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간의 생이별 (하) - 김원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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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의 도움으로 내가 남몰래 세우고 있던 탈출계획은 중국 배를 사서 해로로 한국으로 향한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선장을 구하는 일이었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그 사람도 우리와 함께 탈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북조선에서 그런 사람을 구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돈을 듬뿍 준다고 하면 선장으로 나설 사람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함께 탈출할 것인가 하는 것을 알아본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자칫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북조선과 같은 밀고사회에서 수용소행이 될 게 틀림없는 말을 함부로 말할 수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 방법이 최선의 선택인 것 같아서 나는 적당한 인물을 물색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인 선장을 고용해서 한국으로 가는 방법도 검토해 볼만하다고 생각했다. 중국에서 배를 산 다음 북조선으로 가서 가족들을 배에 싣고 한국으로 향한다. 인적이 없는 곳에서 우리들을 하선시키고 나서 그 길로 중국으로 돌아간다면 어떨까. 배는 우리를 실어다준 대가로 주어버리기로 하고 말이다. 이런 조건이라면 응할 중국인이 있을 것 같았다. 이 방법에는 이런 이점도 있다. 항해 도중에 북조선 경비정에게 검문 당해도 중국 배로 위장할 수 있는 것이다. 안선국 선장 어쨌든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해 보기로 결심했다. 우리와 함께 북조선을 탈출할 만한 선장 또는 항해사를 물색해 보기로 한 것이다. 그때 머리에 떠오른 사람 하나가 있었다. 이름이 안선국이라고 하는 선장인데, 내 친구의 처남이었다. 10년 가까이 알고 지내기는 했지만, 깊이 사귄 일은 없었다. 거리에서 만나면 몇 마디 얘기를 나누는 정도의 사귐이었다. 나이는 나보다도 적어서 45, 6세 정도였다. 나는 먼저 내 친구와 술자리를 함께 하고 그에 관한 정보를 모았다. 그 결과로 그는 북조선 사회에서는 좋은 성분 출신이고 좋은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당원이고 제대군인이며 그의 가족 중에 6·25 전쟁 때 전사한 사람도 있었다. 월남자 가족이요 지주계급 출신이며 친미분자라는 나쁜 조건 세 가지나 겹친 나와는 매우 대조적인 사람이었다. 북조선탈출과 같은 일을 꿈에도 생각해보지 않을 사람같았다. 하지만, 최근에는 배급이 지연되면서 아이 셋과 노모를 먹여 살리는 일이 여간 힘들지 않다는 얘기를 내 친구에게서 들었다. 나는 이 점을 물고 늘어지기로 마음먹었다. 처음부터 의심을 받게 되면 안 될 것 같아서 길에서 우연히 만나 기회를 이용해서 그에게 접근했다. 『오랫동안 못뵈었군요. 일전에 댁의 매제를 만났습니다.』 『아 그래요. 한동안 못뵈었는데 건강하시던가요?』 『네 건강하더군요. 그런데 좀 야윈 것 같았어요. 생활이 힘들다고 하더군요.』 『그래요? 살기가 어렵기는 누구나 마찬가지이지요. 저희 집은 양식을 구하는데 정신이 없을 지경이랍니다.』 『당신처럼 토대가 좋은 분들은 잘 지내고 있는 줄로 알고 있었는데요.』 『93년경까지는 괜찮았는데 지금은…….』 하고 안선국씨는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들 같은 사람도 살기가 힘들다니…… 정말 형편이 나빠지기만 하는군요.』 『벌이가 될 만한 게 없습니까?』 외화획득 지도원이니 그런 것을 알지 않을까 해서 안선국씨는 내게 물었다. 그래서 나는 어디엘 가면 누에고치 값이 싸고, 어디서 나는 약초를 어디로 가져가면 중국산 보리와 바꿀 수 있다는 등의 얘기를 조금씩 해주면서 서서히 본론으로 들어갔다. 