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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이라는 봉우리를 향해 - 이금혁
동지회 17 4142 2004-11-18 00:12:42
사람은 누구나 다 자기의 삶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그 희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개미와 같이 일하며 부지런히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주위환경으로 말미암아 그 희망과는 상관없이 자신도 모르게 생각지도 못한 곳으로 흘러갈 때가 더 많은 것 같다. 현시대에서 그것을 대표하고 있는 것이 바로 탈북자들이 아닌가 생각된다. 나 역시 탈북자의 한사람으로 예외적일 수는 없었다. 정든 고향을 등지고 자유를 찾아 이 땅에 왔기에...

나는 원산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졸업후 철도 승무원으로 근무하다 군에 입대하였고 80년대 말에는 러시아 주재 모회사 운전기사로 파견되었다. 러시아 파견기간중에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한국방송을 청취하였고 그리고 한국사람들도 접촉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그 사실을 알게된 한 동료의 밀고로 북한당국에서는 나를 마치 간첩 취급을 하며 강제 귀국조치를 취했다. 해외에서 죄를 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취급당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던 나는 북한을 탈출하여 자유로운 세상에서 살고싶었다. 그리하여 1996년 1월 대한민국 땅을 밟게 된 것이다.

처음 나는 북한에서 자동차 부문에 종사한 경력을 바탕으로 버스회사에 정비사로 취업하였다. 동료직원과 함께 20여대의 차를 담당했는데 별다른 기술은 필요하지 않았지만 힘든 육체노동이 필요했다. 하지만 노동보다 더 나를 괴롭힌 것은 정비용어들이 북한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외래어로 되어 있어 이해하기 어려웠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나는 외래어로 된 자동차 구조장치의 이름부터 열심히 외웠다.

하지만 어떤 날은 차량 부속의 이름을 잘못 알아들어 무거운 것을 들고 땀을 흘리며 창고까지 갔다 올 때도 있었고 기계를 잘못 조작하여 풀 것을 조이고, 조일 것을 풀 때도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자동 미션오일 등 여러종류의 오일을 주입하는 기계의 주입구를 몰라 내 얼굴에다 뿌릴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주위에서 영락없이 폭소가 터져 나왔고 때로는 손가락질하며 비웃기도 하여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 하지만 일을 배우는 나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다만 일이 익숙해질 때까지 열심히 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때의 피나는 노력이 열매도 맺기 전에 나는 정비경력 다섯 달을 채우지 못하고 그 회사를 떠나야 했다.

나는 자본주의 나라에서는 모든 것이 실력과 경영주의 이익 가치에 의해 평가된다고 알고 있었으나 현실은 나의 생각과 얼마간 차이가 있는 것 같았다. 그 당시 나와 함께 일하는 동료는 나이가 65세가 넘은 노인이었는데 그 사람은 내가 받는 임금의 두 배나 받았다. 그러나 나는 임금도 적고 일도 거의 혼자 다 해야 했지만 회사에서는 나를 무조건 내려보고 일이 조금만 잘못되어도 다 내 잘못으로 취급하였다. 일을 하면 할수록 미래에 대한 희망이 점점 더 없어지는 것 같아 그만두게 되었다.

그후 직업을 구하려고 여기저기 다녀 보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회사를 그만둔 것에 대해 후회도 많이 했다. 시간도 많이 낭비했지만 어쩔 수 없었던 일이었다. 어쨌든 지금은 주위 분들의 도움으로 안정된 직장에서 열심히 근무하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여기서 생활하면서 처음으로 가장 기뻤던 일이 하나 있다. 그것은 비록 중고 승용차지만 자가용을 구입했던 일이었다. 그 날 저녁에는 너무 감격한 나머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자가용도 구입하고 해서 용기를 내어 차를 끌고 시내 한복판으로 갔다. 서울시내에서 나도 남들처럼 차를 몰고 싶은 욕심에 운전면허증을 막 취득한 초보운전수에다 서울지리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무작정 차를 끌고 나선 것이다. 서울의 거리가 얼마나 복잡하고 차들이 많은지 집으로 오는 길을 찾지도 못하고 서울 시내를 밤새도록 헤매다 다음날 새벽 겨우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날은 참으로 죽을 고생을 한 날이었다

또 이런 일이 있었는데 어느 해 여름 동료 몇 명과 함께 자가용을 타고 피서를 떠났는데 자가용을 끌고 조국의 산야를 달린다는 감정에 젖어 너무나 흥분한 나머지 차의 썬루프를 분리하다 파손되어 그만 바람에 날려 버렸다. 날도 더운데 어떠랴 싶어 그냥 출발하였다. 하지만 우리가 대전에 도착했을 무렵, 하늘에 먹장구름이 몰려오더니 급기야 소나기가 퍼붓는 것이 아닌가? 차안으로 들어오는 빗줄기를 막으려고 별의별 방법을 다 강구해 보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차 밖으로 우산을 펼쳐 막았다. 하지만 시속 20kM의 저속에도 우산은 바람에 날려 도저히 빨리 갈 수가 없었다. 뒤에서 따라오던 차들은 경적을 울려대며 길가는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배를 끌어안고 웃었다. 우리는 동물원 원숭이 신세가 되었지만 별로 개의치 않고 운행을 계속했다.

한국에서의 첫 여행길에서 저지른 실수 때문에 감기에 걸려 고생은 했지만 내가 직접 승용차를 몰고 이 곳 저 곳 여행을 했다는 것은 정말 꿈만 같은 일이었다

나는 올해로 한국에 온지 4년이 지났다. 그동안 이곳 남쪽에서 생활해 오면서 쉽게 적응한 것도 있지만 남북간의 문화적인 차이 때문에 적응이 어려웠던 것도 있었다. 사람을 만나 명함을 주고 받는 일이라든가 남녀간의 문제에 대해 대화를 한다든가 하는 것들이 북한과 서로 달라 오해를 하거나 실수를 저지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특히 명함 때문에 있었던 일을 실례로 들어보자 방송관계로 모 방송국 PD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 사람이 명함을 주길래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 방송국으로 갈 기회가 있어 그 명함을 찾아 그에게 전화를 해서 만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PD는 나를 기억도 하지 못하고 바빠서 만날 시간도 없다는 것이었다. 내 딴에는 부탁이 있어 찾아온 것도 아니고 이곳에 온 김에 얼굴이나 보고 가려고 찾았는데... 이 일로 나는 그 PD에게 무척 섭섭함을 느꼈다. 물론 지금은 명함을 주고 받는 일에 익숙해져 있고 그것이 의례적인 인사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똑같은 일이 생겨도 섭섭해하지는 않지만 사람들을 만나 명함을 주고 받을 때면 가끔은 기억하지도 못하고 그것만으로 끝나 버리는데 하고 아쉽게 생각되어 질 때가 있다

아무튼 나는 한국에서 제2의 삶을 개척하면서 실로 많은 것을 배웠다. 그중에서도 인간은 누구나 출발점이 같으며 자기의 사회적 가치는 누가 키워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피나는 노력과 열정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시간의 귀중함을 터득하는 자만이 성공할 수 있다는 것도 배우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 성공이라는 봉우리를 향해 나름대로 엻심히 하고 있다. 그 길만이 통일을 앞당기는 길이며 그리운 혈육과 상봉하는 길이라고 믿고 있기에...

2000월 2월 이금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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