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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하던 까무잡잡한 여자,남조선 가서 7년만에 귀부인이 돼 돌아와
북한RT 2012-07-14 08:45:10 원문보기 관리자 3562 2012-07-17 09:14:09

 

탈북 직전인 2005년경의 박인숙 씨.

《 북한 체제에서 ‘월남자의 딸’이라는 숙명에 체념하고 살아온 박인숙 씨(67). 자신이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대학을 아들이 나오고 손녀까지 안겨주자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남쪽의 아버지와 미국에 거주하는 친오빠의 경제적 도움으로 아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탈북을 결심한 것. 6·25전쟁으로 아버지와 생이별한 지 55년 만이었다.

 

그는 부녀를 가른 사선과도 같은 분단의 장벽을 스스로의 힘으로 넘었다. 하지만 이는 아들과 새로운 이산의 시작이기도 했다. 탈북 이후 남쪽으로 향하는 길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중국에서 체포된 그는 북송된 뒤 국가안전보위부에서 온간 비인간적 학대와 고문을 받았다. 그것은 박 씨만의 경험이 아닌 수십만 탈북자들이 겪었던 끔찍한 과거이자 현재다.

 

탈북 과정과 북송 이후에 겪은 일이 상세하게 기록된 박 씨의 수기는 수많은 탈북자들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박 씨는 탈북(脫北)과 북송(北送), 그리고 고문을 받는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그가 쓴 수기엔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었던 고통의 순간들이 매우 생생하게 묘사돼 있다. 》

 

○ 탈북 결심하고 찾은 아버지 집엔…

 

  "탈북! 이것을 생각하면 먼저 죽음을 생각해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이 죽음이고 가장 소중한 것이 생명이다. 그러나 그렇게 소중한 것이 생명이지만 가족을 위해 서슴없이 내던질 줄 아는 것이 생명의 의의일 것이다. 죽음! 이제 안 오면 다음에 올 것이고 다음에 안 오면 그 후에 올 것이다. 세상에 죽지 않고 계속 살아가는 생명체가 어디 있단 말인가. 나는 거의 3개월간 머리 속에서 이 전쟁을 하였다."

 

  "탈북을 결심하고 아버지가 살던 어대진 2층집을 방문하였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 차에서 내려 큰 길로 곧장 1시간 30분 정도 내려가자 길 왼쪽에 산자로 지은 2층집이 나타났다. 나는 대뜸 이 집이 해방 전에 아버지를 모시고 우리가 살았던 병원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나는 맞은켠 큰길가에 서서 내 눈에 길이 기억하려는 듯 바라보았다. 아버지와 어머니와 우리들의 유년기가 흘러간 집! 내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웬 할아버지 지나가신다. ‘늬기요. 우째 우노?’ 나는 아버지가 계시던 집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나무랄 데 없이 착하게 살아온 어진 후손으로서 누구의 후손이라고 떳떳이 말 못하는 처지에 있으니 이 얼마나 긴긴 세월을 뛰어넘는 형벌이란 말인가…. ‘우리 아버지 박○○이요’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던 이유였다."

 

  "5월15일 도문 변방대에 압송되었다. 이날은 우리 집안에 운명적인 날이었다. 45년 전 할아버지가 잡혀간 날이다. 2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큰 구류소에 돌아와 옷을 몽땅 벗기우고 내의만 입는 상태에서 한 방에 28명이 들어갔다. 북송되면 관리소행이 결정되어있는 사람들은 모두다 정신환자와 흡사하였다."

