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 중국 내 탈북자들의 삶 - 정일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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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북한에서 사는 것 보다 낫다. 2003년 7월호에 이어 두 번 째 글을 싣는다. 정일영 씨는 7월에 중국에 나가 약 70여 명의 탈북자들을 만나고 왔다. 이번에는 지난 4월부터 6월까지 만났던 탈북자들을 다시 만나기도 했고 최근에 나온 탈북자들도 여러 명 만났다. 이 글을 통해 중국 내 탈북자들의 실태뿐만 아니라 최근 북한 주민들의 상황까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정일영 씨와의 인터뷰 내용을 정리했다. 1. 북경에서 만난 인민군 6군단 연대통신참모(대위) 이번에 중국에 들어 간 건 7월, 처음 들어간 곳이 북경이다. 북경에서 탈북자 세 사람을 만났는데 가짜 주민등록증을 만들어 생활하고 있었다. 이들 중에 하나는 인민군 6군단(청진에 있다) 연대통신참모였다. 이 사람에게 군 내부 상황과 한국대사관 진입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중국 여권이 있어도 한국대사관 진입은 상당히 어렵다. - 가족들 생활이 너무 어려워서 식량을 빼돌린 것이 발각돼 지난(2003년) 5-6월 사이에 탈출했다. 탈출 과정에서 중국공안에 걸려 위험하게 돼 공안 2명을 까고 가족을 탈출시키다 가족들과 헤어지게 됐다. 다행히 한국인 사장이 도와줘서 주민등록증과 여권을 위조했다. 그것으로 대사관 진입을 시도해보았으나 한국대사관은 중국 여권이 있다고 해서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초소 두 개를 거쳐야 되는데 말을 못하기 때문에 들어가기가 상당히 어려웠다. 여기에서 말한 한국대사관은 아마도 영사관을 말하는 것 같다(대사관은 못 들어간다. 북경주재 한국대사관은 입구에서 초인종을 눌러 용건을 확인 후에 10여 미터 되는 오솔길을 걸어서야 도달할 수 있음). 영사관에 중국 여권을 가지고는 못 들어간다. 중국인이 한국 영사관에 들어가는 경우에는 주로 입국비자를 얻고자 함인데, 그러려면 수속을 하고 빨간 비표를 받아야 한다. 여권과 비표가 함께 있어야 들어갈 수 있다. 아무리 중국말을 잘한다 해도 비표가 없으면 안 된다. 군 내부의 부패가 더욱 심해졌다. - 이전보다 차이점은 군 내부에서도 경제적 고통이 너무 심하기 때문에 부패한 짓을 엄청나게 하고 있다. 간단한 실례로 훈련 도중에 농촌에 있는 밭이나 탈곡장을 습격하다 걸리면 이전 같으면 처벌도 되겠는데 지금은 군관(장교)들이 눈감아 줘서 서로 나누어 먹는다. 2. 중국 정부의 탈북자 단속 실태 - 심양에 들어가 보니까 이전하고 다른 점은 탈북자가 신고되지 않는 한은 의도적인 검거는 없고 북한으로의 강제 송환도 이전처럼 대폭적으로 하는 사례가 많이 줄었다. 그러나 연길, 용정, 화룡, 도문 쪽으로 가니까 나갈 때는 검사가 없었는데 돌아오면서 보니 열차 검문이 상당히 심했다. 두만강을 건넌 탈북자들이 중국 내륙으로 들어오자면 열차 이용은 매우 힘들다. 그래서 대부분 도보를 많이 한다. 3. 탈북자들의 생활 심양 서탑 상황 - 심양 서탑쪽에 탈북자들이 많았다. 서탑에서는 많은 탈북 여성들이 동거생활로 피신하고 있었다. 주로 중국인 사장들인데 작은 음식점을 경영하는 사장이라도 그런데 붙어 가지고 하루하루 연명하고 있었다. 중국인 사장들이 탈북 여성들을 데리고 있는 것은 인건비가 싸고 또 돈을 안 줘도 되는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 사장들 중에도 탈북자들을 도와주고 싶어하는 사람은 있었지만 걸리면 법적 제재를 받는다는 걸 아니까 쉽게 나서지 못했다. 이렇게라도 하루하루 살아가야 하는 그들의 모습이 상당히 마음이 아팠다. 대부분 여자들은 식당업이던가 아니면 역전 같은데 나가 민박집에 손님을 채워주고 밥이나 얻어먹는 정도로 지낸다. 그런데 20대는 좀 괜찮은데 30-40대 여자들은 더 처참하다. 20대들은 그래도 일자리 찾기가 쉬운데 나이든 여자들은 어렵다. 나이든 여인들 중에는 걸식하는 사람도 있었다. 주변사람들과 경찰도 어느 정도 알고 있는데 잡아가지는 않았다. 