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간의 생이별 (중) - 김원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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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래가 없는 북조선생활 시베리아생활은 바깥 세상에 대한 나의 눈을 뜨게 했다. 귀국한 다음에도 더 있어보았자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생각이 늘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특히 자식들이 공부를 잘하는 편인데도 성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전쟁 때문에 인민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성년이 됐다. 그래서 군복무를 마치고 나서 야간학교에 들어가 의무교육을 마칠 수 있었다. 그런 관계로 자식들만은 고등교육을 기어코 받게 하고 싶었다. 그러니 자식들의 상급학교 진학이 좌절됐을 때 내가 얼마나 화났겠는가.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그런 생각을 마음 속에 품고 있을 때 뜻밖에도 어머니와 아우가 살 아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이듬해에는 40년만에 두 사람과 만나게 됐던 것이다. 그리고 아우에게서 바깥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 하는 얘기를 듣게 됐으니 또 다시 탈출을 심각하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구체화돼가는 탈출계획 어머니와 아우의 방문은 물질적으로도 나에게 큰 힘이 됐다. 그때 받은 외화의 일부를 뇌물로 써서 1994년 1월 나는 좋은 직장을 얻게 됐다. 인민군 총참모부 공병국 산하 제577부대 외화획득지도원이 바로 그 자리였다. 공병국에는 제25부라는 상거래전문 부서가 있는데 상좌(중령)급이 책임자이다. 그 밑에 신의주, 강계 등 네 곳에 상거래를 벌이는 기지가 있다. 내가 배치 받은 신의주기지는 주로 중국을 상대로 농산물을 팔아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었다. 그 외화는 알미늄, 아연, 납 등 군용으로 쓰이는 물건을 사들이는 데 사용됐다. 원래 이런 일은 출신성분이 나쁜 사람에게는 절대로 맡겨지지 않는 다. 그러나 경제난과 함께 외화획득에 능력이 있는 자는 출신배경과는 상관없이 채용한다는 쪽으로 방침이 바뀌는 바람에 내게 이런 자리가 돌아온 것이다. 내가 이 자리에 매력을 느낀 것은 합법적으로 외항선을 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나는 육로로 중국을 가서 다시 남조선으로 가는 방법을 생각해보았는데, 알고 보니 위험성이 너무나 높은 방법이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1993년 나는 양강도 혜산에서 압록강을 건너 중국 장백현으로 가는 루트를 탐색해 보았다. 두 번에 걸쳐서 현장을 답사하고 과연 온 가족이 무사히 탈출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검토해 본 것이다. 사실대로 말한다면 나는 그 전부터 혼자서 중국 땅으로 들어가 형편을 살펴보아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강폭이 50미터에 불과한 것을 보았을 때 당장에 건너가고 싶었다. 하지만, 이것저것을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위험할 것 같아서 육로 탈출을 포기하기로 결심하고 말았다. 강을 건너가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 그 무렵 식량사정의 악화로 배급이 끊어지고 임금이 체불되는 사태가 각지에서 벌어지는 바람에 강을 건너 중국으로 들어가는 수가 많아지고 있었다. 그와 함께 북한 당국이 몰래 파견한 공작원에 의해 북한으로 잡혀오는 사람도 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잘못하면 우리 식구도 잡혀서 수용소로 갇히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중국 땅에 믿을 만한 사람이 있어서 은신처를 마련해 주지 않는 이상 중국 땅으로 덮어놓고 들어간다는 것은 너무나 위험하다는 게 나의 결론이었다. 해가 바뀌자 양강도, 함경남도, 함경북도 일대의 식량배급이 끊어지면서 더욱 많은 사람이 얼어붙은 압록강을 넘어 중국 땅으로 도피했다. 북한 당국은 서둘러서 도망자 색출을 중국측에 요청했다. 이 요청을 받고 중국 공안당국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탈북자를 체포해 북한으로 송환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 소문을 듣고 나는 다른 탈출로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공병국 외화획득 지도원이라는 자리를 이용하면 배로 남조선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큰아들의 결혼 때마침 큰아들 희근이 장가들게 됐다. 