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없는 세계와 희망있는 세계를 살아보며 - 최주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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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49년 4월 19일 청진시에서 조선인민경비대 경비처 민청위원장을 하시던 아버지 최석보와 어머니 이순음 사이에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우리가족은 아버지가 6.25당시 평양시 경비연대 당 조직지도원(소좌)을 하다 전사해 열사자가족으로 특혜를 받으며 살았고 그로인해 나는 59년 성분좋은 자들만 다니던 평양외국어 유자녀학원에 입학할 수 있었다. 나는 평양 외국어 유자녀학원에서 러시아어를 전공했는데 60 년대 초반까지는 소련 여교사가 가르쳤으나 중반부터 소련을 "수정주의"라고 비난하기 시작하면서 교사를 소련으로 돌려보낸 기억이 난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66년경부터 자녀들을 외국에 내보내는 것을 최대의 희망으로 여기는 풍조가 확산되면서 고위층 간부들이 자녀들을 앞다퉈 남산고등중학교에서 우 리 학원으로 대거 전학시킨 것이다. 그전에는 6.25 당시 죽은 전사자,피살자 자녀들만 이 위 학원에 다녔다 우리 학급에도 김일성 양딸 김경선, 당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선전담당 부위원장 김창만의 딸 김철순, 현 호위사령관 차수 이을설의 셋째딸 이춘영 등이 다녔다. 김창만의 딸은 67년 아버지가 숙청되자 학원에 나오지 않았다. 68년 1월 미국 선박 푸에블로호가 나포된 것을 계기로 북한 전역에는 일촉즉발의 전쟁상황이 조성되어 그해 3월 북한군 정찰국 항공육전대에 입대하였는데 당시 정찰국 124군부대,17저격여단,항공육전대 병사는 특수훈련을 받아 장발한 채 허리에 는 단도와 포승끈을 항상 차고 다녔다 2년반 정도 사병으로 근무하고 70년 10월 정찰국직속 외국어강습소에 입학하여 소대장,중대장 전술과 정보수집 방법 및 러시아어 (전공)등을 배우고 72년 10월 졸업과 함꼐 소위 칭호를(정식 군인신분이 아니기 때문에 임관은 아니다)받고 민족 보위성 외사부(568군부대)에 통역관으로 배치되어 23년 동안 근무하며 부부장으로 진급하였다 그사이 75년 9월부터 78년 8월까지 평양외대 러시아어학부에 편입하여 공부하였고 89년에는 상위칭호를 받은후 92년 5월까지 체코주재 대사관 부무관으로 파견되어 체코 군 대령을 대상으로 전차에 설치하는 화염방사기 기술문건과 신형방독면 입수를 추진타가 현장에서 체포되어 추방당한후 94년 12월까지는 인민무력부 대외사업국에 서 중좌로 일했으며 95.5월까지는 후방총국 융성무역회사 합영부장으로 일했다 인민무력부에 근무하는 동안 전 인민무력부장 원수 오진우, 전 부부장 차수 김광진, 현 5군단장 대장 김명국 등 고위장성들을 많이 알게되어 그들과 외국도 같이 다니면서 인간적인 관계를 가질 수 있었다 군생활중 북한에 회의를 느낀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해 나는 탈북을 결심하게 되었다 92년 북한정부는 소련 군사교육기관 "푸룬제 군사아까데미야"를 유학한 장성,군관들 에 대해 정부 전복음모를 꾀했다는 혐의로 94년까지 숙청바람을 일으켰다 친하던 대외사업국 국장 김학산(전 소련무관), 소장 김정찬(전 소련무관), 대좌 조재형 (전 소련,헝가리,유고무관), 대좌 최수현(전 작전국 2처 부처장, 소련부무관)등 6명이 군 보위국에 연행되었다. 특히 나의 생명의 은인이었던 국장 김학산이 숙 청당해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모른다 김학산은 내가 목 디스크로 반신마비가 되었을 때 업무차인 벤츠에 직접 태워 자신의 사돈이 기술부원장으로 근무하던 적십자병원으로 데려가 진단받게 하였고, 조형 촬영 약(X레이)이 없어 수술에 어려움을 겪게되자 총참모장의 비준을 받아 각국 무관들에 게 약을 구입하여 보내라는 지시를 내려보내 동독무관인 대좌 박세창이 서독에서 약을 구입해 보내주도록 했다. 그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을 것이다 대좌 조재형도 내가 그 밑에서 부부장으로 같이 근무하면서 인간적으로 형,동생하는 관계로 발전했는데 한꺼번에 이들을 모두 잃고 만 것이다. 언제 무슨 명목으로 잡혀 숙청 될지 모른다는 불안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던 중 95.4 외화 벌이차 대표단을 인솔하고 중국으로 출장을 나갈 기회를 얻었다. 대표단에 합영부 지도원 장일관, 최명숙(당시 중앙재판소 소장 최원익 딸)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나는 중국체류중 이상한 소문을 듣게 되었다. 보위당국이 내가 사업상 접촉한 재미교포, 재호주대표, 남한의 실업가들에게 군사비밀을 넘겨주고 딸라를 받아 먹은 것으로 의심하며 조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던중 갑자기 나에게 소환명령이 내렸다. 나는 탈출만이 유일한 살 길이라고 확신, 대표단을 이탈하여 대한민국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지난 날들을 생각하면 마치 악몽을 꾸는 것 같다. 대한민국에 온지도 어언 4년이 다 되어가고 있다. 그동안 많은 인생의 변화가 일어나 사회주의사상, 주체사상을 자본주의, 민족주의사상으로 전환했고 생활양식과 방법도 많이 바뀌었다. 남한은 북한에서 그려보았던 것보다 더 황홀하였다 국민들의 풍요로 운 물질 및 문명생활은 물론 큰 규제를 받지 않는 정치적인 자유와 권리 등은 북한 인민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다 남한도 인간사회이므로 만민이 공평할 수는 없고 사회적인 모순이 존재한다 그러나 북한에 비하면 지상천국이다. 하고싶은 말을 마음대로 하고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가를 남한 국민들은 아마 모를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기준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믿고 있다. 남한사회 적응에서 어려운 것이 있다면 문화적 차이와 종교에 대한 문제이다. 아직도 TV드라마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종교는 허위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전통 악극공연같은 것도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복고주의로만 평가하고 있다 또한 한자와 영어를 모르는 것, 주식이 무엇인지, 부동산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라 사업상,활동상 지장을 받기도 한다 나는 북한에 두고 온 처자와 친인척들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늘 가슴 속에 안고 살면서 통일되는 날 그들이 나를 이해해 줄 것으로 기대하 며 살고 있다. 현재 나는 남한에서 재혼하여 2살난 딸애를 두고 있다. 처는 독실한 천주교신자로 나에 대한 배려와 정성이 정말 지극하다. 장인도 북한 해주에 자녀 3명을 두고 6.25 발발전 남한에 오신 실향민으로 나의 처지를 많이 이해해 준다 이런 처와 처가에 대하여 항상 고맙게 생각한다. 경제도 안정되었지만 통일의 그날을 대비하여 최대한 근검절약하고 저축하면서 망탕(흥청 망청)쓰지는 않는다 현재 정부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는 나는 앞으로 조국통일에 이바지 할 수 있는 글을 더 많이 써서 우리 국민들에게 올바른 대북관 통일관 안보관을 심어주고 나아가 북한을 개혁, 개방으로 유도하기 위한 활동을 적극적으로 벌여 북한땅에 진정한 민주주의 정권이 수립되도록 하는데 한 몫을 하고 싶다. 1999.7 최주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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