『확실히 돈을 벌 수 있는 일은 없을까요?』 『지금 형편으로는 신통한 게 없어요. 누구나 장사에 나서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무거운 짐을 지고 다녀도 별로 이문이 남지 않아요.』 『그건 그렇지만…… 신통한 벌이가 어디 없을까요?』 안선국씨는 한숨을 내쉬면서 물었다. 『별의별 일을 해보았지만 신통한 게 없어요. 무어가 있을 것 같은데…… 배를 이용하면 어떨까?』 『배라고요?』 『배를 이용하면 큰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은데…… 배를 구하기도 쉽지 않고 또 선장 노릇을 할 사람도 없고…….』 내가 이렇게 말하자 안 씨는 내 눈치를 살피는 것 같았다. 『나는 오래 전에 배를 조종한 일이 있어요. 무슨 일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아 그랬던가요. 그러고 보니 당신의 매제에게서 들은 것 같군요. 만약에 제가 배를 구할 수 있다면 그때 나를 도와주시겠어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탈출 청사진 나는 안씨와의 첫 접촉에서는 더 이상 구체적인 말은 하지 않고 감(感)만 잡은 다음 헤어졌다. 얘기를 해볼 여지가 있는 게 분명했지만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안씨와 합의를 보기 전에 내가 해야 할 일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장남과 차남에게 미리 탈출계획을 밝혀 준 다음 그들의 찬동을 얻는 일이었다. 또 하나는 미국에 사는 아우에게 탈출 의사를 전하고 자금 지원을 받는 일이었다. 두 아들에게 내 계획을 미리 밝히려는 것은 그들도 이제 어른이 돼 사리판단을 할 수 있고, 또 속마음을 솔직히 털어놓으면 그들도 이해하고 협력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해가 바뀌자 곧 나는 두 아들을 집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내 말을 잘 들어라. 실은 요즘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단다.』 북조선을 떠날 생각을 하고 있고, 그 방법을 모색중이라는 것을 털어놓았다. 『잘 알겠습니다.』 『저도 함께 떠나겠습니다.』 두 아들은 매우 긴장된 얼굴로, 그러나 선선히 대답해 주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죽으나 사나 함께 떠날 수밖에 없다고 결심한 것 같았다. 그 날 이후로 두 아들은 나의 의논 상대가 돼 탈출계획을 추진하게 됐다. 이 일이 있은 다음 나는 미국에 사는 아우에게 연락을 취했다. 장사하는 동안에 가까워진 단동의 한 조선족 남자가 중개자 역할을 맡아주었다. 그는 장사차 신의주를 자주 찾아왔다. 나는 그에게 우리 사정을 자세하게 설명한 다음 일이 성사되면 후하게 사례한다는 조건으로 아우에게 전화를 걸어줄 것을 부탁했다. 그는 약속을 충실하게 지켜주었다. 『알았다. 최선을 다해 돕겠다.』 하는 대답이 아우에게서 왔다. 아우는 나를 만나기 위해 3월중에 북경에 오기로 했다. 단동에는 북조선 공작원들이 눈을 밝히고 있어서 우리는 북경에서 상봉하기로 한 것이다. 그 무렵 내 머리 속에는 탈출의 청사진이 대체적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배를 타고 신의주를 떠나 단동으로 향한다. 단동에서 조선족 친구를 만나 함께 북경으로 향한다. 아우를 만나 돈을 건네받은 다음 단동으로 돌아와서 배를 구입한다. 그 배를 타고 북조선으로 돌아가서 가족들을 태운 다음 남조선으로 향한다. 이상과 같은 게 대체적인 계획이었다. 북경에 가서 아우를 만나는 일이나 중국에서 배를 사오는 일은 외화획득 지도원이라는 지위를 이용한다면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또 단동에서 북경으로 가는 일도 조선족 친구가 길 안내를 맡기 때문에 언어·지리로 고생할 일이 없었다. 문제는 배를 조종해 줄 인물을 어떻게 구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중국인 선장을 고용할 것인가, 아니면 함께 남조선으로 갈 북조선 사람을 구하느냐가 문제였다. 