연변 일대 상황 - 연변쪽과 송강, 무송 쪽을 돌아보니 보통 20대 북한 아가씨들이 애 두 셋이 있는 40-50대 중국의 홀아비하고 사는데 농촌에 가서 정말로 상상을 초월하기 힘들게 어렵게 살고 있었다. 지금 한국이나 어디를 가봐도 20대라고 하면 한참 멋도 부리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겠는데, 어떤 여자는 몸이 만삭이 되어 가지고 농사일을 하고 있고 고된 노동으로 손도 말이 아니었다. "그래도 북한에서보다 사는 게 낫다"고 하는데...... 그 여자들은 한국을 유일한 희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 연길에 나가보니 웬만한 노래방이나 술집에는 거의 북한 여자들이 없는 곳이 없었다. 그들은 술집에서 성노리개로 있으면서도 월급도 없이 연변사투리의 수모를 받아가면서 살고 있었다. 딸 같은 애들이 천대를 받으며 사는 것을 볼 때 처음에는 무척 가슴이 아팠으나 많이 만나다 보니 마지막에는 동정이 분노로 변하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그 여자들한테는 아무 죄도 없었지만 막 귀쌈이라도 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서 그들한테 말했다. "가자,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것 같으면 나하고 함께 가자." 그래서 그런 애들 10여 명을 심양에 있는 한 조선족 마을에 데려다 놓았다. 한국 돈으로 한 달에 한 10만원 정도(집 하나에)하는 집 두 채를 월세로 잡아줬지만 그들한테는 그 외에도 많은 도움이 필요한데 크게 도움을 주지 못해 마음이 아팠다. 빠른 기간 내에 데리고 오지 않으면 그들의 처지도 매우 어려울 것이다. 4. 지난 1월 중국 산둥(山東)성 옌타이(煙臺)항에서 붙잡힌 58명의 탈북자들 비밀리에 강제북송 - 지난 1월에 배타고 넘어오려고 했던 이들 모두가 다 송환됐다.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확인이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이 한 번에 잡혔다는 것도 비극이지만 이 사람들 모두가 한국에 오기를 바랬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북한에 끌려가게 되면 엄청난 희생을 당해야 한다는 것이 제일 큰 비극이다. 실제로 그 들 80명(당시 배를 타기 위해 모인 탈북자 숫자가 80명 정도 되지만 실제 잡힌 사람은 58명이다)이 중국 단동으로 끌려가 북한으로 넘어가는 것을 본 사람을 만났는데 "처음에 30명이 끌려갔고 나중에 나머지 사람들도 강제 송환되었는데 6월 달까지 다 넘어 갔다. 그런데 중국정부는 이 일을 아주 극비리에 처리했다. 아직 중국은 탈북자 문제에 대해서는 민감하기 때문에 국제사회 여론도 있고 하니까 그걸 피하기 위해 비밀리에 치밀하게 북송을 했다"고 한다. 보트피플의 신호라며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킨 해상 탈북 사건은 중국에 머물던 탈북자 80여 명이 2003년 1월 18일 한국과 일본, 유럽의 탈북자 지원 비정부기구(NGO)들의 도움을 받아 중국 산둥(山東)성 옌타이(煙臺) 항에서 두 척의 보트로 한국과 일본으로 밀항하려다가 사전에 중국 공안에 발각돼 58명이 체포된 사건을 말한다. 이들의 북한송환 여부는 계속 논란이 되어 왔다. 사건 연루자 중 한 탈북자는 "1월 18일 옌타이에서 붙들려 변방대로 갔다가 1월 25일 19명이 버스 3대에 나눠타고 단둥을 거쳐 북송됐다"며 "나를 포함해 4명은 신의주 국가안전보위부에 한 달, 무산 보위부에 두 달씩 갇혀있다가 지난 3일 풀려났다"는 주장이 한 선교단체에 의해 발표된 적이 있었다. 올해 4월에는 이들 중 30명이 1월 25-30일 사이에 북송됐다는 일본 도쿄신문의 보도가 나와 한국 외교부는 "우리측 요청에 대해 중국 외교 측은 9일 유관 기관에 확인한 후 일본 언론이 보도한 것과 같은 일은 없었다고 공식 확인해 왔다"며 사실과 다르다는 입장 표명을 한 적이 있다. 그 이후에도 이들의 북송 문제는 계속 논란이 되어왔다. 우연한 기회에 옌타이 항 사건에 연루된 탈북자들을 만나본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이 사람의 말에 의하면 "탈북자들이 전부 다 송환된 건 아니고 중국인으로 행세했던(중국 호구를 갖고 있었던)두 명은 풀려났다"고 했다. 