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친자식이기를 - 김성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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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脫北者란 김정일 독재체제가 싫어서 북한을 탈출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철책 선을 넘거나 중국, 러시아 등 제3국을 통해 남한으로의 입국에 성공하면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름하여 북한 이탈주민이다. 탈북자 연평균 1천여명으로 다른 이름을 떠올리는 사람들도 있다. 한때 대한민국이 저들에게 선물했던 이름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이것도 저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서 스스로 만들어낸 칭호에 안주하는 사람들도 있다. 월남 귀순자, 귀순용사, 귀순 북한동포, 북한 이탈주민, 탈북脫北동포, 자유북한인 등이다. 이름만으로도 워낙 문제가 많아서 ‘자유이주민’이라는 새로운 법정 호칭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도 들려온다. 어쨌거나 그렇게 대한민국으로 입성한 탈북자 수가 4000여명에 육박하고 있다. 90년도 초반만도 한해 평균 열 명도 안되던 사람들이 후반기에는 50여명 수준으로 늘어났고, 2002년에는 1200여명, 올해에 들어와서는 8월말현재 800명 선상으로 훌쩍 뛰어오르고 있는 형국이다. 숫자 놀이를 하자면 더욱 버거운 쪽이 있다. 현재 북한을 탈출하여 중국을 방황하는 탈북자들의 숫자인바 5만명으로 추정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10만, 20만, 30만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광속도로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는 현대 지성과 과학의 힘으로도 계산되지 않는 중국내 탈북자들의 수는 문명과 철저히 격리되어 있는 그들의 처지를 반증해준다. 타산적, 이기적, 미온적인 탈북자 취급 일년 전, 국회의원들이 국내거주 탈북자들을 초청하여 이러한 탈북자 문제의 해결을 위한 또 한차례의 공청회를 진행했다. 2년 전에는 탈북난민유엔청원운동본부라는 곳에서 중국내 탈북자들에게 난민 지위를 부여해야 한다는 1000만인의 서명을 받아 미 행정부와 유엔 고등난민판무관실을 찾아갔던 일도 있다. 또 다른 쪽에서는 수년 전, 열 아홉 명의 탈북자들이 이 나라의 최고 정보기관을 상대로 가공할 인권침해의 사례를 들어가며 소송을 제기했는가 하면 북한인권 시민연합, 탈북난민보호운동본부, 좋은 벗들, 탈북자동지회, 숭의동지회 등 유명 무명의 탈북자 관련 단체들이 문제 해결을 위한 나름대로의 세미나며, 대책 토론들에 열중하고 있다. 얼마 전, 북한 판 보트피플을 계획했던 수십 명의 탈북자들이 북으로 강제송환 되었다는 모 통신사의 기사가 소개됐고 한국의 외교통상부 측은 ‘지난 1월 중국 산둥山東성 옌타이煙臺항에서 보트를 이용, 한국과 일본으로 밀항하려다 체포된 탈북자 58명 전원이 북송됐다’는 위 통신사의 보도를 부인하면서 중국 측으로부터 이들이 ‘아직 북한으로 돌려보내지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다’고 밝혔다. 몇몇 개인들의 사례까지 나열하면 문제의 제기는 더욱 난해해진다. 북한을 탈출한 후 남한에 정착했던 한 탈북자가 ‘남한 생활에 환멸을’ 느끼고 북한으로 다시 들어가 ‘썩어빠진 남조선 사회의 부조리’에 관한 순회 강연을 한다는 이야기가 왕왕 전해지고 있으며 북한의 량강도兩江道 혜산惠山이 고향인 국내정착 탈북자 신씨 외 한 명이 중국 출장 중 북한접경지역에서 사라져 버렸다는 후문이다. 중국 내 탈북자들을 돕다가 북한으로 끌려갔다는 선교사가 있는가 하면, 같은 운명을 맞은 남한의 사업가도 있단다. 이러한 문제들은 명쾌한 해명이 없는 관계로 복잡하게 느껴지고, 이른바 새로운 남북관계의 특수성에 가려져,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허탈케 했다. 따지고 보면 너무도 타산적이고 이기적인, 미온적이고 자연발생적인 배타적排他的 대상으로서의 탈북자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죽자고 접어드니 마음이 편했다 필자처럼 이미 한국으로의 귀순에 성공한 사람이 있다. 