중국인이라고 하지만 중국에 사는 조선족을 구할 것이기 때문에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었다. 나는 장남에게 의견을 물었다. 이때 나는 북조선 사람을 고를 경우를 대비해서 안선국씨를 이미 점 찍어놓았다는 점도 말해주었다. 그리고 중국인을 고용할 경우 배가 중국산이기 때문에 중국 배로 위장하기 쉽다는 점과 우리 가족을 한국으로 실어다 준 다음 배의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조건이라면 쉽게 희망자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도 말해주었다. 장남의 대답은 명쾌했다. 『북조선 사람을 골라야 합니다. 안선국씨를 설득할 수 있다면 최고이지요. 아무리 조선족이라고 해도 외국인은 믿을 수 없어요. 만약에 한국으로 가지 않고 중국의 어떤 해안에 내려놓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지요? 그 곳이 인적이 드문 곳이라면 물어볼 사람도 없을 게 아닙니까?』 장남이 중국 조선족을 불신하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국경지대에서 탈북자사냥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고 있었다. 강을 건너 중국으로 숨어드는 북조선인의 수가 증가하면서 조선족자치주 공안(경찰)의 단속이 강화되고 있는데, 잡혔을 경우 뇌물을 주면 슬그머니 풀어주고 뇌물을 안 주면 북조선 보위원에게 넘겨버린다는 것이다. 뇌물 금액은 자그마치 2천달러 내지 4천달러라고 한다. 탈북자들이 한동안 숨어 지낼 수 있는 돈을 몸에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고 탈북자사냥에 혈안이 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하셔요?』 『글쎄, 돈으로 고용 당한 사람과 돌아가면 처형당할지도 모르는 사람과는 신용도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다르겠지.』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어떻게 안선국씨를 설득할 수 없을까요?』 『시도해 보자.』 그 날 이후로 나는 안선국씨를 우리 일에 끌어들이는 데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우리 한 번 큰돈을 벌어봅시다』 어느 날 우연히 만난 것처럼 안선국씨에 접근했다. 『일전에 얘기했던 배를 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미국에 사는 아우가 돈을 대주기로 했답니다.』 『아우님이 돈을 대준다고요.』 안선국씨는 흥미있다는듯이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사실은…….』 하고 나는 나즈막한 목소리로 내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3월에 아우가 북경으로 온다는 것, 그때 배를 살 수 있는 돈을 받기로 돼 있다는 것, 돌아가는 길에 배를 산다는 것 등을 말해주었다. 『당신이 함께 가준다면 큰 도움이 되겠소. 배를 북조선으로 가져와야 하니까요. 게다가 큰 돈을 들여서 사는 것이기 때문에 제대로 사야 할 게 아니요. 당신이 배를 보아준다면 안심이 되겠소. 그런 다음에 그 배로 큰돈을 벌어 봅시다.』 『좋은 말씀이오. 하지만 중국에는 어떻게 가지요?』 『그건 염려할 것 없소. 그 쪽에도 아는 사람이 있소.』 외화획득 지도원이라는 지위를 이용하면 안선국씨의 여권과 업무명령서를 어렵지 않게 입수할 수 있다는 것과 중국으로 건너가면 조선족 친구가 길안내를 맡기로 돼 있다는 것 등을 설명해 주었다. 『그렇다면 나도 가보겠소.』 하고 쾌히 승락하는 것이었다. 허 탕 나는 손을 써서 해군 교도대를 통해 안선국씨의 여권과 업무명령서를 교부받았다. 공병국용으로 사들일 보리 3톤 중 1톤을 바치기로 한다는 조건이었다. 3월 17일 두 사람은 선천군 석하리를 떠나는 배를 타고 21일에 중국 단동에 도착, 조선족 친구와 상면했다. 『김선생이 무사히 중국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려 주면 아우님은 즉시 비행기로 오기로 돼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안씨와 함께 그 조선족 친구 집에서 머무르기로 하고 다음날 미국으로 국제전화를 걸었다. 