상대는 그 동안 교제해온 서정심이라는 예쁘게 생긴 아가씨였다. 그녀의 부모는 일본태생의 귀국동포였다. 우리 집 역시 일가친척이 미국에 거주하는 집안으로, 출신성분이 좋지 않다는 점에서 똑같았다. 장가든다고 해서 결혼식만 올리면 되는 일이 아니다. 그들이 살 집을 마련해 주고 TV·냉장고 등 세간살이를 장만해 주어야 한다. 이런 일 저런 일로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는데 어느 새 결혼식 날 이 됐다. 결혼식이 무사히 끝나 한숨을 돌리고 있었는데 해산이 가깝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얼마 후 나는 손자를 팔에 안게 됐다. 남수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 해는 며느리도 얻고 손자도 태어난 나에게는 매우 좋은 해였다. 그러나 북조선 사람들에게는 굶주림과 절망이 시작된 「악운의 해」였다. 마침내 평안남도, 평안북도, 황해도에서 식량배급이 끊어졌고, 여름에는 홍수까지 겹쳐서 식량사정은 더욱 나빠졌다. 해가 바뀌어도 호전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고, 「지상의 낙원」이라고 하는 나라에 영양실조에 걸린 아이들과 걸식하는 사람들이 우글거리게 됐다. 식량배급이 끊어지면서 사람들은 연명하기에 바빴다. 하던 일을 팽개치고 모두가 식량조달에 혈안이 됐다. 교사들이 쉬는 바람에 학교수업은 부실해졌다. 나중에는 보위부원, 안전부원도 어려움을 겪게 됐다. 사회 전반의 기능이 서서히 마비되기 시작했다. 약품부족으로 한때 자취를 감춘 전염병이 다시 나돌았고, 어린이들은 집안에 갇혀 지내는 신세가 됐다. 며느리는 시댁 방문 이외에는 남수를 데리고 집안에만 머물렀다. 언제까지나 이러고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나는 손자와 며느리를 포함한 온 식구를 데리고 탈출하기로 결심하고 그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폭정이 기아의 원인 한국으로 온 다음에야 안 일이지만, 북조선 당국은 기아의 원인을 2년간 계속된 천재에 기인한 농작물의 괴멸적 타격에 돌리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온 세계로부터 식량원조를 얻어내기 위한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아닌게 아니라 1996년에도 황해도에서 물난리가 나 논밭이 떠내려갔고, 유실된 집도 적지 않았다. 신의주시 부근에서도 마을 세 곳이 침수로 인해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그 정도의 폭우는 예전에도 여러 번 있었다. 피해가 가장 큰 곳으로 알려진 황해도는 사실은 한국 서울과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다. 황해도와 한국의 경기도는 인접지역이다. 따라서 한국의 서울·인천에도 같은 분량의 비가 쏟아졌을 게 틀림없다. 그런데도 북조선에서만 큰 피해가 발생했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북조선의 통치집단이 엉터리 시책을 반복해서 농지와 농민을 황폐화 시켰기 때문이다. 치밀한 조사와 연구도 없이 마구 나무를 찍어낸 다음 산지에 밭을 만들고, 수확량을 혁명적으로 늘인다고 하면서 벼를 밀집재배한 결과 땅이 지력(地力)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농민 역시 농사짓는 법을 잊어 버렸다. 해결해야 할 일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 어떻게 수습해 볼 수가 없는 것이다. 논에는 해충이 득실거리는 데 뿌릴 농약이 없다. 싱싱한 채소를 소비지로 보내려 해도 수송 할 트럭이 없다. 그리고 트럭이 있다고 해도 개솔린이 없으니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상태에서 누가 농사를 지으려 하겠는가. 큰물이 나건 안 나건 북조선에서는 농업생산 향상의 가망이 아예 없는 것이다. 이런 속에서 김정일은 농업제일주의를 표방하고 나섰다. 그 명령에 따라 학생·노동자가 농장에 투입됐다. 그러나 그들이 제대로 농산물을 돌볼 턱이 없는 일이 아닌가. 똑같이 옥수수를 심었다고 해도 수확량이 농민이 심은 것과 똑같을 수 없다. 차라리 심지 않은 것만도 못하다. 그러니 농업제일주의를 표방해 도시주민을 농촌지원에 동원해도 결과적으로는 땅과 사람만 피곤하게 만들뿐이다. 이제는 이런 뻔한 이치를 깨달을 때도 됐건만, 방향이 자꾸 빗나가고만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997년이 되자 일부 농장에 인민군이 투입됐다.『앞으로는 군대가 농사를 지으라』하고 김정일이 명령을 내린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고 하면 먹을 게 없어서 도망치거나 농사짓는 것을 포기하는 농민이 속출했기 때문이다. 김정일의 지시를 받은 군부대는 농장을 접수하고 관리운영을 개시했다. 그들에게는 『책임지고 재배하고 수확물을 분배하라』는 지시가 하달돼 있었다. 농장관리위원장은 부대장이 맡고, 작업반장은 중대장·소대장이 맡아서, 다시 말해 총 대신에 삽을 잡고 일을 시작한 것이다. 이런 광경을 보고 나는 아무리 날씨가 좋다고 해도 농사가 제대로 될 턱이 없다고 결론지었다. 보위부 연구소는 곧 수용소 인민에게 공포감을 심어 놓으면 잘 복종하리라는 게 김정일이 생각인 것 같다. 