중국을 비롯한 제3국에서 지금도 삶과 자유를 찾아 떠도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중국 공안에 체포되어 북으로 송환된 사람들도 있다. 그렇게 강제로 송환된 탈북자들이 맨 처음 끌려가는 곳은 국경지역의 국가 보위부 소속 군 보위부이다. 그곳 보위부 지도원들은 언제 어디서 무슨 목적을 가지고 두만강을 건넜는가를 묻기 전에 어디서 무슨 일을 하다가 넘어갔는가를 우선 시 한다. 그들의 논리 대로면 탈북 전에 무엇을 했는가에 따라서 정치범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구분이 가능하다. 국경지역에서 농사나 짓던 사람이 중국으로 넘어갔다가 잡혀왔다면 그 사람은 식량을 구하려 넘어갔던 사람이며, 내륙 쪽에서 간부나 군인으로 있던 사람이 넘어갔었다면 무조건 남조선으로의 월남을 목적으로 한 정치범이라는 식이다. 식량을 구하려 갔었다는 사람일지라도 몇 차례의 뭇매질을 이기지 못하여 남조선 사람이라도 만났었다고 하는 날에는 곧바로 정치범으로 낙인찍히는 경우가 있다. 기준에 따라 단순 월경자로 판단되면 3개월에서부터 7년 간의 노동교화나 옥살이가 고작이지만, 정치범으로 판결을 받으면 그토록 사람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정치범 수용소로 직행하거나 재판 없는 사형에 처하게 된다. 단순하고 무식한 수사방식인 것 같으면서도 너무나 발뺌할 곳 없는 수사 방식임을 부인하지 못한다. 탈북과 체포, 강제송환과 2차 탈북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필자도 끝내 자기의 모든 것을 털어놓고야 말았었다. 그렇게 털어놓고 갈 데까지 가는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는 이야기다. 그것은 어서 빨리 나를 죽여달라는 애원과도 같은 것이었고 정치범인 너의 정체를 밝혀냄으로 또 한번의 충성심을 발휘하고야 말겠다는 맹목적 아첨꾼들과의 묵시적 타협 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중국 공안에게 체포되던 때부터 명치끝에 매 달려있던 온갖 불안에서부터의 해방이기도 했다. 죽자고 접어드니 마음이 편했고, 정신적 죽음을 맞이한 그 순간부터 모든 아픔이 나를 비껴갔다. 그렇게 끌려가서 죽거나 살아서는 다시 나오지 못한다는 정치범 수용소로 가는 사람들의 수가 얼마인지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나는 다시 한번 삶을 살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나처럼 죽음으로의 호송 도중에 우연히 기회를 틈타거나 아니면 또 한번의 죽음을 각오하고 탈출에 성공한 사람들이 퍽이나 된다는 사실은 너무도 잘 알려져 있다. 멀고 험한길 ‘알아서 오라’는 대한민국 같은 운명에 처해 있다가 달리는 열차에서 수갑을 차고 뛰어 내린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노동 교화소의 살인적인 감시를 뚫고 자유를 향하여 결사의 고비를 넘긴 사람도 있다. 최근 북한의 감옥들에서 매질과 영양실조로 인하여 죽기 직전에 이른 사람들을 병 보석시킨다는 소문도 있다. 그렇게 절반은 죽어서 나온 사람들이 목숨보다 귀한 자유를 찾아 또 다시 중국으로 탈출한다. 그래서 제2의 조국인 대한민국을 향하여, 대한민국의 대사관과 영사관을 향하여 탈북자들은 달려간다. 나를 살려달라고, 나를 남조선에 보내달라고 피가 터지게 하소연하는 탈북자들에게 문제가 있다면 어떤 문제가 있을까. 국제법상 난민으로 규정할 수 없는 단순 식량구입차원의 탈북자들도 있음으로 중국내 탈북자들에 문제가 있다는 사람들, 마치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정치적 이유의 탈북자들에게는 특단의 대책이 이미 만들어져 있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대한민국을 조국이라고, 자유의 땅이라고 오매불망 갈망하는 중국내 탈북자들에게 대한민국정부는 그처럼 멀고 험한 남한으로의 길을 알아서 오라는 이야기밖에 한 적이 없다. 정부는 이제라도 특단의 조치를 이러한 국가적 형태의 배신을 중국주재 한국 대사관에서 경험한바 있는 나에게 목격자들은 통일-독일의 사례를 들려준다. 그들의 증언대로라면 동서독 통일의 단초를 제공한 사건은 동독인들의 탈출이다. 