 

  "아침에 30명을 호명하였다. 두 명씩 족쇄로 묶어 차에 태웠다. 차는 도문시내를 달려 국경의 다리인 ‘조중 친선의 다리’로 향해 달리었다. 나는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겉으로는 무한한 자유로 가장된 이 도시에도 지금 이 순간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숨어 지내야 하는 탈북자들의 고통이 있을 것이다."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 있고 조국으로 돌아가는데 왜 이렇게 가슴이 떨리는가. 뒤를 돌아보니 젊은 여자들이 창밖을 내다보며 울고 있다. 무슨 기구한 운명을 타고 났기에 태어난 땅을 등지고 남의 나라에 와 수모를 겪다가 이 모양 되었는가. 이 길이 그저 강제 송환으로 끝나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으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수갑을 차고 절망의 언덕을 넘고 절망의 두만강을 건너 끌려 왔던가. 정말 살아남고 싶었다. 아버지를 만나는 날까지 만이라도 살고 싶었다. 다리 아래로 많은 사람들이 형형색색의 옷을 입고 나와 유유히 흘러가는 두만강을 즐기고 있으니 그들의 자유가 너무 부러웠다. 도대체 이 땅에 누가 분단의 비극을 안겨줬단 말인가."

 

○ 비명이 끊이지 않는 수용소

박인숙 씨의 수기 중 일부. 북한 국가안전보위부의 고문과 학대 모습이 생생하게 적혀 있다.

"국가안전보위부원들의 서릿발 같은 눈길(눈총)을 받으며 우리는 머리도 들지 못한 채 땅바닥에 두 줄로 앉았다.

 

‘보위부에 대해 이미 들어서 알고 있을 것이다. 죄를 토설(실토)하지 않고서는 결코 살아서 나가지 못하는 곳이다. 나라를 배반한 죄를 반성하고 뉘우치는 자에게는 당의 은덕이 베풀어질 것이지만 만약 거짓으로 일관하면 즉결 처단할 것이다. ○년들, 남조선이 그렇게 좋더냐. 조국을 배반하면 어떻게 되는지 곧 알게 될 것이다.’"

 

"새벽 6시 숱한 사람을 차에 싣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나와 같이 왔던 여자들이 모두 없어졌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들은 중국에서 한국행을 자인한 사람들이라 회령 22호 관리소로 즉각 이송됐던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고개 숙여 애도를 표시했다."

 

"찌는 듯한 여름 날. 6평 면적에 20명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여야 하는 자세로 배고픔을 참으면서 앉아 있었다. 어제 몸 검사할 때 맞은 여자는 머리가 아프다고 울었다. 구류장 한켠(한쪽) 변소에서 나는 냄새가 지독했다. 음식을 마구 먹었다. 강냉이를 쪼개 삶은 죽이었는데 시고 썩은 내가 났다. 5분 내에 변기 물에 그릇을 씻어 내보내야 했다."

 

"한국(행) 기도를 자백하지 않으니 악에 바친 예심원이 귀쌈(따귀)을 갈겨 멍해졌다. 팔을 비틀어 어깨 인대가 늘어났는지 쑤시고 아팠다. 2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아프다. 검토가 40일간 계속됐다. 마침내 보위부에서 풀려났다."

 

"한 달 있다가 옮겨진 곳이 ○○안전부였다. 감방이 10개였는데 우리 감방의 10명 중 탈북자가 6명이었다. 나머지 4명 중 1명은 먹을 것이 없어서 시어머니를 칼로 위협한 며느리였다. 2명은 한국 드라마를 보다 잡혀 온 어느 공장의 보위대(무장경비대) 처녀들이고, 1명은 중국에 있는 딸로부터 돈을 받은 여성이었다.

 

말하다가 들키면 쇠창살 앞에 세워두고 창살 위에 손을 펴서 얹게 한 뒤 막대기로 내리친다. 비명을 지르면 반복한다. 창살 사이로 손을 넣어 머리칼을 쥐고 마구 흔들기도 한다. ‘또다시 반역을 저지르겠는가.’ ‘안 그러겠습니다.’

 

추워서 잠도 안 오지만 이와 벼룩 또한 고문이었다. 줄지어 앉아 노동당 10대 원칙을 외워야 한다. 그 다음엔 이를 잡아야 한다. 20분이다. 유일한 자유시간이 이때다."

