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뉴스

탈북자수기

상세
「청류관」냉면 드시로 오시라요! - 이정국
동지회 17 5047 2004-11-18 00:26:15
1996년 5월 꿈과 희망을 안고 이 땅에 발을 내디딘 지도 어느덧 여섯해가 되었다. 북에 고향을 두고 남으로 내려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러했겠지만 나 역시 남한에서 자리를 잡기까지는 상당한 시행착오와 실패를 겪었다.

남한 사회에 첫 발을 내딛게 되었을 때 내 손에는 정부가 지원해 준 얼마간의 정착금이 주어졌다. 그 돈으로 임대아파트 보증금을 내고 가전제품이랑 기타 생활용품을 구입하여 제법 사람사는 모양새를 갖추고 나니 이제 남은 것은 직업을 구하는 것이었다.

여기저기 일자리를 알아보던 중 담당 경찰관으로부터 해방 후 월남하여 성공하신 분이 계시니 찾아가 도움을 청해 보라는 말을 들었다. 그 분을 찾아가 귀순동기와 현 생활을 털어놓고 도움을 청하니 함북 청진이 고향인 그 분은 내게 자기 소유 빌딩의 주차관리를 맡겼다.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휴일도 없이 열심히 뛰어다녔다. 10층 건물에 드나드는 차량은 잠시도 끊이질 않는데 비해 주차시설이 노후해 일하기도 힘들었다. 퇴근도 없이 주차관리실에서 그냥 자 버리는 일도 허다했다. 나는 결국 6개월만에 그 일을 그만두었다.

한달간 집에서 쉬면서 곰곰 생각한 끝에 노래방 영업 쪽으로 눈을 돌렸다. 마침 영업폐쇄 조치로 문을 닫은 단란주점이 있었다. 건물주인을 찾아가 사정을 이야기하니 건물주인은 처음에는 탐탁치 않게 여기다가 마지 못해 임대를 허락했다. 사업은 난생 처음인지라 노래방에서 먹고 자며 일했다. 방 수는 적었지만 단란주점으로 꾸며놓은 곳이라 제법 분위기가 있어서 인지 손님이 많았다.

그런데 영업이 궤도에 오르고 수입도 제법 쏠쏠해지던 어느 날 주인이 나를 불렀다. 자신의 조카가 회사에서 해직당해 내가 운영하는 노래방을 조카에게 임대해 주고자 한다며 내가 낸 임대 보증금에 5천만원을 얹어 내놓는 것이었다. 당시 내 생각에 그 돈 5천만원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흔쾌히 수락했다.

노래방을 그만두고 새로이 무엇을 할까 고민한 끝에 북한에서의 경험도 살릴겸 북한 음식점을 열기로 마음 먹었다. 우선 가게자리를 찾아 나섰는데, 장사가 좀 될 만하다 싶으면 권리금만 최하 5천만원이었다. 결국 서울지역은 포기하고 경기도 이천시 마장면에 권리금이 없는 한 건물을 임차했다. 건물주인이 영업을 하다 장사가 워낙 안되어 문을 닫은지 1년이 넘은 식당이었다.

7주 정도 개업준비를 한 끝에 「청류관」이란 간판을 내걸고 북한식 냉면 전문점의 문을 열었다. 외진 곳이라 개업 초기 손님은 하루 몇 명이 고작 이었고, 음식재료는 그냥 썩어 나가기 일쑤였다.

하지만 나는 낙담하지 않고, 몇 안되는 손님이라도 친절과 정성으로 대접했다. 손님이 6천원짜리 만두 하나를 시켜도 북한 요리를 덤으로 내놓았고, 북한에 대해 궁금해 하는 사항들에 대해서도 친절하게 설명해 주니까 모두들 만족해 했다. 입소문이 퍼져서 그런지 날이 갈수록 손님은 늘어났고 마침내 식당은 손님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번창했다.

얼마 후 나는 식당건물을 매입했고 단층을 3층으로 증축했다. 2층은 노래방과 까페로 꾸몄고, 3층은 민박칸으로 지어 겨울철에는 스키장 손님을 받고 여름철에는 인근 지방대학생들의 하숙집으로 활용했다.

청류관 음식이 큰 호응을 얻게 됨에 따라 사업에 조금씩 자신감을 얻은 나는 청류관을 전국 브랜드화 하기로 하고 체인사업을 시작했다.

누구나 적은 돈으로 창업할 수 있도록 사업장 면적을 최소 20평까지 가능토록 했고, 창업자금이 부담스러운 사업자들을 위해 신용도에 따라 3천만원∼1억원의 자금을 대출받을 수 있도록 금융기관과 협조했다. 내가 운영하는 청류관 영업이 꾸준히 번창하고 신문과 잡지에도 청류관 광고가 여러번 나오면서 체인점 사업도 잘 풀려 나갔다.

