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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깎이 대학생의 희망찾기 - 김영옥
동지회 18 5252 2004-11-19 20:13:40
2001년 3월, 내겐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땅이었던 대한민국에 도착했다. 수많은 고비를 넘으면서 내 인생의 새로운 출발지에 다다른 감회는 너무나도 감격적이었다. 이곳에서 나의 인생은 새로 시작되었고, 많은 것을 경험했다. 오랜 기간은 아니지만 남한에서 지낸 2년간의 생활은 내 기억 속에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

현실은 만만치가 않더군요.

남한에 입국하여 새 삶을 꿈꾸던 달콤함을 뒤로 하고 난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혀야 했다. 하나원에서 대한민국의 사회, 경제, 문화 등에 대해 교육을 받으며 이 사회에 대해 내가 가졌던 허황된 꿈은 그야말로 신기루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겉으로만 보이는 화려함이 이 사회의 전부라 생각했던 내겐 새롭게 다가오는 현실에 대한 두려움이 크기만 했다.

하나원 교육을 마치고 사회에 나와보니 모든 것을 내가 결정하고 스스로 행동해야 했다. 무엇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송파구에 있는 임대아파트를 받고 보니 나를 기다린 것은 엄청난 먼지들 뿐이었다. 한참을 멍하니 서있었다. 텅빈집을 바라보니 외로움이 밀려왔다. 세상에 나 혼자인 느낌.... 그렇게 하루를 보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무엇부터 해야 할지 차근차근 챙겨보며 정신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우선, 뭐든 몸을 움직여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집안청소와 살림살이를 정리하는 것뿐이었다. 정신없이 그것도 아주 열심히 집안 가득히 쌓인 먼지들을 털어내고, 쓸고, 닦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열심히 청소했다. 동네 슈퍼마켓에 가서 생필품 가격을 조심스레 물어가며 직접 샀다. 아무 것도 아닌 일이지만 내겐 의미있는 일이었다. 이렇게 난 혼자라는 두려움을 떨쳐 버릴 방법을 스스로 터득해 나가고 있었다.

나도 잘 모르는데....

하루는 옷도 사고 서울구경도 할겸 동대문시장에 나가보기로 했다. 전철을 타고 동대문운동장에서 내려 출구를 찾으려고 하는데 한 할머니가 내게 다가와 "아가씨, 충무로로 가려면 어떻게 가야해?"라고 물으셨다. 세상에! 이 사회에 나온지 며칠밖에 안된 나에게 길을 묻다니!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지만 엄청 기뻤다. 모른다고 해도 되는 일이었지만 용기를 내서 지하철 노선 표를 보며 할머니께 친절하게 가르쳐 드렸다. 그런 나에게 할머니는 고맙다고 인사까지 하시는게 아닌가? 나도 지하철을 타본 경험이 많지 않아 잘 모르는데 할머니에게 작으나마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이 기뻤다. 난 이 일을 계기로 작은 자신감도 생겼고 빨리 이 사회에 대해 이해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천리길도 한걸음부터....

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직업을 구하려면 공부도 해야 하고, 사회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소양도 갖추어야 했다. 우선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컴퓨터 공부와 운전면허취득을 제일 먼저 하기로 마음먹고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집에 필요한 가구며 가전제품들도 발품을 팔며 직접을 가격을 알아보고 흥정도 해가며 자본주의체제의 경제를 직접 느껴보려고 애썼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런 나의 노력이 대수롭지 않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나에겐 매우 중요한 첫걸음이었다. 성공적인 사회정착을 위해서는 조그만 일서부터 차근차근 시작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라 생각했다.

새로운 출발

32살에 대학교에 입학한다면 남들은 웃을지 모르겠지만 내 인생은 내가 설계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진학을 결심했다. 여러 군데 진학 가능여부를 알아본 결과 세종대 신문방송학과에 진학하게 되었다. 물론 서른을 훌쩍 넘은 나이에 대학을 졸업한다해도 취직하기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배우고 싶은 욕망이 컸다.

학교생활은 아주 만족스러웠다. 여러 가지 도움을 주는 친구들도 많이 사귀고, 교수님들의 따뜻한 정을 느낄 수도 있었다. 사랑하는 현정이, 민지, 현주 모두들 내가 모르는 것들을 가르쳐주는 스승같은 찬구들이다. 친구들과 함께 하는 행복한 시간, 낭만적인 캠퍼스 생활, 대학생활은 항상 즐거움의 연속이었지만 어려운 일도 있었다. 영어수업은 정말 곤욕스러웠다. 영어를 잘 모르는 난 원어강의 시간만 되면 마치 청각장애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조금씩 나아지긴 했지만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

전공수업은 열심히 들으려고 해도 이해가 안돼는 부분이 많았다. 열심히 필기하고 다시 복습하는 과정을 반복해야 했다. 그래서 인지 동료들은 나보고 필기하나는 끝내준다고 난리들이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1학기 중간고사 기간에 한 여학생이 내게 와서 노트를 복사해 줄 수 없겠냐고 묻는 것이었다. 대학에선 시험기간이 되면 정리가 잘된 노트를 일명「족보 」라는 이름으로 여러 학생들이 돌려가며 공부한다. 난 그저 잘 몰라서 부지런히 메모한 것 분인데 내게 이런 부탁이 들어오니 난감하기도 했지만, 기쁜 마음으로 빌려 주었다. 그 학생은 다음날부터 나만 보면 꼬박꼬박 인사하고 반가워 했다.

다음학기에는 학원에 다니며 영어공부를 더 해볼 생각이다. 영어를 모르면 공부하는데 힘든게 한두가지가 아닌 것 같다. 짬짬이 틈을 내 아르바이트도 해보려고 한다. 하루하루를 바쁘게 보낼 것이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더 많은 것을 배우며 살다보면 나도 이 사회에서 쓸모있는 사람이 될 것이란 확신이 있다.

미래를 고민하며....

대학을 졸업하고 나면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 고민을 요새 많이 하게 된다. 이 땅에 온 이상 잘 정착하여 보람되고 당당하게 살아가고 싶은데, 그러기 위해 무슨 직업을 갖고 어떤 분야로 진출해야 할지 생각하게 된다. 물론 내 주위의 학교 친구들도 젊은이들의 그만그만한 고민들이 많다. 출세하고 싶어하는 친구, 돈을 많이 벌고 싶어하는 친구, 좋은 직장에 취직하고 싶어하는 친구.... 나름대로 자신만의 소중한 꿈을 꾸며 뜻대로 되지 않을 때, 현실의 벽에 부딪힐 때 힘들어 한다. 모두들 건전한 자기시련을 겪으며 조금씩 성장해 가는 모습이 보기 좋다. 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난 아직 확실한 내 미래의 청사진을 세우지도 못했다. 아직 이 사회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좋게 이야기 하자면 나의 신중한 성격 탓일지도 모르겠다. 내 전공에 대해 좀더 공부해 보고 사회경험을 더 해보고 난 후에 결정하고 싶다. 아직은 내가 너무 어린 것 같다. 나이가 아닌 이 사회의 책임있는 사회인으로서 말이다. 그래서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루하루를 힘차게 열심히 사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언제나 힘이 되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열심히 사는 모습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2003년 2월 김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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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벽빛 2007-04-01 12:55:19
    훌륭하세요. 님의 글을 보고 많이 힘을 얻어 돌아갑니다. 나이에 지지 마시고 말씀만큼 이 사회의 멋지고 책임있는 사회인으로 당당히 살아가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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