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사망통지 조회 - 장인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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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는 아들딸들이 고등중학교만 졸업을 하면 "영예로운 조국보위초소"에 내보내는 것이 그 누구도 회피할 수 없는 공민 적 의무로 되고 있습니다. 80년대 이전에는 모든 부모들이 자식들을 군대에 내보낼 때 그 자식이 을 수호하고 당을 보위하기 위한 군사복무를 잘하고 영웅이 되어 돌아오기를 바랬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근본적으로 달라졌습니다. "제발 영양실조에 걸리지 말고 살아서 돌아오기만 해라." 이것이 오늘 고이 키운 자식들을 군대에 보내면서 그 어머니들이 눈물 속에 기원하는 바입니다. 긍지와 자부심을 안고 아들들을 조국에 바치던 북한의 어머니들이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는가. 이에 해답을 줄 수 있는 실화를 아래에 싣습니다. 1997년 7월 어느 날, 함경북도 온성군 온성 탄광 노동자구에서는 온 마을을 슬픔에 잠기게 하는 기막힌 일이 벌어졌습니다. 온성군 농기계작업소 계획지도원 남희일의 집에 군대복무 중이던 외아들의 사망소식이 날아든 것입니다. 남희일의 외아들 남명일 이라면 임물 체격이 좋고 말이 없고 순진하여 어릴 때부터 동네 어른들의 칭찬을 도맡아 듣던 아이였습니다. 또 학교에 다닐 때에는 공부도 남달리 잘하여 온성군 적으로 소문이 자자하였습니다. 그 아들이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게 되자 노동당에 특별히 충실한 남희일내외는 "남자는 군대에 나갔다와야 사람구실을 할 수 있다."면서 제일 먼저 등을 떠밀어 군대에 보냈습니다. 아들을 군대에 보낸 뒤 나라의 식량사정은 해가 다르게 어려워지어 온성군에서만도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아 갔습니다. 이런 속에서 남희일내외는 어느 하루도 아들에 대한 걱정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더욱이 이들의 마음을 조인 것은 아들 명일이와 함께 군대에 나갔던 같은 동네의 다른 집 애들이 속속 영양실조에 걸려 거의 송장이 되어 집으로 돌아오고 있는 사실이었습니다. 게다가 식량난으로 인한 온성군 주둔 인민군 구분대 군인들의 날로 극성해지는 도적질과 강도질은 가득이나 걱정이 태산같은 남희일내외를 안절부절못하게 했습니다. 《우리 명일이가 영양실조에 걸리거나, 강도가 되어 돌아오면 어떻게 하겠소...》 앉으나 서나 이러한 근심이 마음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그런데 부모들의 걱정이 현실로 될 줄이야... 아들은 입대한지 2년만에 무서운 영양실조에 걸리어 담가에 실린 채 집 문턱을 넘어섰습니다. 복스럽던 얼굴이 해골모양이 되어 어머니를 올리다보며 애처롭게 웃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남희일내외는 너무나 억이 차서 가슴이 터질 지경이었습니다. 이어 정신을 간신히 차린 그들은 아들을 호송해온 군관에게 수 십번이나 허리를 굽혀 고맙다는 인사를 하였습니다. 거의 다 죽게 된 아들을 살리려고 집에 데려다 주어서 정말 고맙다고... 하늘같은 자식을 그 지경으로 만든 놈들을 증오할 대신 , 고 허리 굽혀 절하고 또 절하는 소박한 이들 부부... 수 십년을 속아 살아오면서도 속고 있는 줄을 모르고, 억눌려 살아오면서도 느끼지 못하는 몽매와 굴종의 극치였습니다. 남희일부부는 거의 6개월 동안이나 온갖 정성을 쏟아부어 아들을 회복시켰습니다. 그리고 다시 부대로 떠나보냈습니다. 원래 명일이가 군복무를 하고있는 부대는 전연구분대로서 다른 부대들에 비하면 후방보장조건이 양호한 편이었습니다. 그러나 1995년경부터 형편은 달라졌습니다. 나라의 극심한 식량난은 이 전연구분대에도 들이 닥치어 처음에는 군인들에게 하루 한끼 멀건 잡곡죽을 공급하더니 점차 하루 세끼를 소금 국에 삶은 강냉이알 20∼30알씩 공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런 속에서도 부대는 계속 강도 높은 훈련과 공사에 내몰리었습니다. 하여 군인들은 무더기로 영양실조에 걸리어 쓰러졌습니다. 명일이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명일이는 몸을 회복하고 부대로 돌아가자마자 또 공사판에 내몰렸습니다. 