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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의 푸른 소나무
Korea, Republic of 관리자 1285 2014-03-11 00:27:26

오늘은 12살에 북한을 탈출해 중국을 떠돌다 2005년 대한민국에 입국한 탈북 소년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리겠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현재 강남의 모 건축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의 형은 북한에서 불의의 사고로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큰 아들을 잃은 그의 부모님들은 둘째 아들을 금싸라기처럼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그가 세상에 태어났을 적엔 북한이 이미 '고난의 행군'에 아수라장이 된 때였습니다.


배급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사람들은 분명 아침부터 저녁까지 힘들게 일하면서도  습관처럼 배급을 기다렸습니다.


바다가 지역이 고향인 송군의 어머니는 새벽녘이면 파도에 밀려 온 미역을 주어 가지고 시장으로 나가고 건축업자인 아버지는 건축자재가 공급되지 않아 갱도건설을 다녔습니다.
자라면서도 배급이란 말만 들었고 단 한 번도 실체를 볼 수 없었습니다. 늘 그의 어머니는 "배급도 안 주면서 장사라도 마음대로 하게 하지 단속은 왜 하냐"며 불만을 토했고 아버지는 "고난의 행군이 끝나면 배급을 줄거요"라며 어린 아들을 품에 안고 "붉은기를 끝까지 지키자"고 알아듣지 못할 다짐을 받습니다.
아버지가 말씀하시는 '붉은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른채 아들은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려는 마음으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분이 옥수수 한 자루(30킬로그램)를 가져 오고 송군네 식구는 태어난 집을 등지고 깊은 산골 오두막으로 이사를 가야 했습니다. 옥수수와 맞바꾼 오두막은 수돗물이 나오고 콘크리트로 지어진 15평 문화주택과 비교할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오두막은 팔뚝두께의 가느다란 소나무기둥 몇 개에 옥수숫대를 엮어 진흙으로 지어졌고 천장은 키 작은 어머니의 머리에 닿았으며 좁은 방안의 네 식구는 언제나 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습니다.


쥐들이 뛰노는 축 늘어진 누런 천장과 누워서 위로 팔을 뻗으면 집의 양 벽이 손발 끝에 닿는 곳, 다리를 펴면 발끝에 가마가 닿는 곳이 그의 집이였습니다.
오두막에서 1년이 지나자 집의 재산이나 다름없는 네눈박이 검둥이가 림산사업소 사람들의 손에 끌려갑니다. 누나도 울고 송군도 따라 가며 내놓으라고 고함쳐 울었지만 어머니와 아버지는 침울한 얼굴로 오누이를 막아섭니다.


그리고 얼마 후 림산 사업소로부터 검둥이와 거래 된 소나무 20대가 집터라 불리는 밭머리에 부리워 집니다.
건축업으로 당원이 된 송군의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새로 일군 밭에 집터를 닦고 새 집을 지었습니다, 옥수숫대가 아닌 든든한 소나무 기둥에 참나무 가지를 앞뒤로 엮고 그 속에 진흙을 처넣어 올린 집은 천정도 높고 방안도 넓어 어린 마음에도 기분 좋은 집이였습니다.


동네에서도 가장 깊고 높은 산중턱에 짓다보니 저 멀리 고개 너머 시오리 마을까지 한 눈에 들어오는 경치 좋은 곳이 송군이 떠나 온 집입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경치가 좋다 할지라도 먹거리가 해결되지 않는 곳에서 송군네는 늘 굶주림과 영양실조로 귀가 멀고 정신을 잃는 횟수가 늘며 장래를 기약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에서 탈북을 결심하였고 3년여의 중국생활 끝에 대한민국에 입국하게 됩니다.


송군은 몇 년간의 학습공백으로 학과목 성적이 많이 떨어져 있었지만 숨 막히게 두려웠던 탈북의 순간들과 중국에서의 고역을 생각하며 중학교와 고등학교 6년을 개근합니다. 더는 북한처럼 도시락이 없어 친구들 눈을 피해 학교 뒷산에 숨지 않아도 되었고 꼬마계획과 사회지원 명목의 현금이 없어 친구들 앞에 머리 숙이지 않아도 되었으며 겨울철 땔감을 등에 지고 가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오로지 학습과 운동이 학교생활의 전부였습니다.


고등학교시절 대통령상 장학금을 받게 되자 송군은 더욱 자신감을 가지며 장래의 희망을 설계하게 됩니다. 중학교 졸업을 앞두자 그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다른 탈북자들은 남한 학교정착이 어렵다고 하던데 아들은 어떻게 극복하였니?"
그제야 아들은 학교에서 있었던 초기정착의 스토리를 터놓습니다.


얼굴이 가무잡잡하고 체격이 왜소한 송군의 학교정착에는 어려서부터 단련된 노동의 체력과 끈기가 있었습니다. 그의 자신감은 입학 얼마 후 있은 학교 체육경기에서부터 시작 되였습니다. 학교에는 가장 빠르기로 이름난 일명 '치타' (표범)를 송군이 학급의 명의를 걸고 운동장 8바퀴 만에 제친 것입니다. 그 후에도 축구부에 들어가 다른 학교와의 축구시합에 참여하게 되고 많은 친구들과 어울리며 성공적으로 정착하게 된 것입니다.


어머니는 그의 진로에 대하여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아들이 가장 하고 싶은 일과 자신 있다고 생각 되는 게 무엇이니?"
어려서부터 미술을 좋아했던 그는 건축설계를 선택하게 됩니다.


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송군은 건축업의 최고를 일컫는 성균관대학의 건축학과에 시험을 보았지만 성적미달로 재수를 준비하고 있던 중 고등학교 담임선생님의 추천으로 강남의 한 건축사무소에 취직을 하게 됩니다. 현장에서 일하면서 송군은 짬 시간을 이용하여 독학으로 여러 개의 국가 자격증도 취득하였습니다.


송군이 현장에서 대학 졸업 건축기사들과 어깨를 겨룬 지 벌써 2년이 흘렀습니다.
그간 송군이 일하는 건축설계사무소를 거쳐 간 실직자들만 십여 명이 넘는 것은 강남의 건축설계 업계가 치열하다는 반증입니다.


20대 초반의 송군은 자신의 손끝에서 태어 난 서울 중심의 유명호텔과 재개발 건축물, 신도시들을 볼 때면 고향의 아름다운 풍경화를 감상하는 기분이라고 합니다.
탈북 전의  비 새는 오두막, 스러져가듯 기울어졌던 자신의 집을 기억하며 송군은 오늘도 머지않아 돌아갈 고향에 세계 최고의 건축물들을 세우고 있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어떤 폭풍에도 거목으로 서있습니다. 남산의 푸른 소나무처럼.


탈북민들의 성공 정착담은 계속됩니다.


다음호에 이음


2014.3.8 김정금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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