수용소의 존재가 그의 이런 생각을 잘 드러내고 있다. 신의주시 충제리에 평안북도 수용소가 위치하고 있다. 도심에서 1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산 속에 있는데 보위부 연구소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내가 이 수용소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외회획득 지도원으로 일하고 있던 한 사내가 이 곳에 수용당했기 때문이다. 같은 업무에 종사 한 관계로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그가 중국으로 가면서 보위부의 사전승인을 받지 않은 게 문제가 됐다고 한다. 이런 일을 보고 나는 탈출계획을 여간 신중하게 세우지 않으면 큰 일 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탈출하고 싶다는 욕망은 수용소로 끌려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보다 더욱 컸다. 북조선의 상황이 너무나 절망적이었기 때문이다. 양식이 없을 뿐만이 아니라 약품·석탄·전기도 없었다. 게다가 식수 확보조차 어려웠다. 길거리를 걷다가 보면 뼈와 가죽만 남은 어린애들이 먹을 게 없나 하고 쓰레기더미를 뒤지고 있는 광경을 종종 목격하게 된다. 또 정거장 주변이나 장마당과 같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거지·부랑 아·매춘부·암달러상·건달패 등 사회의 그늘진 곳에서 사는 인종이 눈에 띄게 됐다. 북조선의 요즘 형편에 관해서는 아내나 아이들이 이미 말했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 어쨌든, 지금 북조선은 사람이 살 곳은 아니다. 식량난·물자난은 우리집 살림에도 영향을 미치게 됐다. 큰아들은 교원이면서도 학교에 거의 출근하지 않고 양식확보에 발벗고 나서게 됐다. 둘째 아들은 교원생활에 재미를 못 느끼고 그만둘 생각만 하고 있었다. 셋째 아들은 맹장수술 때 항생물질을 투여받지 못한 관계로 몸에 이상이 생겨서 국방체육단에 복귀하지 못하고 집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셋째는 체격도 좋고 공부도 잘해서 고등중학교시절에 항상 반에서 1, 2등이었기 때문에 시간을 헛되게 보내고 있는 게 가슴이 아팠다. 어떻게 해보아야 되겠다고 생각해 나는 그 아이를 데리고 평양 적십자병원으로 가서 정확한 진단을 받게 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 계획은 실천에 옮겨지지 않았다. 걸리는 게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여기 저기에 뇌물을 쓰면 적십자병원에서 진찰을 받게 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적십자병원에 과연 훌륭한 설비가 있느냐 하는 게 문제였다. 뿐만 아니라 그런 큰 병원에서도 약품이 부족한 관계로 환자들은 자기 약품을 제힘으로 구해야 한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탈출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셋째 아들의 건강문제도 있었지만 큰딸 문제도 있었다. 혼기에 처한 큰딸을 북조선에서 데리고 나가고 싶었다. 여자가 북조선에서 아이를 낳고 살림을 꾸려 나간다는 것은 이만저만 힘드는 일이 아니다. 식수도 여자가 들어 날라야 한다. 양식을 구하는 것도 전적으로 여자의 책임이다. 가장 힘드는 것은 신랑감을 구하는 일이다. 북조선에서는 성분이 같고 생활형편이 비슷한 집안끼리 혼사를 맺는 게 상식이 되고 있다. 그러니 선택의 폭이 좁을 수밖에 없다. 재미 집안이나 재일 집안에서 골라야 하는 것이다. 재일 집안은 80년대까지는 생활이 괜찮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일본의 친척들도 지치게 됐고 또 세대가 바뀐 관계로 원조도 크게 줄어들고 있다. 신의주에서 보면 재일 가족의 형편은 중국에 친척이 있는 가족의 형편과 비슷했다. 아마 멀지 않아서 원조도 끊어질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큰딸을 그런 집안에 시집보낼 수가 없었다. 자식을 둔 사람으로 견딜 수 없었던 것은 내 자식들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의 장래였다. 그들 역시 우리들처럼 「적성분자」라는 딱지를 붙이고 평생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먹고 살기에도 힘드는 판국에 적성분자라는 딱지를 붙이고 살아갈 삶이 얼마나 힘든 삶이겠는가. 이런 일 저런 일을 생각한 끝에 나는 탈출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구체적인 행동에 착수하기로 결심했다. --- 김원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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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인재들이 평생을 석탄만 캐다가 죽어가고 살기위해 도둑질과 강도짓, 성매매를 해야만 되는 지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