1997년 2월 부대는 《경애하는 최고사령관 김정일장군님의 탄생 55돐을 높은 정치적 열의와 빛나는 노력적 성과로 맞이하자》라는 구호 밑에 중요대상건설에 보낼 목재벌목에 들어갔습니다. 군인들은 이른 새벽 아침식사로 멀건 죽을 한 공기씩 들이키고는 높고 깊은 산판에 올라 나무를 찍기 시작하였습니다. 허리를 치게 눈이 내려 작업능률이 오르지 않는데다가 무조건 하루 정량을 수행해야 돌아갈 수 있다는 부대장의 명령에 군인들은 주변을 돌아볼 새도 없이 나무베기에 전념하였습니다. 밤이 깊어 달이 중천에 뜬 다음에야 산판에서 철수한 부대는 병실에 돌아와서야 명일이가 없어진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부대는 연 3일 동안이나 눈속을 헤맨 끝에 어느 이름 없는 골짜기에 피투성이가 되어 꽁꽁 언 채 쓰러진 명일이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허기진 배를 꼬부리고 눈도 감지 못하고 죽은 그의 시신을 보면서 동료군인들은 눈물을 흘리었습니다. 그런데 일은 이때부터 일어났습니다. 부대에서 명일이의 사망소식을 그의 부모들에게 알리려고 하자 상부에서 불호령이 떨어졌습니다. 우의 정치부에서 내려온 지시인즉 우선은 《명일동무는 장군님의 전사답게 자폭정신으로 싸우다가 영예롭게 죽었다.》라고 평가한 뒤 《올해가 어떤 해인가?! 위대한 수령님께서 서거하신 지 3년이 되는 해이다. 장군님께서도 슬픔을 강인하게 견디시는데 목숨을 초개와 같이 바쳐야 하는 일개 전사의 죽음을 그의 고향에 알리어 부모들이 울고불고해서 장군님께 심려를 끼쳐드리면 되겠는가! 절대로 이 사실을 부모들에게 알려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군인들은 애젊은 나이에 애처롭게 굶어죽은 명일이의 시신을 그의 부모들에게조차 알리지 못하고 부대주변의 이름 없는 야산에 안장했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에는 비밀이 없는가 봅니다. 명일이의 애통한 죽음은 아주 우연한 기회에 그와 한마을에서 군대에 입대하여 린접 부대에서 복무하던 군인에 의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역시 영양실조에 걸려서 병 치료 차로 집에 온 그 군인은 명일이의 부대에서 그의 죽음을 집에 통지하지 않은 것을 모르고 문안 온 명일의 어머니를 붙들고 《아들이 죽어서 얼마나 괴로우셨습니까》라고 위로의 인사를 하였던 것입니다. 한동안 그 뜻을 가늠하지 못했던 명일의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졸도를 하였습니다. 명일의 죽음은 옹근 6달 즉 김일성의 3년 상을 전 국가적으로 치룬 다음에야 그것도 공식적으로가 아니라 한 동네출신의 군인에 의해 그 부모들에게 알려지었습니다. 사망통지서 역시 그후에야 도착하였습니다. 아들을 잃은 원한은 하늘에 사무쳤으나 수령 앞에서는 모든 것이 초개와 같은 북한 사회에서 남희일내외는 그 억울함을 어디에 가서 하소연 할 데도 없었습니다. 그후 아들의 묘지를 찾아간 남희일내외에게 아들이 복무하던 부대 정치일군이 했다는 말을 들어봅시다. 《영광으로 생각하십시오. 우리는 경애하는 최고사령관 김정일장군님의 전사들입니다. 최고사령관의 전사는 죽지 않습니다. 영생합니다!》 예로부터 《자식은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했습니다. 그토록 귀한 자식을 잃은 부모들에게 위로의 말을 해줄 대신 보통사람은 평생 한번 보지도 못하는 생뚱같은 김정일을 위해 죽은 아들을 한다고 그 부모들을 우롱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원통한 일입니까. 그러나 아들을 잃은 원한이 아무리 사무쳐도 하소연할 수조차 없는 곳이 북한 사회입니다. 이것은 비단 남희일 일가만이 겪고 있는 비극이 아닙니다. 북한 조선인민군 전체 군인들이 겪고 있는 기막힌 참상이며 자식들을 군대에 바친 전체 북한 주민들이 당하고 있는 하늘땅에 사무친 억울함입니다. 김정일 독재집단은 북한의 수백만 청년들을 군대에 강제로 끌어내다가 하루와 같이 김정일을 위한 이 되고 까지 해야 한다고 강요하고 있으며 그들을 제대로 먹이지도 않고 중세기의 노예들도 무색해하는 전쟁준비를 위한 중노동과 훈련에 내몰고 있습니다. 김정일은 북한 청년군인들의 인권을 철저히 유린하고 있는 이 하나의 죄만으로도 인민의 준엄한 심판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 진달래회(탈북여성모임)회장 장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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