『형님,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내일 비행기편으로 떠나겠습니다.』 아우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뉴욕을 23일에 떠나면 북경에는 24일에 도착하게 된다. 23일 저녁 나와 안씨 그리고 조선족 친구는 북경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내가 처음으로 안씨에게 북조선탈출계획을 털어놓은 것은 중국으로 들어온지 수일이 지난 다음이었다. 안씨의 북조선생활이 이만저만 어려운 게 아니기 때문에 중국인의 풍요로운 생활을 목격하거나 내 아우에게서 한국의 번영에 관한 얘기를 들으면 한국으로 가고싶은 생각이 들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닌게 아니라 중국에 처음 와본 안씨는 상점마다 상품이 그득히 쌓여 있고 차량이 분주하게 오고가는 것을 보고 상당히 놀라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마음을 탐색해 보기로 했다. 『이처럼 물자가 풍부한 중국도 국제사회에서는 가난한 나라에 속한다지요. 연변의 조선족이 서울에 가면 그 발전상을 보고 넋을 잃는다고 하더군요.』 『그렇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우리도 서울에 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 안씨는 아무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이처럼 안씨의 속마음을 떠보고 있는데 뜻하지 않는 일로 탈출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아우를 만나서 얘기를 해보니 나와 탈출방법을 논의할 작정으로 온 것이지, 배를 살 돈을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그 사실을 알고 나는 실망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내가 너무 서두른 것 같았다. 조선족 친구를 사이에 두고 말이 오고갔는데, 아우가 내 계획에 전적으로 찬동한 것처럼 내가 속단해버린 것이다. 나는 내 실수를 깨닫고 아우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우는 배를 이용한 탈출계획을 여러 방법중의 하나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오히려 육로탈출에 비중을 두면서 온 가족이 중국으로 탈출, 한동안 잠복하다가 일시체류자격을 취득한 다음 합법적으로 러시아·홍콩을 경유해서 서울로 가는 게 좋겠다고 주장했다. 조선족 친구에 따르면 일인당 천오백달러 내지 3천달러만 있으면 일시체류자격을 취득할 수 있다고 한다. 항공료까지 포함하면 이만저만 큰돈이 드는 게 아니다. 게다가 일시체류자격을 틀림없이 취득한다는 보장도 없다. 육로 탈출과 배를 이용한 탈출을 비교해볼 때 후자의 위험부담률이 훨씬 적다는 점을 나는 역설했다. 오랜 논의 끝에 아우도 내 의견에 동의했다. 그리고 돈을 준비해서 4월 20일경에 다시 북경으로 오기로 하고 아우는 북경을 떠났다. 나와 안씨 그리고 조선족 친구는 25일에 북경을 떠나 29일에 우리 두 사람은 신의주로 돌아왔다. 안씨는 일이 잘 풀리지 않은 것을 보고 화를 냈다. 그가 화를 내는 것도 당연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큰 기대를 걸고 중국까지 왔는데 배를 살 돈이 준비되지 않고 있었으니 누구인들 화내지 않겠는가. 그러면서도 안씨는 희망적인 반응을 보였다. 『사정이 그렇다니 어쩔 수 없지요. 중국 구경도 했고, 바깥 세상의 얘기도 많이 들었으니 소득이 있었던 셈이오. 내 생각도 많이 바뀌었답니다.』 『고발하면 당신도 무사하지 않을거요』 한달 후(4월 22일) 나와 안씨는 다시 북경으로 갔다. 아우를 만나 돈을 건네 받았다. 도둑맞지 않기 위해 돈을 몸 속에 숨기고 잠자리에 들었다. 북조선탈출이 눈앞에 다가왔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뛰어 쉽게 잠들 수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안씨를 설득하는 일이었다. 