형식상으로는 조선인 모두가 송환된 것이다. "그 사건에 연루되었던 2명의 조선사람을 만난 적이 있는데, 국제열차로 송환(버스 몇 대에 실려갔다고 한 것 같은데 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되었다는 말은 처음 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처음에 실려갔던 사람들은(1월25-30일 사이에 북송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 같은데 19명이라는 설과 30명이라는 설이 있다) 보위부 조사를 받은 후에 대부분 풀려난 것 같다고 했다. 다른 지역은 모르지만 무산 출신 사람을 만났는데, "무산 출신으로 거기에 속해있던 사람들은 40여 일간의 조사기간동안 엉덩이가 문드러질 정도로 고생을 하긴 했지만 모두 풀려나 집으로 돌아갔다." 또 이 무산 사람에게서 "무산군 보위부에 있는 기간동안 심양 영사관에 뛰어들다가 잡혀서 송환된 모녀가 있었는데 그들은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갔다. 그런데 그들보다 죄가 중한 자신이 풀려나니, 석방이라는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 정치범수용소에 갈 대상들은 정면, 후면, 측면의 상반신 사진을 찍어두는데 무산 사람도 그 사진을 찍었는데도 풀어줬다."는 말도 들었다고 했다. 5. 탈북한 지 15일 된 함경남도 이원 사람 이야기 칡뿌리조차 구경할 수 없다. - 원래 함남 이원이나 단천, 허천, 홍원일대 바닷가에 이전에는 미역 같은 것이 밀려나오는 것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것을 구경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새벽부터 바닷가에 나가서 숱한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미역 같은 것이 파도에 밀려나오면 서로 싸움하다시피 하여 그걸 주어다가 강냉이 가루 같은 걸 100그램 정도 넣고 범벅을 만들어서 여러 식구가 연명을 한다. 또 산에 가면 토끼나 짐승이 먹는 풀은 사람도 먹어도 되지 않느냐는 인식을 가져 그런 풀들을 뜯어다 먹는다. 그래도 옛날에는 함경도 산골이라 하면 산채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지금은 칡뿌리조차 전혀 구경할 수 없다. 나오는 데로 다 뽑아 먹기 때문이다. 당 간부(낮은 직위)들도 입쌀(쌀)이라는 개념이 없어진지 오래다. - 쌀값은 작년도부터 100원에서 60원이 인상되어서 160원 정도(이원일대) 됐다. 그러나 이것도 사먹을 수가 없다. 임금은 올려놨지만 아직 한번도 타보지 못한 사람이 부지기수다. 군이나 당 간부들이나 학교 선생 정도 되어야 그래도 월급을 받는다. 그 외 사람들은 "주면 주는가보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월급을 제대로 타더라도 생활이 곤란하다. 일반적으로 계산하여 보아도 정상적인 월급으로는 입쌀을 6Kg정도(월급을 1000원을 기준으로 산출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 7·1경제개혁조치 이후 월급을 대개 1500-2000원을 받는다고 한다) 밖에 살 수 없다. 그런데 쌀 6Kg 가지고 일가족 4명-5명이 한 달을 살아야 하는데 될 수 있는가. 어림도 없다. 이전에는 그래도 당 간부정도 되면 어느 정도 괜찮게 살았는데 이젠 상당히 어렵다. 이들에게도 입쌀이라는 개념은 이미 없어진지 오래다. 그러니 일반 인민들이야 더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함경남도 단천시(4월 20일경) 입쌀 가격이 180원(킬로그램), 함경북도 청진시는 비슷한 시기에 250원(킬로그램), 함경북도 어랑군은(5월 10일경) 250원(킬로그램), 함경북도 무산군은(5월 15일경) 220원(킬로그램)이라는 증언과 현재 북한의 물가 상승률를 생각해 볼 때 이원일대의 입쌀 가격은 더 높을 것으로 보인다. 6. 중국 보따리 장사들은 식량은 마음대로 가지고 들어 갈 수 있다. - 지금 중국 쪽에서 보따리 상인들이 많이 들어간다. 그 사람들이 예전에는 수산물을 많이 가지고 나왔는데 지금은 북한에서 가지고 나올 것이 없으니까 중국에서 입던 옷가지들 아니면 쌀, 강냉이 이런 것을 가지고 들어간다. 식량은 마음대로 가지고 들어갈 수 있다. 