 큰 것들만 따져보면 첫째 운동권 전반에 걸쳐 친북적인 분위기를 확산시킨 것입니다. 지금 그 수는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북한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힌 젊은이들이 있으며 이들이 남아 있는 한 저는 죄책감으로 인한 마음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입니다."

1990년대 중후반 대량 아사 사태와 뒤를 잇는 탈북 행렬, 주체사상의 이론적 창시자인 고(故) 황장엽 북한 노동당 비서의 탈북을 보며 북한의 진실을 알리는 일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판단 아래 민혁당 내 핵심간부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지금 북한은 지구상 어떤 나라에서 볼 수 없는 독재를 펼치고 있다. 인민을 굶어죽이고 인권을 억압하고 있다. 우리는 혁명가다. 인민의 적은 우리의 적이다. 인민의 적이 된 북한정권에 맞서 투쟁해야 한다. 나는 남은 인생을 북한정권을 타도하는데 바치려고 한다. 나와 같은 길을 걸으려고 한다면 나의 벗이 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김정일과 함께 나의 적이 될 것이다."

이후 1991년 밀입북해 김일성과 면담하고 북한의 실태를 목격했던 점들을 바탕으로 북한 체제에 대한 날카로운 진단과 평가를 내놓기 시작했다. 그는 2005년 서울에서 열린 북한인권국제대회에서 "북한 사회는 전근대 봉건왕조와 군사독재체제와 마피아집단을 적당히 섞어놓은 것과 같은 사회이다. 이 중에서 특히 마피아집단과 유사점이 가장 많다"고 규정하며 "북한 체제가 세습 독재를 포기하고 개혁개방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민혁당을 해체했던 1997년 한국으로 망명한 황장엽 비서와 1999년 조우, 북한 민주화 전략 및 북한에 의해 왜곡된 주체사상을 이론적으로 정립하는 연구 활동을 시작했다. 황 비서는 생전에 김 씨를 북한 체제에 대한 이해가 깊은 연구가이자 믿을 만한 인물이라고 평가하며, '김영환 동지'라고 예우하기도 했다. 

김 씨는 황 비서의 연구 활동에 대해 "북한이 주체사상을 철학적으로 진정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여서 내걸었다기보다는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정치적으로 악용할 목적으로 사용했다"며 "북한의 주체사상이 김일성, 김정일 정권에 의해 철저하게 왜곡되어 왔지만, 황장엽 선생이 북한에 있을 때 연구하신 내용을 기본으로 한국에 오신 뒤 이를 더 깊이 있게 발전시켰다"고 평가했다.

그는 연구 활동 뿐 아니라 대학생이나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를 통해 북한 체제의 진실을 알리는 일도 꾸준히 병행해 왔다.

1999년, 세계 최초로 '북한민주화운동'을 모토로 내건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창립 멤버로 참여하면서 국내외에 북한 주민들의 참상을 알리는 일에 앞장섰다. 계간 시대정신 편집위원으로 동참해 관련 학자들과 함께 우리 사회의 선진화와 통일을 주제로 한 연구를 진행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통합진보당 경선 부정 사건으로 논란을 빚고 있는 '경기동부연합' 등 국내 자생 주사파 세력에 대해 끊임없이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2008년 종북 논란에 따른 민주노동당의 분당 사태 당시 "민노당 자주파의 90%는 주사파로 구성돼 있다"며 "주사파는 북한을 진정한 조국으로 생각하고 있고, 남한에 용공정권을 세운 다음, 북한 주도의 평화통일을 추진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있기 때문에 우리 사회 입장에서 본다면 굉장히 중요한 체제 위협세력"이라고 지적했다.

통합진보당 당권파의 실세로 알려진 이석기(비례대표 2번 당선자) 씨는 김 씨가 만든 민혁당에서 경기남부위원장을 맡은 경력이 법원 판결문에 남아있다. 만일 김 씨가 현재 중국에 구금되지 않고 한국에 있었다면 통진당 내 당권파들의 행보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남긴다. 

김 씨는 중국으로 출국하기 이전까지도 국내에서 북한 체제의 미래를 진단하는 저술 활동을 펼쳤다. 김정일 사망 직후에는 새로운 지도자 김정은의 통치 전략을 분석한 『포스트 김정일』(시대정신 刊)을 내놓기도 했다.

양정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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