구 소련을 중심으로 전개된 개혁과 개방의 물결 속에서 강행된 동독인들의 탈출은 보다 나은 삶과 자유 공간으로의 목숨 건 이동으로 평가된다. 당시 정치범을 매개로 동독 정부가 주문한 금전 거래에 서독이 응함으로써 3만2천 여명의 주민들을 이주시켜 버렸다는 서독정부의 관용은 자국민에 대한 국가적 배려로 우리 곁에 다가온다. 범유럽 유니온이 주최한 행사에 참가하였다가 오스트리아로 탈출했던 600여명의 동독 청년들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서독 정부가 추진한 절대의 노력들은 오늘날 탈북자들을 대하는 한국정부의 미온적 입장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이다. 중국내 탈북자 문제는 통일에 대비한 국가와 국민의 준비정도에 비례하여 보다 세밀하고 완벽하게 추진해야 할 사항임에 분명하다. 또한 탈북자 문제는 인간의 생명과 자유라고 하는 보편적 가치와 밀접한 연관 속에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자식이 죽어 가는데 죽이는 자의 눈치를 보면서 구경만 하는 아버지는 이미 아버지가 아니다. 더는 내어줄 것이 없어 정조마저 팔아야하는 딸자식들의 운명 앞에서 강한 자의 눈치나 보는 어머니는 벌써 엄마이기를 그만둔 사람이다. 오늘날 중국 전역에 흩어져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는 탈북자들, 오직 인간다운 삶을 찾아야 한다는 희망만을 부여잡고 강제송환의 두려움에 떨고있는 탈북자들을 향하여 대한민국 정부는 이제라도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나의 경우, 1999년 2월부터 7월까지 대성공사라는 곳에서 국가 정보 기관으로부터의 조사를 받았다. 그리고 그 해 8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동대문 경찰서 보안과 직원의 특별보호를 받은바 있다. 귀순자라면 누구나 같은 수순을 밟고 있는 그러한 과정에 인권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감시 받는 자의 괴로움을 하소연하는 사람도 있다. 북한군 대위로 남한에 총부리를 겨누었던 나의 과거는 스스로 조사에 성실하게 임할 수밖에 없게 하였고, 경찰서의 특별보호 역시 감지덕지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보다 자유로웠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말하고자 하는 자유란 탈북자라는 이미지로부터의 독립이다. 그것은 내부적 요인과 외부적 요인의 복합적 작용으로 인하여 오늘까지도 우리를 괴롭히고 있으며 미래를 불분명하게 한다. 허황된 꿈마저 사라지는 서러움 나도 성공했다고 말하는 다른 탈북자들처럼 냉면 집 사장이고 싶다면 사람들은 웃는다. 그저, 웃고 싶어 웃는단다. 그러는 사람들에게 성공한 사람들의 사례를 들려주면 조금은 멋쩍어한다. 그때, 그러니까 탈북자들에 대한 국민적 배려와 관심이 모아졌을 때 냉면 집을 했던 사람들은 대체로 성공했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때, 이름하여 정착금이라고 하는 것도 지금보다는 높이 책정되어 있었고 은행으로부터의 현금대출도 허락되어 있었단다. 하지만 남북 관계가 개선된다는 마당에 탈북자들을 대하는 국민의 감정은 싸늘해지고, 정부의 배려도 현격히 줄어들었다. ‘이 나라를 위하여 벽돌 한 장 쌓은 적이 없는 너희들이 무슨 자격으로 손을 내미는가’고 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억 단위의 보상금에서 800만원과 3700만원의 정착금으로 오르락내리락 하는 법제정의 잦대변화는 가뜩이나 당혹스러워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첫 걸음을 방황하게 한다. 더욱이 요즘처럼 노동자, 농민계층의 탈북자들이 늘어날 경우에 더욱 그렇다. 고독하고 사람그리울때 주변에 아무도 없어 고위직에 있었거나 군관이었던 사람들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대우가 주어지는 반면 이들, 평범한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상대적인 괴리감뿐이다. 요즘 들어 탈북자들 속에서는 주변 여건을 깨닫는 순서가 사장의 꿈을 접는 순서라는 이야기가 돌고 있다. 때문에 우리는 꿈이 허황해서가 아니라 꿈마저 사라지는데 대한 서러움에 입술을 깨어 문다. 