 

"어제 들어온 여자가 실수를 했다. 밥그릇을 제꺽(재빨리) 내보내지 못했다고 뜨거운 국물을 면상에 들이부었다. 툭툭 턴다는 이유로 몽땅 세워놓더니 밥도 주지 않고 가버렸다. 소금물인 국을 부어 놓으면 강냉이 껍질과 속이 둥둥 뜨고 돌이 버적버적 씹히는 밥은 시큼털털한 소여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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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길 몰래 숨겨간 200위안…그의 목숨을 살렸다.

대북 소식통은 박 씨의 고향 사람들이 지난달 그의 기자회견을 보고 "장사하던 까무잡 잡한 노인이 남조선에 가서 7년 만에 귀부인이 돼 돌아왔다"고 쑥덕거렸다고 전했다.조선중앙방송 캡처

 

수기에는 강제북송 당시 중국 돈 200위안(약 3만6000원)을 숨긴 사연이 여러 번 등장한다.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끝까지 돈을 챙겨야 했던 애착 때문인 듯하다.

 

"조선말을 아는 중국 여군이 여자들의 옷을 몽땅 벗기고 수색했다. 내가 늙은이여서 그런지 몸수색을 당하지는 않았다. 그 덕분에 나는 200원(위안)을 감출 수 있었다. 꼬깃꼬깃 접어 비닐에 싸서 언제나 손에 쥐고 다녔다."

 

"압송 도중 벌판에서 소변을 보다가 그만 떨어뜨렸다. 발로 밟았다. 여군이 보고 있었다. 신발을 고쳐 신는 척하면서 얼른 돈을 쥐었다.

 

밤에 여군이 나를 툭툭 건드렸다. 돈을 내놓으라는 눈치여서 하는 수 없이 돈을 주었다. 그는 다시 적당히 접더니 내 손에 쥐여주었다. 눈물이 났다. 북송시키는 중국 정부는 증오스러웠지만 그 여군의 인도주의적 정신을 높이 평가하고 싶었다. 죽을 때까지 나의 심장을 울려줄 것 같다."

 

"북한 보위부가 6명씩 불러 옷을 몽땅 벗기고 ‘앉았다 섰다’를 50회 시키면 무엇이든 빠져나온다. 은밀한 곳에 돈을 숨기는 것이 일반화되었다기에… (그대로) 따라 하지 않은 덕분에 돈을 살릴(챙길) 수 있었다."

 

  "나는 이 돈을 마지막까지 살렸다. ○○집결소에 와서 강제노동을 할 때 찾아온 ○○이가 옆을 슬며시 지나갈 때 발 앞에다가 뿌려주어 그 어려운 ‘보관’을 끝냈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는 그 돈으로 쌀 10㎏ 사서 나에게 밥을 지어 왔다고 했다. 어머니가 늘 나를 두고 돌 꼭대기에 올려놓아도 살아나는 사람이라고 하시던 게 옳았다고 하면서 그 돈이 없었더라면 밥을 못 해갔을 거라고 하였다."

 

  "형님은 다리를 저는 몸으로 밥과 두부를 도시락에 넣어가지고 고개를 넘어 10리쯤을 걸어 안전부에 가져오곤 하였다. 어떻게 그런 힘이 났는가를 물으니 ‘이담에 통일이 되어 시형을 만나면 왜 인숙이는 없는 가고 할 때 무어라고 말하겠는가. 형제 다섯이서 사람하나 못 살렸는가 하면 어떻게 하겠는 가’ 그런 생각나서 죽을힘을 다해 다녔다고 한다. 형님, 나는 그 때 앞으로 길이 잊혀지지 않을 가장 맛있고 가장 비참한 식사를 하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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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사롭지 않았던 박 씨 집안의 음악적 재능

 

  박인숙 씨의 수기를 읽으면 그가 문학적 감수성이 뛰어난 다재다능한 여성임을 알 수 있었다. 학교 8년 내내 최우등을 했을 뿐 아니라 체육도 잘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월남자의 딸은 어떤 재능도 꽃필 수는 없었다.