옛날에는 보따리 장사들 단속이 심했는데 지금은 쌀 같은 것은 100Kg 이상도 가지고 들어갈 수 있게 허용했고 세관에 뇌물만 주면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다. 그래서 지금 함경남북도, 양강도, 평안북도 일대 국경을 낀 곳은 아주 잘 사는 것으로 소문나 있다. 금년에 변한 것은 열차 값dl 엄청나게 올랐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전엔 통행증 제도 때문에 다니기도 힘들었는데 지금은 뇌물만 주면 어디든지 갈 수 있다. 기차는 지난 1월부터 좌석번호제라는 것이 실시되고 요금이 엄청나게 올라서 한동안 열차칸이 조용했다는데 최근에는 다시 기차 승강대에 발을 올릴 수 없을 정도로 타기가 힘들다고 한다. 통행증은 음성적으로 사고 파는 데 승인번호가 붙은 지역의 통행증은 600원, 일반 지역의 통행증은 300원에 암시장에서 거래된다고 한다. 지금은 더 올랐을 것으로 추정. 7. 굶어죽는 사람은 없다고 하는데 위병으로 죽는 사람들이 있다. - 지금 북한 상황은 여기서는 보릿고개라고 얘기하는데 그것보다 더 어려운 상황이다. 굶어 죽는 건 아직까지는 크게 나오지는 않는다고 하는데 위병 걸려서 죽는 사람들은 있다고 한다. 그런데 내(정일영 씨) 생각으론 위병이라고 하는 것이 먹지 못해서, 쌀 아닌 다른 것을 먹었기 때문에 오는 것이기 때문에 굶어죽은 것으로 봐야하지 않나 생각한다. 특히 노인들이 견디질 못하고 애들도 영양실조에 걸린 애들이 많다. 그리고 정확한지는 모르겠는데 몇 사람의 얘기를 들어보면 2살-3살까지 걷는 애들이 없다고 한다. 여기는 돌만 지나면 애들이 걸음마를 떼는데 이북은 그게 안 된다. 영양이 딸리니까. 그런데 이북 사람들은 이것을 영양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주변이 다 그러니까. 8.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바에는 이판사판으로 전쟁이나 일어나라. - 최근에 넘어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모두 전쟁을 바란다. 전쟁을 바라는 이유는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바에는 이판사판이라는 것이다. 정치에 대해 좀 알고 있는 사람들은 "김정일은 절대로 전쟁을 바라지 않는다. 그가 왜 전쟁을 바라겠는가. 인민들이야 어떻게 되든 그 한 사람한테는 지상낙원인데 그런 그가 그걸 버리자고 전쟁을 하겠는가. 그는 절대로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이제는 당 간부 내에서도 많이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김정일이 전쟁소리를 자꾸 하는 것은 체제를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에 인민들의 생각을 그쪽으로 돌리려고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인지 실지 전쟁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바에는 전쟁이나 터져 빨리 현 상황이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9. 대의원 선거로 인해 대사면 내림 - 요즘 대의원 선거로 인해서 대사면, 그러니까 당에서 혜택을 준다고 한다. 대상에는 탈북자들도 있는데 외국인을 만나지 않았거나 종교인을 만나지 않은 사람, 단지 순수하게 배가 고파 중국으로 갔다가 잡힌 사람, 월경하다가 잡힌 사람, 이런 사람들을 한 3만에서 5만 정도, 그러니까 일반 수용분류로 돼 있던 사람들을 관대히 용서해서 풀어준다고 한다. 일반 경제사범도 석방을 하고. 그렇게 해서 상당히 반응이 좋다고 한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묻힌 사람들에 대한 사면은 전혀 없다. 10. 국경상황 - 국경 경비는 이전에는 국경경비대만 하였는데 지금은 철도안전부 산하의 철도경비대까지 투입하여 경비인원수를 부쩍 늘려 놓았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넘어 가는 걸 막는 건 어렵다. 경비대원들도 워낙 생활형편이 어렵다 보니 돈만 쥐어주면 그냥 넘어갈 수 있다. 군대 보급이 잘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장교가 사병을 끼고 탈북자들의 뇌물을 받아서 나눠 먹기까지 한다. 