여기에 고향 떠난 자들의 자책과 서러움마저 가슴을 아프게 한다. 고향후배의 결혼식에 다녀온 적이 있는데, 그렇게 북적이던 교회사람들과 동네사람들이 식이 끝나자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렇게 철저히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빠져나가 버린 공간 속에서 두려움마저 느끼는 신혼부부를 뭐라고 달랠 말이 없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관심과 애정을 기울여 준다는 탈북자들이건만 막상 고독할 땐, 사람이 그리울 땐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이야기다. 서울에 오니까 양자 삼겠다는 사람은 많은데 사위 삼겠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고향선배의 이야기엔 가공할만한 진실이 담겨져 있었다. 탈북자들의 직업문제도 언급하고 싶다. 국가적 배려가 있다가 없어진 이유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것이 남과 북 대결구도 속에서만 존재하는 체제경쟁의 도구거나, 이용가치에 따른 결과물이라면 할말이 없지만 탈북자들의 수가 많아져서라면 정말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5천명도 안 되는 탈북자들을 껴안아주지 못할 만큼 정서적으로 가난한 대한민국이라면 작금의 통일논의는 백해 무익한 것이 아니란 말인가. 일자리를 마련하여 주는 것은 오로지 이 나라를 믿고, 믿으며 살고있는 탈북자들에게 국가가 주는 최선의 선물일 것이다. 그러한 선물을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기대했던 그만큼의 배신감에 억울해 하고, 그로 인한 상실의 아픔을 늘 가슴 한구석에 얹어두고 있다. 이러한 탈북자 문제가 사회의 또 하나의 불안요소로 작용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는가. 배려와 관심과 사랑을 구한다 직업의 전문성 분야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법적으로는 북한에서의 자격증과 졸업증이 인정된다고 하면서도 교사, 의사, 자동차 면허시험마저도 다시 보아야 활용이 가능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시비를 거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법과 제정논리가 각각인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북한의 과학, 건축과 농업, 사회의 각 분야에 그토록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수많은 연구소들과 연구기관들에 다름 아닌 그 분야에서 종사하던 탈북자들이 자리잡지 못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이른바 3D업종과 같은 일자리는 수도 없이 많다는 식의 이야기가 나올 수순이라 생각하면서 고국을 방문했던 베를린 한인 회장의 이야기를 전하려 한다. ‘그들은 (탈북자) 우리에게 부담이 아니라 새로운 활력으로 기능할 수 있다. 이는 국가적 대책을 세우기에 달렸다. 탈북이민문제는 향후 한국의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담당 경찰관들이나 지역 유지, 주변 목사님들의 소개로 겨우 직업을 가졌던 사람들도 몇 달을 못 넘겨 다시 나오는 사례는 너무도 비일비재하다. 한결같이 하는 소리가 견디지 못하겠다는 소리다. 무엇을 견디지 못하는가.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다. 회사의 분위기를 견뎌내지 못하며 노동강도를 이겨내지 못한다. 동료들과도 어울리기를 꺼려하는가 하면 상사들과는 말도 붙이기 어렵단다. 경쟁력에서 상대가 안됨은 물론이다. 이처럼 탈북자들은 남들이 흔히 말하는 대로 일할 줄 모르고 교제 성이 없으며 사람을 어려워하고 남들처럼 현실에 쉽게 적응되지 못한다. 한마디로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이야기이다. 문화, 과념의 차이- 참으로 어려워 그 다른 세상은 못 먹고 못 입던 가난뱅이의 세상일뿐만 아니라, 인간의 온갖 정서가 잘못 수료된 지옥같은 세상이다. 