 

  "○○가 우리 집에 왔었다. ‘걜 공부시켜 성공 못합니다. 체육을 시키시오.’
  나는 도 스케이트 대회에 나가서 인민학교 부문 속도경기 500m에서 1등을 하고 공화국 기록을 돌파하였다. 19살 때까지 계속 하였는데 친척들이 와서 아이를 못 낳는데 체육을 그만하라고 해서 그만 두었다."

 

  그러나 진짜 박인숙 씨의 천부적 재능은 음악 분야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인민학교에서 합창단 지휘자를 했고 최승희 무용학교 음악과에 추천을 받았다. 중학교 졸업 뒤에는 오빠와 함께 직접 음악대학에 가서 학장에게 사정하기도 했지만 끝내 성분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박 씨의 아들도 성분이 걸렸지만 뛰어난 재능 덕분에 어머니가 가지 못한 음악대학에 끝내 갔다. 

 

  "내 아들이 지금 이 대학 작곡학부 교원으로 있다. 우리 애가 6살 되었을 때 음악선생이 욕심을 내 바이올린을 배워주었다. 나는 말리였다. 또 나처럼 가슴 아프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가 나를 닮아 청음 능력이 남다른 것이 선생으로 하여금 놓지 않게 만들었다.

 

중학교 졸업하고 금성고등에 추천 받았으나 외할아버지가 또 문제되어 불합격이었다. 이 학교는 교원이 학생 한두 명을 교육하는 수재를 키우는 전당인데 어찌 할아버지 월남하고 삼촌이 해외 연고자인 내 아들이 입학할 수 있었겠는가. 우리 진명이가 실력도 제일 높았지만 어느 간부의 자식이 시험도 안 치고 붙었다."

 

  "나는 아들을 군대에 보냈다. 제대군인증과 당원증이라도 있어야…. 대학에 입학하기 위하여 13년이라고 기나긴 세월을 군에서 보내야 하였다. 돌아온 아들은 아바이 같았다. 그러나 드디어 음악대학에 입학했다."

 

  한국에 온 박 씨는 음악 때문에 행복을 느꼈다.

 

  "저는 북한에서는 듣지도 보지도 못하던 세계급 오페라단의 배우들과 교향악단의 연주를 보면서 아들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꿈만 같습니다. 음악을 사랑하는 동료들끼리 외국음악이 들어있는 카세트를 얻어가지고 가만히 듣다가 들키어 곤역을 치르던 일도 있었던 저로서는 남다른 감회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의 수기의 앞부분에는 여러 개의 노래가 악보와 함께 적혀 있다. 이를 본 한 음악전문가는 "음표 표기를 보면 작곡을 하거나 전문적으로 악보를 베껴 쓴 경험이 있는 상당한 솜씨"라고 평가했다. 집안의 이력일까. 박 씨의 남한 이복동생의 집에도 수천만 원짜리 고가 바이올린이 있다고 한다.

 

  박 씨는 자신의 탈북 때문에 촉망받는 음악가에서 하루아침에 농민으로 전락한 아들에게 견디지 못할 죄책감을 느꼈고 끝내 재입북의 길을 선택했다. 박 씨의 목숨 내댄 모성애 위에는 자신의 이루지 못했던 꿈도 얹혀 있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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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ㅋㅋ ip1 2012-07-17 09:49:36
    박상학씨를 거론하면서 삐라를 뿌리지 말라고 아파트 아줌마들이 계속 항의하니까 또 다른 다른 아파트로 이사가서 뿌리드라고 ...남의 시중 들고 못사는 탈북자들이 아파트에 산다고 선전 잘 하시던데요.. 허연 멀쓱한 낯판으로 굶어주깆 못해서 돌아왔다?? 북한정부도 기관이고 코미디정부입니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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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나가다 ip2 2012-07-17 12:38:40
    북한정부도 다 압니다. 걔네들 생각처럼 그렇게 바보는 아닙니다. 남의 뒤를 캐내고 못살게 구는데는 타고난 재능을 가진 놈들입니다. 다만 현재 박아줌마를 용서하는 것처럼 하고 선전하는 것이 체제선전을 위해서 더 유익하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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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kdbxhddlf ip3 2012-07-17 13:28:18