이렇게 국경경비대가 부패했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두지 않고 수시로 교대시킨다. 반대로 중국 경비는 두만강 쪽이 좀 심하다. 탈북자들로 인해 자꾸 국제여론이 나빠지니까 아예 넘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 같다. 그런데 중국 경비가 탈북자를 잡을 경우 돈이 안 생길 것 같으면 쫓아 보내지만 돈을 끌어올 수 있을 것 같은 탈북자들은 파출소 등에 넘기지 않고 자기네가 인질로 잡았다가 돈을 뜯어먹고는 그냥 풀어준다. 동화신문 8월27일자 기사를 보면 "중국에 있는 탈북단체들과 중국 공안들에 따르면 기존에 북중국경지역을 담당하던 중국해방군 변방부대가 순찰업무를 진행할 뿐만 아니라 심양야전군 소속 선발대 2천여 명이 추가로 이미 연변에 도착해 국경지대를 수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고 한다. 야전군은 "기존의 변방대와는 달리 국경지대에 전면 배치돼 순찰, 야간잠복, 감시 등 탈북 사태를 방지하기 위한 업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보인다. 야전군은 "북한의 국경경비대와 유사한 탈북감시체계를 마련하는 등 탈북자 검거를 위해 북한과 중국이 공동보조를 맞추는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이런 상황을 종합해 봤을 때 중국 정부는 탈북사태를 원천봉쇄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 야전군이 전면 배치되면서 그전에는 체포된 탈북자들은 중국 변방구류소에서 심사를 마치고 북한으로 보내졌는데 지금은 월경지역에서 체포되면 곧바로 북측에 인도된다고 한다. 11. 요즘에도 식량 때문에 탈북을 하는가. - 그렇다. 이들은 대부분 가족을 두고 나온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어느 정도 돈이나 쌀 같은 것이 준비되면 다시 넘어간다. 그런데 넘어 갈 때는 이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가족을 데리고 다시 넘어 오는 사람, 다른 하나는 가족을 생각하여 식량을 구해 온 걸로 만족하는 경우이다. 주로 이들은 친척, 형제들이 많은 사람들로 뒤에 남는 가족들이 위험할까봐 탈출 생각을 못하고 있다. 탈북해서 중국과 한국을 알고 자본주의를 알게 된 사람들은 한두 달 정도 일하게 되면서 머리가 변하게 된다. 내가 북한체제에 속혀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판단기간이 몇 달씩 가는 사람도 있지만 시간의 차이일 뿐 십중팔구 생각이 바뀌게 된다. 중국의 화룡이나 용정 등은 아주 산골인데 산골의 조그만 촌 부락에 가도 북한의 간부들의 수준보다 나으니까 거기서 사람들의 머리가 도는 것이다. 그러니까 몇 달 지난 사람들은 다시 들어가라(북한에)고 해도 안 들어간다. 가족을 떼 놓고 온 사람들은 다시 들어가 가족을 데리고 나오려고 한다. 중국을 어느 정도 아는 사람들은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바에는 국경을 넘자고 결심한다. 그러나 넘어서 성공한 사람보다 비극을 겪는 사람이 더 많다. 12. 옷은 탈북자들에게 어떻게 전달하는가. - 옷 지원은 중국 쪽으로 들어가는 사업가들에게 부탁하거나 중국내에 있는(요녕성 같은 경우 한국기업들이 많다) 한국 기업을 알게 되면 부쳐주면 된다. 한국 기업에서 탈북자들을 채용해서 쓰는 곳이 있고 또 탈북자들끼리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옷만 전달되면 서로 연락해서 옷을 갖다 입을 수 있다. 13. 꽃제비들은 어디에 가장 많은가. - 꽃제비는 제일 많은 데가 연변이다. 연길, 화룡, 용정, 도문 쪽으로도 많이 있고. 그런데 잘 잡지는 않는 것 같았다. 8월 지나고 가을이 오고 있는데 곧 서리 내리고 날씨가 추워지면 제일 어려운 게 꽃제비들이다. 걔들은 집이 없기 때문에 금년 겨울에도 얼마나 얼어죽어야 할지....... 오늘도 수많은 북한 동포들은 살아남기 위해 전쟁 같은 하루를 보내고 있다. 2003년 9월 탈북자동지회 회보 "탈북자들"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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