또 다른 말로 우리는 없어서 불행했다기보다 인간적으로 자라지 못한 것에 더 큰 괴로움을 느끼는 사람들이며 바로 그래서 배려와, 관심과, 사랑을 구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나의 경우에 철문-하면 감옥이 떠오른다. 그런데 남한에 와서 보니 집집의 출입문들이 철제로 되어있다. 철제로 된 대문과 살창, 경보신호 장치까지 틈을 보이지 않는다. 철제가 많아서라는 생각보다 나를 건드리지 말고 함부로 들어오지 말라는 신호처럼 느껴진다.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도 옆집 한번 구경하기가 참으로 힘들다. 옆집에서 살인이 나도, 내 일이 아니면 그만 이라는 아파트 사람들의 각박한 인심은 너무도 자주 나를 실망케 한다. 탈북자 동지회 사이트나, NK조선 홈페이지의 탈북자 대화방에서 심심치 않게 읽을 수 있는 일부 사람들의 편견 또한 한계 이상으로 치닫고 있음을 자주 목격한다. 그러한 문화와, 생각과 관념의 차이를 넘어선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남들은 쉽게 넘어서는 문, 다른 사람들 같으면 쉽게 넘겨버릴 이야기도 탈북湄湧?잘 새겨 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환경에 대한 순응이 제2의 천성을 낳게 한다고 했던가. 일부 탈북자들은 집 문을 닫아 버릴 뿐 아니라 마음의 빗장에도 대못 쾅쾅 박아버린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것은 사회와 ‘나’ 사이의 현대판 괴리이다. 좀더 솔직히 말하고 싶다. 나와 내 주변친구들의 주장 같으면 사람은 살아서 사는 것이 아니다. 돈도 좋고 재산도 좋지만 보다 필요로 하는 것은 사회를 살아갈 수 있는 명분과 나를 위한 사회의 필요성이다. 더부살이로 얹혀 사는 것, 사회가 나를 필요치 않아 하는데 먹기 위하여 억지로 살아가는 듯한 기분, 그 때문에 북에서 왔으면서도 북에서 왔다는 사실을 숨기려 드는 친구들의 억지도 종종 목격하고 있다. 겨우 얻었다 싶던 일자리도 탈북자라는 신분이 밝혀지면 잃어버리는 수가 있다. 특수한 몇 사람이 홍보용으로 필요했던 시기를 아득히 벗어난 지금 도대체 탈북자들의 의미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대한민국의 친자식이기를 감성적 주장들을 넘어서 우리들, 탈북자들의 이름으로 논하고 싶은 문제가 있다. 한국의 통일부는 현재 탈북자들을 위한 사회적 제도와 장치가 치밀하게 준비되어 있다고 보고 있는가. 대한민국 정부는 문명과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살다온 탈북자들이 남한사람들과 동등하게 경쟁해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정녕 믿고있는가. 남한사회의 성공적 정착을 위하여 취업특혜, 이른바 탈북자 취업의 법제화를 마련해줄 의사는 없는가. 또한 탈북자 본인의 의사와 각오를 믿고 실시되던 은행대출 및 있다가 없어진 법적 배려들을 원상 복귀할 의사는 없는지 묻고 싶고 초기 주거지의 자율적 선택과 추후 해외여행의 자유 등 국가적 관심이 제약으로 느껴지는 일부 정책적 문제들을 명쾌하게 해결할 의사는 없는가를 묻고싶다. 이제 글을 마무리하면서 우리가 어머니로 믿고 있는 대한민국 정부가 중국내 탈북자들까지를 포함한 우리를 자기의 친자식처럼 생각하고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서 자식이기를 떠드는 나는 참으로 부모에게 성실했던 인간이었는지도 아프게 반성해 본다. 2003년 김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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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도 당신같은분이 기수가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건강하시고
그렇게 싫으면 이나라를 떠나면 되지..이건뭐 해줘도해줘도 끝없이 요구만하니...쯧쯧..그런마음 먹고 있는 당신의 미래도 뻔하오 그런게 억울하면 좀일찍오던가..
그리고오라이님.당신의정체는도대체뭐죠?
오라이,아이디부터역겹다.북한의김정일스파이가아니라면이사이트에들어와서얌전하게보다가조용히물러나가는게좋을듯하니그리아시고온전한처리해주세요.당신이우리탈북자들이마음고생할때얼마만큼한보탬을줬는데감히허튼소리하고있어요?조용히입다물고김성민국장님의정의의소리에귀기울이길바랍니다.탈북자여러분화이팅!!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