    - 관리자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2012-08-30 10: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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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윗사람에게 ip4 2012-07-17 13:37:13
    그런게 아냐. 저 여자가 다시 북한에 넘어간건 자식 땜이 아냐. 그건 핑게야.
    그게 아니라?

    여기 와 살자니까 자기 기대와 다르다 그 말이야.

    우선 그래도 지가 북한에 살 때처럼 막 행패부리고 남을 갈궈도 되는 줄 알았고

    상대적 신분으로 보니까 저도 최소한 강남땅 졸부만큼의 생활수준은 될 줄 알았던 거야. 먹을게 없어 탈북했어도 저는 최소 퍼센티지로 따지면 북한에선 그 정도 사회계급은 됐거든?

    그러니 짜증이 나서 되돌아간 거야. 비록 재물은 북한에 있을 때보다 더 가져도 상대적 빈곤에 대해 짜증이 난 거지.

    왜 저렇게 똥인지 된장인지 낱낱이 알려줘야만 바보들은 아는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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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진감래 ip5 2012-07-22 12:44:42
    미친할멈이지///글구 쫌 싸우지들 말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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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진감래 ip5 2012-07-22 12:46:19
    ip4///너도 똑같아// 이바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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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진감래너야말로빙신 ip6 2012-08-09 02:34:36
    대체 내가 왜 바부냐? 이런 미친 놈들은 제 맘에 안들거나 저보다 유식하면 배아파서 딴지지? 너야말로 바부다 병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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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짜이유는 ip6 2012-08-09 02:33:35
    그런 게 아냐. 아들 문제는 다 핑계고, 실은 '상대적 빈곤' 때문에 짜증나서 돌아간 거야.
    설마 바보래도 이미 넘어갔을 때 아들은 무사하지 못할 거란 걸 몰랐겠어?
    그게 아니야.

    한국에 왔더니?

    그래도 저는 북한에 살 때 높은 계급이고 제 앞에서 사람들이 굽신대고 남의 거 뺏거나 뇌물 받아먹은 재미가 있었는데? 상대적 우월감이 높았겠지.

    그런데? 여기 오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떨거지 밑바닥 계급이 되어 상대적 빈곤감에 시달린다 이거야. 실력도 없지만, 그보다 한국사회에서 실제로 만배는 중요한 혈연지연과 기본밑천이 없으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지.

    더구나? 저 여자 생각으론? 여기 들어오기만 하면 '귀순용사'라고 하여 국가가 아무 짓도 안해도 평생 빈둥빈둥 놀고먹고 아마 사장계급 정도는 만들어줄줄 알았는데(북한식 생각의 호환성) 그게 안되니 짜증이 난다 이거야.

    이때, 이미 짐작은 했겠지만 아들이 추방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어차피 여기서 평생 궁벽하게 살다 죽으니, 들어가서 죽으니 마찬가지란 생각이 들어 홧김에 다시 재입북한거지.

    이제 알겠나? 저 여자 심리파악을 못하는 걸 보니 역시 여기 있는 사람들 별로 영리한 사람들은 아니군. 인간 정신상태 깨닫는 능력 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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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러운 현실 ip7 2014-12-29 15:19:26
    조국 북녘에서도 서러움을 받은것도 모자라서 자유대한민국에서도 서러움을 받고 살아왔던 박정숙여인! 2년여전에 재입북해 평양에서 아들과 며느리 손녀와 함께 호화생활을 누려가고 있지만 그게 언제까지 갈지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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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설 ip8 2014-12-29 15:45:34

    - 설설님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2014-12-29 16:4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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