어느날인가는 신문에서 우리 전통의 김치가 일본의 기무치로 세계적인 브랜드가 되어간다는 기사를 읽고 우리의 전통식품을 손쉽게 맛볼 수 있도록 하는 사업, 즉 북한음식점 청류관과는 별도의 전통식품회사 설립을 구상하게 되었다.

곧 사업에 착수하여 북한 전통의 메밀냉면과 꿩만두 등을 남한 주민들의 입맛에 맞게 퓨전식으로 개발하여 선보였다. 그 결과 전국의 미식가들과 식품 애호가들의 큰 호응을 얻기에 이르렀고, 이에 자신을 얻은 나는 강화도에 청류종합식품주식회사를 설립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내 사업에 큰 돈을 투자한 사람이 개인 사정상 남의 보증을 섰다가 큰 손해를 보았다며 투자한 돈을 회수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시간을 달라고 사정했으나 막무가내였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고 당장 현금이 없어 눈앞이 캄캄했다. 어쩔 수 없이 북한음식점 청류관 건물을 팔고, 그 돈에 은행 대출금까지 보태어 그 사람이 투자한 돈을 갚았다.

그러자 당장 회사는 자금난에 부딪혔고 나는 지금까지의 사업을 중도에서 포기하느냐 계속하느냐 하는 갈림길에 놓였다.

크고 작은 창업투자사를 찾아가 사업계획서와 지원요청 자금설계서, 사업성공 가능분석표를 내놓았지만, 창투사는 지금까지 국내에서 식품회사에 투자해 본 적은 없으니 IT산업쪽에 손을 대면 찾아 오라고들 했다. 여기저기 쫓아다니며 사정하고 자료를 제출하고 하여 간신히 정부의 생계형 창업지원금 1억원, 중소기업 신용보증기금에서 3천5백만원, 기타 주거래 은행 등으로부터 대출을 받아 일부는 청류종합식품주식회사의 운영자금으로 활용했다.

한 고비를 겨우 넘긴 나는 그때부터 제품 연구개발에 주력하는 한편 제품생산에도 박차를 가했다. 전통음식과 관련된 수많은 자료를 가져다 놓고 여러 밤을 새면서 유사 식품을 비교 분석하고 연구했다. 배추김치의 경우 고유의 맛을 살리기 위해, 자체 농장에서 재배한 무공해 배추를 속초 바닷물로 절인 다음 다시 지하 150m 암반수로 씻어내고 배추 속은 강화도 순무에 생태와 꿀 등을 첨부시켰으며 냉장고 대신 지하저장실에서 잘 숙성시켜 제품의 맛과 질을 그 누구도 모방할 수 없게 해 나갔다.

북한 전통방식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 가능하면 실향민들을 공장장과 종업원으로 채용했으며 제품 하나하나에 정성과 마음을 담아 실향민과 옛 고향음식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에게 전통의 맛을 선사하려고 노력했다.

행운인지 아니면 노력의 결과인지 청류관 체인사업에서 많은 매출을 올려 생계용 창업대금 1억원을 일시불로 갚았으며, 청류식품의 김치, 메밀냉면, 꿩만두, 꿩육수, 냉장비빔장 등도 시내 호텔들과 태릉 선수촌에 납품하게 되었다.

이제 사업이 어느 정도 정상궤도에 진입한 것으로 자부한다. 장차 사업이 더욱 번창해지면 영업이익의 일부는 사회정착이 어려운 귀순자들이나 소외된 장애인들을 돕는 일에 쓰고 싶다.

지금껏 한번도 좌절해 본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좌절이란 없을 것이다. 청류관 체인사업과 청류종합식품사업도 확대해 나갈 것이다. 나아가 청류식품이 세계시장에서 자리잡는 그 날까지 소비자들의 조언에 끊임없이 귀 기울이고 더 좋은 전통식품 연구개발을 위하여 부단히 노력할 것이다.

2001년 9월 이정국
좋아하는 회원 : 17

좋아요
신고 0  게시물신고
  • 이성진 ip1 2016-10-24 09:50:25
    자본주의를 채택한 남한에서 산 사람도 사업해서 성공하기 어려운데

    이렇게 성공해서 사업하시는것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계속 해서 번창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댓글입력
로그인   회원가입
이전글
나에겐 너무나 소중한 자유 - 김철민
다음글
이미영씨의 증언 - 이미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