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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올림픽에서 1등 해도 월남한 아버지 때문에…
북한RT 2012-07-12 08:00:03 원문보기 관리자 1156 2012-07-17 09:14:05

《 지난달 28일 북한에 돌아가 남쪽을 비난하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한 박인숙 씨(67)의 삶은 말 그대로 남북 분단으로 빚어진 우리 민족 비극의 축소판이다.

 

그가 한국에 남겨두고 간 수기엔 6·25전쟁 당시 피란 도중 뜻하지 않게 이산가족이 된 순간부터 반동으로 몰려 핍박을 받아야 했던 월남자 가족의 설움, 북한 식량난에 따른 대량 탈북과 중국에서 체포된 뒤 강제 북송돼 고문 받은 내용 등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또 남북 이산가족이 만났을 때의 정서적 차이와 재산권 문제로 인한 갈등도 고스란히 들어 있다.

 

동아일보는 박 씨가 자신의 삶을 정리해 꼼꼼히 기록한 수기와 수첩 내용이 전쟁의 비극을 경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를 포함해 우리 국민 전체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판단해 수기 내용을 상·하로 나눠 소개하기로 했다. 다만 그의 한국생활과 친척 이야기는 관련 당사자의 신변안전과 명예를 고려해 쓰지 않기로 했다. 》

재입북한 박인숙 씨가 지난달 28일 평양에서 열린 기자회견 도중 두 손을 들어 만세를 외치고 있다. 조선중앙방송 캡처

 

"내 유년기 기억의 첫 장을 꽉 채워 줬던 이 이야기는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아직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인 1950년 겨울에 있었던 일이다."

 

박인숙 씨의 수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동네 아이들과 줄넘기를 하던 그는 어른들이 무리 지어 가는 것을 보고 따라갔다.

 

"군대들이 줄지어 앉은 멋진 자동차가 서서히 들어오고 큰 길 량(양) 옆에는 꽃다발을 든 사람들도 있고, 없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들은 엉거주춤 서서 흔들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불안한 몸가짐을 하고 한 줄로 서 있었다. 그것이 이 땅을 피로 물들이고 1000만 이산가족을 만든 전쟁의 시작이었음을 내 어찌 알았으랴!"

 

그가 처음 본 국군의 인상은 공포였다. 박 씨의 할머니는 누군가의 집을 묻는 국군에게 부지깽이로 방향을 가리켰다는 이유로 총살될 뻔했다.

 

"국방군 2명이 할머니를 밭에 세워놓고 권총을 겨누고 노발대발하지 않는가! 차고 푸른 비수가 등골을 긋는 것처럼 소름이 쫙 끼쳐 왔다. 나는 달려가 할머니를 붙잡고 ‘우리 할머니 죽이지 마세요’라고 애원했다. 동네 어른들이 나와 빌고 또 빌었다. 다행히 할머니는 사경에서 구원됐다." 박 씨는 당시 할머니에게 달려가다 넘어져 생긴 상처를 볼 때마다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떠올리곤 했다.

 

평생 잊지 못할 국군도 있었다. 발바닥에 물집이 생긴 박 씨를 ‘하나도 따갑지 않게 해 주겠다’고 능청스럽게 속이고 물집을 터뜨린 뒤 성냥불로 지져 치료했다. 기절초풍하며 울었지만 효험이 있었는지 그날부터 박 씨는 뛰어다닐 수 있었다. 그는 과자와 사탕을 주기도 했다.

 

"나는 오빠가 마냥 좋았다. (그는) 내가 맛있게 먹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녁이 되면 하늘을 쳐다보며 명상에 잠겨 있다가도 나를 불러 노래도 배워(가르쳐) 주었다. 그 노래는 아버지와 이(북)쪽과 저(남)쪽으로 갈리어 그리울 때마다 혼자 애달피 부르곤 하던 노래였다."

 

서로 다른 얼굴의 군인이 공존하는 전쟁은 어른들에겐 생사의 갈림길이었다. 하룻밤이 지나면 세상이 바뀌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아이들일 뿐이었다.

 

"네 분이 모여서 무슨 논쟁을 그렇게 하시는지 위험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는데 끝날 줄 몰랐다…. ‘엄마 이겨라, 아빠 이겨라. 엄마 이기면 내 가운뎃손가락에 딱 붙어라’ 추워서 오들오들 떨면서도 동생은 이런 장난을 하고 있었다. 옆집 동원이 아버지가 달려와 ‘아이구, 박 의사님, 어째 이러구들 있습네? 온 동리가 다 떠나가는데 빨리 가시기우!’"

합성사진으로 만난 아버지와 어머니 박인숙 씨가 서울에 남겨둔 사진. 박 씨는 1980년대 북한에서 어머니(왼쪽)와 함께 찍은 사진에 남쪽에서 구한 아버지의 사진을 합성해 보관해왔다. 아버지와 떨어져 지낸 시절의 아픔과 그리움을 합성사진으로나마 달래려 한 듯하다.

 

논의 끝에 박 씨 가족도 피란길에 올랐다. 아버지와의 이별이 기다리는 것도 모른 채 무조건 피란민 행렬에 묻혀 떠밀려 갔다.