안씨도 잠이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몇 번씩 몸을 뒤치락거리고 있었다. 나는 지금이 바로 그를 설득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나는 혼잣말하듯이 중얼거렸다. 『중국에 와보니 북조선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드오. 먹을 것을 찾아 이러저리 헤매는 게 지겹소. 모처럼 배를 손에 넣을 수 있게 됐으니 가족을 데리고 남조선으로 가지 않겠소? 당신네 가족과 내 가족을 모두 합치면 열네 명이오. 곡물 운반선이면 그 정도 인원을 태울 수 있을거요. 배는 내가 사고 당신은 조종만 하면 되오. 외화획득 지도원이라는 내 직책을 이용하면 배를 마음놓고 살 수 있소. 어쨌든, 우리 두 사람이 힘을 합치면 모든 게 가능하오. 그러니 잘 생각해 보시오.』 나는 한동안 대답을 기다렸으나 그는 한숨만 쉴 뿐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솔직하게 털어놓으면 이해하실 줄로 알았는데…….』 하고 나는 그의 대답을 재촉했다. 『그렇게 합시다 하고 대답하고 싶지만…….』 안씨는 딱 부러지게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그가 배신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나는 덜컥 겁이 났다. 아닌게 아니라 안씨는 노동당원이었고, 성분이 좋아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잘 지내던 사람이었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이 머리 속에 떠오르자 나는 그만 화가 났다. 『당국에 고발해도 좋소. 하지만 당신도 결코 무사하지는 못할 것이오.』 그러자 안씨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건 걱정 안하셔도 되오. 나는 당신에게 감사하고 있소. 이런 얘기는 아무한테나 말할 수 있는 건 아니잖소. 그만큼 나를 믿어주기 때문이라는 걸 나도 압니다. 나를 믿어주는 사람을 똑같이 믿는다는 게 내 주의이기도 하오. 그런데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가는 것까지는 좋은데 어머니가 문제요. 어머니는 올해 68세이신데 걷기도 힘들어 하시오. 그런 분을 모시고 간다면 당신들에게 짐이 될 것 같아서…….』 『잘 알겠소. 짐이 되는 것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젖먹이가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을 것이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할머니건 젖먹이건 모두 데리고 갑시다. 육로와는 달리 일단 배에 올라타면 모두 누워 있으면 되지 않소.』 『그렇기는 하지요. 어쨌든 염려해 주어서 고맙소.』 안씨의 말소리는 약간 들뜨고 있었다. 아우와 함께 이틀을 지낸 다음, 우리는 24일에 북경을 떠나 25일에 단동에 도착했다. 단동에서 1주일간 묵으면서 35톤급 배 한 척을 샀다. 그리고 그 배를 타고 신의주의 해군부두에 도착한 것은 5월 3일이었다. 얼마 후 안씨에게서 그의 어머니도 남조선행에 동의했으니 함께 떠나자는 기별이 왔다. 5월 10일 밤 우리 가족 8명과 안씨 가족 6명이 철산 어업기지에 정박하고 있는 배에 승선했다. 그로부터 이틀 후 폭풍우를 만나 배가 깨지고 침몰 직전에 있던 우리 일행은 한국 해군 함정에 의해 구출됐다. (끝) --- 김원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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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인권과 관련해 관심이 생겼는데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김원형님의 글에서 당시의 생생함이 묻어나옵니다.
한국에서는 출신성분이 좋더라도 능력껏 안되면 안좋은것마냥 못하는데...
하지만 저는 출신성분없는 한국을 사랑합니다..
언제쯤 북한이 변화할수 있을까요
오늘도 북한의 굶주린 동포들을 위해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