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뉴스

탈북자수기

상세
통일된 조국에 태극기 휘날리는 그 날을 위해 - 김재원
동지회 22 4662 2004-11-18 00:16:06
북한을 떠나 처와 함께 서울에 온 지도 벌써 3년이 지났다. 그동안 고령이라는 이유로 취직이 되지 않다가 역설적으로 같은 이유, 즉 살아온 연륜과 경험이 풍부하다는 점이 인정되어 금년 5월부터 정부기관에 취업해 열심히 근무하고 있다. 그래서 인지 요즘은 처음 서울에 도착했을 때 보다 훨씬 심리적으로 안정되고 행복감마저 느끼기도 한다. 이렇게 편안함을 얻기까지 지내온 나날들이 한 편의 파노라마처럼 뇌리에 스쳐 지나간다.

- 주민등록증을 받으며 -

처음 정부로부터 배정받은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의 일이다. 아내와 나는 집안청소를 깨끗이 마치고 오붓하게 저녁식사 시간을 맞이했는데 얼마나 가슴이 벅차던지 ... . 게다가 담당 선생님으로부터 남한의 주민임을 증명하는 주민등록증을 받고 나니 순간 감격의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그 눈물은 탈북후 제3국에서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살아온 우리 부부가 이제는 당당히 대한민국의 국민이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도 감개무량해서 흘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 부부를 이 땅에 살 수 있도록 배려해 준 정부와 국민에 대한 감사의 눈물이었으며, 대한민국 국민으로 다시 태어난 우리 부부의 새 삶에 대한 결의의 눈물이었던 것이다.

- 종교에 대하여 -

나는 북한에 있을 때 유물론적 사고에 기초해 종교를 믿지도 않았고 오히려 철저히 배격하였다. 다만 6.25 당시 교회 장로로 계시던 장인의 영향을 받은 아내를 통해 기독교에 대해 조금 알고 있을 뿐이었다.

남한에 오니 각종 종교단체에서는 귀순형제들의 사회정착을 돕기 위해 교회와 귀순형제들간 자매결연 맺기를 전개하고 있었다. 특히 기독교 단체의 활동이 가장 활발하였는데 나에게도 모 교회와 자매결연을 맺을 기회가 찾아왔다. 종교를 배격하던 나로서는 선뜻 교회에 나가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하나님에게 의지하면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말에 일단 교회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교회에 나가는 횟수가 거듭됨에 따라 기독교의 본질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성경구절처럼 사랑의 실천에 있음을 깨닫고는 차츰 신앙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복잡했던 마음도 정리되어 곧 심리적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교회가 있었기에 나와 아내는 쓰러지지 않고 항상 낙관적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것 같다.

- 즐거운 여행 길 -

나는 남한의 여러 명승지를 여행할 때마다 참으로 즐겁고 행복한 마음이 저절로 일어난다.먼저 여행하는데 전혀 제한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치 한 마리 새처럼 자기가 가고자 하는 곳은 언제 어디라도 갈 수 있다는 사실이 처음에는 믿어지지 않았지만 실제로 강원도나 충청도 지역 대부분을 돌아 다녀 보면서 그것이 사실임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기차나 버스 등 교통수단들이 잘 발달되어 있어 여행하는데 전혀 불편함이 없기 때문이다. 기차나 버스를 타던 비행기를 이용하던 여행 객 스스로 필요에 따라 교통수단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발달되어 있으며 철도나 도로망도 잘 정비되어 있다.

또한 각 지역별로 여행할 만한 명승지에 대한 사전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서점에 가면 얼마든지 여행 안내 책자를 구할 수 있는데 이 책자를 잘 활용하면 아무리 처음 가는 목적지라 하더라도 별 어려움 없이 여행할 수 있다.

그래서 여행할 때마다 즐거운 여행 길이 되어 행복하다.

- 쓸쓸했던 회갑, 그러나 수많은 기쁜 나날들 -

98년 8월 10일은 나의 회갑 날이었다. 하지만 북한에 자식을 두고 온 상황에서 회갑연을 할 수 없었다. 다만 집에서 아내가 권해주는 술잔을 받으며 찬송가를 부르면서 시간을 보냈다. 同苦同樂이라는 말처럼 가족끼리는 괴로움이나 즐거움을 함께 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나의 인생관인데 그렇게 할 수 없는 내 자신이 한없이 처량하게 느껴졌다. 그날따라 저 북녘 땅에 있는 나의 아들, 딸 그리고 손자, 손녀들이 더욱 보고 싶었다. 그리고 자식들에 대한 그리움의 정도가 더욱 강렬해지면서 눈가에는 어김없이 이슬이 맺혔다. 아내와 나는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그 날 하루를 쓸쓸히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기쁜 날들도 많았다. 각종 안보강연회에 강사로 초청되어 절찬을 받거나 교회에서 신앙 간증을 통해 같이 웃고 같이 울면서 호평을 받을 때는 너무나 기뻤다. 더욱 기뻤던 것은98년 12월에 이희호 여사께서 주관하신 청와대 오찬 모임에 참석한 일과 올해 5월에 대통령 내외분을 모신 가운데 열린 국가조찬기도회에 참가한 일이었다. 정말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그 기쁨과 영광을 가슴 깊이 새기면서 참다운 국민으로 살아가기 위해 모든 정열을 다 바칠 것을 다짐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행복하고 기뻤던 일은 우여곡절 끝에 북에 있는 가족들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우리 부부는 가슴 밑바닥에서 차 올라오는 기쁨과 환희 때문에 한동안 밤을 꼬박 새울 정도로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하루빨리 온 가족들이 함께 모여 살 수 있는 그 날이 왔으면 좋겠다.

- 새 삶에 대한 희망 -

지금까지 내가 걸어온 길을 돌이켜보면 아쉬운 점이 참으로 많다. 한때는 북한에서 자식들과 손자, 손녀들과 함께 오손도손 지낸 때가 있었지만 그것은 진정한 자유의 바탕 아래 누릴 수 있는 행복은 아니었다. 이제 대한민국에 살기로 작정하고 이 땅에 발을 내 디딘지 3년이 지난 지금 진정한 자유의 나라 이곳에서 할 수만 있다면 내 자식들과 손자, 손녀들과 함께 모여 화목한 가정을 이루어 행복하게 살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그리고 다가오는 통일에 대비하여 열심히 배우고 노력함으로써 통일되는 그 날 선봉자적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저 북녘 땅 방방곡곡 통일된 조국에 태극기 휘날리는 그 날을 앞당기기 위해 지금 맡고 있는 직분에 충실하면서 모든 정력을 아낌없이 바칠 각오로 살아 갈 것이다.

2000년 7월 김재원
좋아하는 회원 : 22

좋아요
신고 0  게시물신고
  • 요셉 2009-11-11 02:08:52
    힘내시고 열심히 살아가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댓글입력
로그인   회원가입
이전글
정착의 지름길은 실력을 닦는 길 - 이규창
다음글
문화적 이질감 극복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노 - 김순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