 

"식구들을 잃을까 봐 두리번거리면서 고함치는 소리도 들렸다. 할머님에게 칭찬받기를 좋아했던 나는 발구에 타지 않고 그냥 걷겠다고 떼를 써 얼마쯤 가다가 지쳐 아버님의 등에 업혀 갔다. 그때 일곱 살이었던 내가 악돌이였다고 후에 할머님이 회고하시는 것을 들었다."

 

짧았던 피란길은 어느 강 앞에서 끝났다. "사람들이 아우성치고 있어 가까이 가 보니 작은 배에 수십 명이 타고 강을 건너려는 것이었다. 맨 마지막이 우리 차례였는데 워낙 식구가 많아 절반밖에 탈 수 없었다. 나눠 타고 가면 되지 않겠냐는 말에도 아버님이 그렇게 하시지 아니하였다. 여기서 헤어질 수야 없지 않나. 모두 그 배를 타고 갔더라면 아버님과 헤어지지 않았을 것을…."

 

배는 돌아오지 않았고 강을 건너지 못한 박 씨 가족은 다시 고향집으로 향했다. 그때 마주친 피란민 행렬 속에서 누군가 달려 나와 "아이구, 이게 박 의사 아닙니까?" 하고 알은체했다. 그 말을 마침 주위에 있던 국군 헌병이 들었다.

 

"‘박 의사란 게 누군가’ 하면서 헌병이 총탁(총의 개머리)으로 아버지를 밀쳤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아우성치며 쫓아가려 하였으나 사람들을 헤치고 나갈 수 없었다. 아이들은 울고 있었다. 남쪽으로 다시 가면 어디선가 만날 수 있을 것이었다. 어른들은 그렇게 생각하였지만 그것이 (아버지와) 영영 이별이었다."

 

아버지를 찾으려고 고향으로 가는 길 대신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바꾼 박 씨 가족을 산에서 내려온 누런 군복의 군인(인민군)들이 막아섰다.

 

"‘여러분 어서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인민군과 중국지원군이 재진격했습니다.’ 밤새 세상이 또다시 바뀌었다. 아버지를 어데 두고 시체들을 넘고 넘어 돌아오는 나의 마음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박 씨는 탈북한 뒤 2006년 8월 서울에서 꿈에 그리던 아버지를 찾았지만 이미 정신을 잃고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마지막 숨을 가쁘게 내쉬고 있었다. 그가 찾아뵌 지 20여 일 만에 그의 아버지는 딸이 온 사실도 모른 채 한 많은 이 세상을 등졌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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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자의 딸에게 돌아온 건 손가락질…군 1등에게 돌아온 건 불합격

 

아버지와 헤어진 후 박인숙 씨의 인생은 180도로 달라졌다. 월남자의 딸은 아무 기회도 얻을 수 없었다.

 

"인민학교 5학년 때 군(郡) 수학 올림픽에서 1등을 하였지만 약속된 상품은 나오지 않았다. ‘월남쟁이’ 딸이 1등을 해 떠들썩한 게 정치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게 이유였다. 다음 날 아이들이 수군거렸다. ‘쟤는 아무리 잘해도 쓸데없다’라고."

 

"1957년 인민학교를 졸업하면서 최승희무용학교 음악과에 추천받았다.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이런 생각을 했었다. 그렇게 보고 싶은 아버지였건만 나에게는 아버지란 존재가 아예 없었으면 좋겠다고, 그러면 내 맘대로 공부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어머니에게 왜 아버지를 붙잡지 못하고 잃어버렸느냐고 철없이 엉엉 울었다."

 

그런 박 씨에게 선생님이 조용히 말했다. "너는 알아야 한다. 남이 한 발자국 걸어갈 때 너는 열 발자국 뛰어야 한다는 것을…."

 

"(중학교) 졸업식 날. 최우등생 호명과 상장 수여식이 있었다. 수상자 3명 중 나는 없었다. 나는 8학년까지 한 번도 최우등을 놓친 적이 없었다. 성분이 나쁘다고 억지로 빼놨던 것이다. 눈물이 났다. 눈물이 안 나는데 엉엉 운 적은 많았어도 눈물이 나는데 울지 않은 적은 처음이었다. 아버지가 반동일지라도 (내가) 최우등이야. 그렇지 않은가."

 

"이사할 때 아이들이 기차를 따라오며 소리쳤다. ‘잘 가라. 다시 만나자. 인차(곧) 오너라.’ 며칠 뒤 ○○이가 왔다. 그날 밤 일로 학교 민청총회에서 두들겨 맞았다는 것이다. 열아홉 살까지 한마을에서 살던 죽마고우와 헤어지며 우는 것도 반당적 행위라니…."

 

"졸업생 3분의 1이 대학에 갔지만 나는 1인자였어도 추천을 못 받았다. 어머니 몰래 울고 또 울었다. 어머니는 마치 자기가 죄지은 사람처럼 눈치를 살피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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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토의 땅에도 정이 살아있었다.

