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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간의 유대는 역경을 이기는 힘 - 최주활
동지회 13 4413 2004-11-19 20:12:49
어떤일이 있어도 절대 좌절하지 말고, 지나친 욕심을 버리고, 돈을 아껴쓰고, 친구를 잘 사귀고 , 건강관리를 잘하고, 탈북 당시 가졌던 용기와 꿈, 희망을 잃지 말고 열심히 살아갑시다.

남한에 온 지도 7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어느 덧 귀 밑 머리에 흰 서리가 내리는 50대의 중반을 맞고 있다. 만한에서 보낸 세월은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아 떠난 갈등과 성취의 기나긴 여정이였습니다. 기억을 더듬어 보자니 감회가 새롭기만 합니다.
나는 1968년 북한군 정찰국 소속 항공육전대(특수전 부대)에 입대하여 남한에 올 당시까지 병사, 사관, 군관으로 근무했습니다.
내가 자유에 대해 동경하게 된 것은 오래 동안 외국에 나가 생활하면서부터였지요. 체코슬로바키아 주재 북한 대사관에서 무관으로 근무했고 구 소련, 유럽 등지로 출장 많이 갔는데 외국의 새로운 환경에 접하면서 북한이 얼마나 페쇄적이고 자유가 억압된 나라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심리적인 혼란이 밀려오면서 간 고민 끝에 남한행을 결심하고 실행에 옮겼습니다.
탈북동포들이 다 그렇듯이 나도 남한에서의 생활이 싑지 않았습니다. 가장 큰 어려움은 심리적 불안감이였습니다. 북한에 두고 온 처자식들에 대한 걱정과 그리움. 미안함이 엉키어마음 편히 생활하기가 함들었습니다. 밤잠을 설치며 새벽녘에야 겨우 새우잠에 들곤 했지만 악몽에 시달리기 일쑤였습니다.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을 보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흐르곤 했지요. 건강도 점점 나빠지자 삶의 의욕도 없어지고 뭔가 이루겠다는 희망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내가 동경하던 환경을 찾아왔는데 과거에 얽매여 이렇게 살아서야 되겠는가? 라는 끊임없이 자신을 추스리곤 했지만, 마음이 안정되지 않으니 뭔가를 새로이 시도한다는 것이 너무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인생에서 기회가 몇 번 정도는 꼭 찾아온다고 하지 않던가요? 나에게 행운이 찾아온 듯 했습니다.
하루 평소 알고 지내던 부동산중개업자가 중매를 서겠다고 나섰습니다. 외로움을 많이 타던 시기라 얼른 그러자고는 했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살고 있느 아파트 근처 커피숍에서 만났는데 첫 인상이 매우 좋게 느껴졌습니다. 그쪽도 내가 그리 싫은 눈치는 아닌 것 같아 마음이 놓였지요. 바로 지금의 부인입니다. 그후 일이 일사천리로 잔행되어 우리는 결혼에 골인했습니다. 처가 장인이 이북 출신으로 6.25때에 월남하신 이산가족입니다. 그래서인지 처는 나의 처지를 잘 이해해 주었습니다. 구런 아내가 늘 고맙기만 합니다. 역시 안해를 만난것 행운이였습니다. 결혼하여 딸을 낳았습니다. 내 나이 50이 넘어서 그런지 마치 손녀를 키우는 것 같습니다. 딸이 있으니 잡안에 웃음거리가 생기고, 괜한 걱정도 많이 없어졌습니다. 딸아이의 성화에 몯마도 태원주고, 놀이테에 가서 그네도 태워주곤 합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결혼 한 것이 나의 남한사회 전착에 중요한 열쇠가 된 것 같습니다.
명절, 주말이면 처가 식구들과 어울려 시간을 보낸다. 가족, 친척들이 모여 않으면 장모의 성화에 못이겨 점 백원짜리 화투(고스톱)판을 벌리기도 합니다. 화투는 80이 넘으신 장모에게서 배웠지요. 화목한 가정 분위기는 외로움을 잇게 해주었고, 사랑하는 안해와 딸은 내게 책임감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책임감은 자연스럽게 생활의 의욕을 샘솟게 하는 활역소가 되었습니다.
또 결혼과 동시에 행운이 찾아왔습니다. 안정된 일자리를 갖게 된것입니다. 거의 1년 반 동안 직업이 없이 안보강연을 한다는 핑계로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였는데 시간이 좀 지나다보니. 이렇게 떠돌며 평생 살아갈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안정된 직장을 구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주변에 이리저리 부탁을 했는데 북한에서의 내 경력이 고려도었는지 통일정책연구소에 취직하게 되었습니다. 내 경력을 활용할 수 있어서 맘에 들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월급이었습니다. 월 160만원의 받았는데 기대에는 다소 못미치는 수준이였지요. 북한군 상좌였고 군 경력도 27년이나 되는데 한국군 대령 급의 받는 월급에 비해 턱없이 모자란 금액이였다. 봉급을 올려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기다리라는 답변뿐이었다. 더 높은 연봉을 제시한 직장으로 갈까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그러다가도 주변에 같은 탈북동포들이 있는 곳에서 일하는 것이 몇 푼의 돈보다 더 낫겠지 하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 잡고 열심히 근무했습니다. 