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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의 토박이로 자리잡기까지 - 전성철
동지회 15 4668 2004-11-18 00:23:03
비교적 평탄한 집안에서 삼남 사녀중 둘째로 태어난 나는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기 위해 1990년 6월 러시아에 파견근무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것이 내 인생을 180도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어 1995년 2월 대한민국에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자유투사나 통일의 영웅, 사상과 이념을 초월한 시대의 영웅도 아니며 사선을 넘어온 용사도 아니다. 다만 인간다운 삶을 살아보고자 이 땅을 밟았으며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북한에 살다가 대한민국으로 와서 이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되기 위해 애쓰는 과정에서 있었던 일을 몇 가지만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세상에 공개될 이 글을 빌어 내게 은혜를 베푼 어느 분께 진정어린 감사의 말씀을 전해 드리고자 한다. 그분은 1995년 8월 사회적응교육을 마치고 드디어 그렇게도 궁금하고 부딪쳐 보고 싶었던 이 사회에 처음 생활을 시작할 당시 나를 보호해 주신 담당선생님이시다. 그 분은 세상 밖으로 나온 나를 친동생처럼 대하면서 따뜻하게 이끌어 주셨고 나는 그 분을 형님처럼 따랐다. 그 분은 수년간의 고독하고 불안하고 쓸쓸했던 내 마음 한구석을 단비같이 촉촉이 적셔 주셨다. 이 글을 빌어 거듭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처음에는 딱히 정해진 직장도 없이 안보강연을 다녔다. 그러던 어느날 그 날도 강연을 하고 있었는데 내 강연을 듣고 난 한 중년의 남자가 "나와 같이 고물장수 한 번 해보지 않겠느냐"고 묻길래 " 한 번 생각해 보지요"라고 대답하긴 했지만 속으로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내가 고물장수나 하려고 여기까지 왔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만 해도 남들처럼 대학공부도 하고 싶었고 가진 것은 없지만 남들이 한다는 사업도 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고물장수를 한다는 것은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현실은 냉정하고 생각했던 것만큼 만만치가 않았다. 하고싶은 것은 많았으나 막상 실행에 옮기기는 쉽지 않았다. 머지 않아 대가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정말 노동의 대가로서 흘린 만큼의 돈을 벌 작정으로 직장을 구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알아보고 신중하게 생각한 끝에 오산에 있는 어느 대기업의 생산직 근로자로 취직했다.

처음에는 다른 탈북자들이 딱하다는 말투로 "탈북자들 중에 3교대하는 사람은 너뿐이야"라고 말하면서 나의 자존심을 건들기고 했다. 하지만 나름대로 꿈과 소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 말에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회사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여러모로 고민도 하면서 열심히 일했다. 그러던 중 나는 운명처럼 한 여인을 만나게 되었다. 아시는 분의 소개로 만난 그녀는 대학을 나온 인텔리 여성이었다. 딱딱한 나의 첫인상을 싫어했던 그녀지만 결국 나의 끈질긴 구애로 결혼을 허락하게 되었다. 재산도 없고 사회적인 지위도 없는 내가 결혼에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나의 순수한 마음과 지칠 줄 모르는 집념을 높이 산 결과라고 생각된다.

아무튼 결혼 후 지금까지 만 4년 6개월이 지났는데 그동안 변화된 것도 많다. 36년 동안 각자 다른 환경에서 자라온 우리 부부는 처음에는 많은 갈등과 어려움이 있었지만 서로 이해하면서 그러한 어려움을 조금씩 극복해 나갔다. 결혼 1년반만에 예쁜 첫딸을 얻게 되었고 내년 3월이면 둘째가 탄생할 예정이다. 그리고 유달리 정이 많고 따뜻한 아내의 내조 덕분으로 직장과 사회생활도 순조롭게 해나가고 있으며, 7평 빌라에서 시작한 주택이 지금은 28평 아파트로 바뀌었다.

또한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리매김을 하려는 생각에 "자유총연맹 오산지부 청년회에 가입하게 되었다. 특별회원이라는 신분으로 가입비도 탕감해 주시고 지부장님 이하 회원 여러분들의 관심과 격려속에 오산의 토박이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딸애의 백일과 첫돌 기념일 때도 예약인원 보다 배가 훨씬 넘는 인원이 참석해 주실 정도로 회사동료들과 회원님들의 관심은 대단했다. 그럴 때마다 한마디로 한국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났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문화적인 차이도 서서히 극복되었다.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제일 눈에 거슬렸던 것이 여자들의 미니스커트 옷차림과 남자들의 장발이었는데 이제는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한 모습을 자주 보면서 편견을 없애려고 노력하니까 결국 그것들은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는 한 수단임을 알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자유스러움이 보장되어 있는 사회에서나 볼 수 있는 현상이었던 것이다. 자유라는 말이 나왔으니 이 기회에 나름대로 자유를 정의해 본다면 시대가 요구하고 사회가 요구하는 범주안에서 스스로 지키는 것이라고 하면 어떨까

결국 그 자유라는 것은 자신의 운명은 자신의 것이고 그 운명을 선택하는 것도 자기 자신이며 그 결과에 대한 책임또한 자신의 몫이라는 것과도 일맥상통하지 않을까 직업선택이나 인간관계 또는 자신의 행동 등 모든 것이 다 자유일 것이다 하지만 어떠한 것을 선택하는데 따른 결과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 모든 것이 자신의 몫으로 돌아온다는 사실도 결코 자유라는 개념에서 떼어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어느덧 나는 오산에 삶의 보금자리를 틀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토박이가 되었다. 아직도 간혹 두고온 고향생각에 마음이 심란해질 때도 있지만 그렇고 그런 평범한 나같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삶을 이루어 가는 오산의 이웃들에게 정겨움을 느끼며 제2의 고향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

이제 이글을 마무리 할 때인 것 같다. 지나온 내 생활의 일부분이지만 이 글이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이 사회에서 이 정도라도 뿌리를 내리고 살아갈 수 있게 뒷받침 해준 사랑하는 아내에게 고맙다는 말과 함께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여러모로 도와주시고 격려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2001년 1월전성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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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근바구니 이민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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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민복 ip1 2014-02-27 22:25:52
    나는 이분과 모스크바에서 함께 탈북자권리를 위해 활동하다
    유엔을 통해 함께 서울에 왔고
    사회도 같은 날 나왔다. 이런 분이 잘 정착한 것이 나 이상으로 기쁨.
    통일후에도 큰 역활하리라 믿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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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민복 ip1 2014-02-27 22:27:47
    또 한 동기 정성산도 영화감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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