 

박인숙 씨 수기의 한 대목. 남쪽으로 간 아버지를 그리워하던 할머니의 모습을 추억하고 있다. 박인숙 씨 수기 캡처

박인숙 씨의 조부모는 늘 남쪽으로 간 아들을 그리워했다.

 

"쉴 참이면 할머니는 각담(돌무더기)에 올라 앉아 노래를 부르다가 슬피 우셨다. 그 모습이 그리도 처량할 수 없었다. 장마당에서 사온 쌀로 이밥(쌀밥)을 할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밥이 네 식기(그릇)가 있고 거기에 보자기를 덮어 놓았다. 내가 물으면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네 애비, 삼촌들이 올 것 같아서…. 집 나간 사람들은 꼭 온단다.’"

 

"깊은 밤에 자다가 깨어보면 할아버지가 자그마한 밥상에 무엇인가 올려놓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나도 그것이 아들들의 명복을 비는 것임을 알 수가 있었다."

 

박 씨는 자신의 나쁜 성분에도 불구하고 정을 나눴던 사람들을 잊지 않았다. 그 추억의 첫머리엔 사람 찾기 계주를 했던 인민학교 시절의 일화가 적혀 있다.

 

"뛰어나가 쪽지를 보았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달리시오.’ 젠장, 하필이면(남쪽으로 가신 아버지와 함께 달리라는 쪽지가 나오나)…. 눈물이 왈칵했다. 나에게 어디 아버지가 있는가! 쪽지를 던지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발버둥질하며 울었다. 주석단에 계시던 교장선생님이 달려와 나의 손목을 이끌고 달렸다. 비록 1등은 못했지만 교장선생님이 고마웠다."

 

"아버지의 조수였던 황학룡 선생이 어머님을 육아원에 입직(취직)시켰다. 반동의 처인데…. 아버님과 제자의 의리를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좋은 아버지인데 우리는 갈라져 있다."

 

먹을 것이 없던 시절 박 씨를 챙겨주던 친구도 있었다. "기술 학교에 다닐 때 나는 도시락을 싸가지 못하고 다녔다. 점심때 나는 슬며시 나무숲에 가서 책을 보다가 돌아오곤 하였다…. (사연을 알게 된) 내 옆에 앉은 강은산이 늘 도시락을 2개 싸왔다. (나중에) 남편을 잃은 은산이가 굶어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삶 자체가 쌀을 구하기 위한 투쟁이었던 그때 나를 찾아오기 미안했을 것이다. 살기 힘들다고 의리까지 저버린 내가 죄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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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패 ip1 2012-07-17 11:14:50
    발제글 닉네임 관리자님 박인숙이가 한국에서 생활할때 북한에대한 나쁜 소리 하고 수기를 남기고 간것을 자료로 묶어 다시 북송해 버리세요. 그럼 북한당국에서 무슨 현상이 일어날까요. 북한 당국도 사람을 알려면 제대로 알아야죠. 박인숙의 양면 낮짝을 남북이 다알게 말입니다. 그런 인간은 동정이 안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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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굴러온돌 ip2 2012-07-20 00:35:06
    박인숙의 수기는 내용으로 보아 진실성이 있습니다. 그가 지금 북한에서 하고 다니는 언행의 비 진정성과 겪고 있을 심리적 갈등이 이해가 됩니다.
    그 비운의 여인의 입장은 자식을 길러본 사람은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체제의 갈등과 민족분단의 비극이 낳은 우리 모두의 아픔입니다.
    협박에의한 입북, 자식에 대한 모성, 생존하기 위한 몸부림이라는 것을 상식있는 자유시민들은 다 알고 있을 거구요.
    눈가리고 아웅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북한 지도세력의 어리석은 짓거리와 그 가증스러움이 한심스럽고 치가 떨리지만...
    그래서 오히려 박인숙에 개인에 대하여는 분노 보다는 역사의 제물이 된 그 여인에게 저는 연민과 동정이 가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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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패 ip1 2012-07-20 03:10:12
    ㅋㅋㅋ 그렇게 연민과 동정이 많은 당신도 북에 가면 되겠네요. 가서 기자회담도 하고 북한 곳곳에 돌아다니며 두손 활짝 벌리고 김정은 장군 만세 웨쳐 대시요. 그럼 배급도 주고 집도 주겠는걸요. ㅉㅈㅈ 당신같은 연민과 동정이 많은 애들은 적으로 전략하고 남한을 적화 통일하겠다고 으르릉거리는 박인숙이와 같은 인간들과 별반 다른것이 없지요. 단물다 뽑아먹고 쓰레기장으로 보내지는 북한 현실을 당신들은 모를것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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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극 ip3 2012-07-22 14:51:49
    짧은 내용이였지만 우리민족이 겪고있는 슬픔,현실이 아닌가요,,,
    눈물이 나고 가슴이 아프고 우리모두가 받고 있는 마음의 상처이고 가슴아픈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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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나가다 ip4 2012-07-25 22:47:37
    분단의 비극이 낳은 어쩔수 없는 선택이니 너무 욕하지 마세요.
    저분도 남한에서 태어났으면 크게 성공하셨을 분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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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기 ip5 2012-07-27 13:15:10

    - 관리자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2012-08-08 02:5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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