후에 연구소측에서는 내 군 경력을 다 인정해 주어 월급도 올라 가정을 꾸려가는데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 당시 배부른 흥정을 한 것만 같아 직업을 찾지 못하여 애타하는 많은 탈북동포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듭니다. 나의 능력과 위치도 잘 모르고 월급만 적다고 불평했던 내가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아마 내가 북한에서의 특권의식이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사회에 뛰어들었던 같습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며 돈의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가하는 것을 조금씩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한달에 50만원씩 꼭 저축을 합니다. 집세, 생활비, 여가비 등을 지출하고 남은 돈이 50원정도 됩니다. 미래를 위하여 한달에 한 번씩 불어져 가는 통장의 액수를 보는 것도 요새 내가 갖는 즐거움중 하나입니다.
남한에서 하루빨리 정착하기 위해서는 혼자 있는 시간을 줄이고 생활의 활역소를 찾으십시오.
평일이건, 주말이 건 퇴근하면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당연히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되고, 결국 탈북동포들은 북에 있는 가족 생각으로 슬픔에 잠기게 됩니다. 흥미를 느낄 수 있는 취미를 갖는 것이 좋은 듯 합니다. 먹고살기 바쁜데 배부른 소리라 할 사람들도 있겠습니다마는 취미라고 해서 꼭 돈이 들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요. 운동이나 등산도 좋고, 독서도 좋고…마음 먹기에 따라서 뭐든지 가능 합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 기분도 좋아지고 살아가는 것이 재미있고, 그러면서 자년스럽게 정착생활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는게 아닐까요? 고민은 좀 나은 삶의 방향에서 제시 할 수도 있지만 지나치면 생활을 잠식해 버랍니다. 밝은 미래를 설계하고 그것을 위해 열심히 일하며 즐겁게 사는 것. 그것이 가장 빠른 정착생활의 지름길이 아닐까 합니다.
북한에서 배운 지식을 잘 활용하십시오. 탈북동포들은 북한에 있을 당시 각자 특정 분야에서 일했기 때문에 그 분야의 지식을 살려 전문가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정부의 도움도 필요하지만 본인의 결심과 노력이 필수적이지요. 일확천금의 허황한 꿈을 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분야에 경쟁력이 있고. 이를 어떻게 잘 활용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결심을 하고 나면 모든 시간과 열정을 투자하여 배울 것은 배우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내 경우에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경희대 행정대학원 안보정책학을 공부하였습니다. 퇴근 후 학교에 가서 밤 늦게까지 공부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였지만 배움만이 나의 경재력을 높이는 길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학교생활을 소홀히 할 수 없었습니다. 대학원을 다니면서 또 하나의 귀중한 결실은 교수님들을 비롯하여 많은 친구를 사귄 것입니다. 술은 즐기지 못하지만 술자리도 같이 하려 노력하고 명절 때는 작은 선물이라도 주고받으며 친하게 지내다 보니 심리적으로 안정도 되고 그들이 주는 조언도 정착생활을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물론 30세가 넘어 공부를 한답시고 다니던 작장도 그만두는 사람들을 보면 걱정스럽습니다. 공부를 위해서 꼭 생업마저 포기해야 하는 거슨 아닙니다. 주경야독(晝耕夜讀)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주위 분들이 나에게 남한사회에 정착을 잘 하고 있다고 말 한마디라도 건너줄 때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습니다. 내가 누구를 가르칠 만큼 그리 훌륭하지는 못하지만 나중에 오신 탈북동포 여러분들에게 하고싶은 말은 너무나도 당연해서 쑥스러운 것들 뿐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정착생활의 바탕이 된다는 것을 여러분들도 느끼게 돨 것입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절대 좌절하지 말고 지나친 욕심을 버리고, 돈을 아껴 쓰고, 친구를 잘 사귀고, 건강관리를 잘하고, 탈북 당시 가졌던 용기와 꿈,희망을 잃지 말고 열심히 살아가라.

과연 내가 이렇게 지내왔는지 반성도 해보고 다시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하며 감히 여러분들에게 이런 부탁을 해봅니다. 여러분의 미래에 행운이 함께 하길 바랍니다.

탈북자동지회 소식지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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