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뉴스

탈북자수기

상세
얼음판을 녹인 땀방울 - 황보영
동지회 22 4100 2004-11-19 20:52:07
"손이라도 부여잡고 수고했다는 말을 해주고 싶었는데...."

2003. 2 동계 아시안게임 첫 남북경기가 열린 일본 아오모리 미사와시 아이스하키 경기장. 60분간의 치열했던 일전을 끝내고 남북 양측 선수단들이 서로 손바닥을 부딪히며 인사를 나누는 순간이었다.

다른 선수들에게는 그냥 통상 하는 의례적인 일이었지만 나에게는 6년만에 만나는 옛친구들과 손과 눈을 마주치며 따듯한 말 한마디라도 건네 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하지만 정작 내게 다가온 것은 애써 나를 외면하며 지나쳐 버리는 동료들의 한결같은 냉랭함 뿐. 모멸감과 서글픔, 어느 정도 예상이야 했다지만 함께 땀흘리고 정을 나누었던 얼음판 위에서조차 나의 애틋한 심정을 받아 들여주지 못하는 옛 친구들에 대한 야속함이 밀려들어 왔다.

"아쉽지만 이해해야지. 그래, 언젠가는 나를 이해해 줄 수 있을거야"

마침내 대한민국 국민이 되다

찬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던 1997년의 겨울 어느 날.
20세의 발랄한 처녀로 어려서부터 운동선수로 활동해 오던 나는 극심한 생활고를 이기지 못하고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무작정 두만강을 넘었다. 중국에 가면 사정이 나아지겠지 했지만 낯선 이국 땅에서 당하는 설움과 고통은 견디기 어려웠다. 결국 한국에 가야만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오기를 품게 되었고 갖은 고생 끝에 그리던 한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하나원 교육을 마치고 손에 주민등록증이 주어졌을 때는 아! 나도 이제는 어엿한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구나하는 벅찬 감동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욱 흘러 내렸다. 그저 평범한 대한민국 국민의 한사람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특권인지 일반인들은 잘 알지 못하지만 우리 탈북자들에게 그것은 사선을 넘나들면서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삶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서울에 정착하고 나서 처음 구한 직장은 와이셔츠 공장으로 어머니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 일이 고되고 출퇴근도 피곤하였지만 통장에 차곡차곡 늘어가는 동그라미를 보면서 힘든 것도 다 잊게 되었다.
비록 월급이 많지는 않았지만 열심히 일한 대가가 고스란히 내 손에주어진다는 생각에 하루하루 보람이 더해갔다.

얼음판 위로 돌아오다

생활이 조금씩 안정될 무렵, 아이스하키에 대한 집념이 조금씩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열두 살 때부터 선수 생활을 시작하여 함경북도를 대표하는 김책제철체육단 대표선수로 활약하던 내가 아니었던가?

운동을 다시 하고 싶다. 내 꿈을 이루고 싶다!

고심하던 끝에 담당 경찰 선생님께 사정 얘기를 하였더니만, 선생님은 흔쾌히 협회를 통해 운동을 시작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셨다. 처음에는 중학교 남학생들과 함께 연습을 하게 되었고 그 와중에 전직 여자 대표팀 코치를 지낸 신 감독님을 만나게 되었다. 알고 보니 한국 여자대표팀은 1999년 강원 동계 아시안게임때 각국에 참패를 당하고 난 뒤 팀이 해체된 상태로 신 감독님은 팀을 재건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중이셨다. 그러한 노력이 결실을 맺어 마침내 나를 포함해 새로이 여자 아이스하키팀이 창단되었고 주말마다 함께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서로들 어색하고 호흡도 맞지 않았지만, 얼음판에서 함께 땀을 흘리는 사이 허물없는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렇게 연습에 열중하던 차에 우리 팀이 2003년 동계 아시안게임에 당당히 여자 국가대표팀으로 출전하게 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고, 우리는 신바람나게 연습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한국에서 인정받고 살려면 자격증은 앞으로 필수라는 생각에 간호학원에 등록해서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다. 공부를 안한지가 오래된 탓에 적응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지만 꾸준히 인내심을 갖고 적응한 결과 공부에 재미를 붙일 수 있었다.
공부와 운동을 병행하며 바쁜 일과를 보내면서도 나 자신의 꿈이 조금씩 영글어 간다는 생각에 힘든지도 피곤한 지도 몰랐다. 그렇게 1년 가까이 준비한 끝에 자격증을 취득했고 곧이어 치과병원에 간호조무사로 취직을 하게 되었다.

아쉬운 만남, 그리고 눈물

동계 아시안게임이 임박한 관계로 평소 자상하게 대해주시며 여러모로 보살펴 주시던 병원 원장님께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본격적인 합숙훈련에 들어갔다. 열흘간 일본 현지훈련도 다녀왔고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 나름대로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갔다.

마침내 대회가 시작되었고 공교롭게도 우리는 북한 선수들과 같은 호텔의 다른 층을 사용하게 되었다. 선수들 명단을 살펴보니 북한에서 한솥밥을 먹으며 운동했던 친한 동료, 후배들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설레임 반, 두려움 반으로 혹시나 하고 호텔 로비를 서성대기도 하였지만 그들은 나를 쉽게 알아차리지 못했다. 염색한 긴 머리, 귀걸이, 목걸이 등으로 치장한 자유스러운 옷차림,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최초의 탈북자 출신 국가대표 선수라는 이름표 때문에 나는 자연스레 국내외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마침내 사흘만에 북한 선수들도 나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반응은 예상보다도 훨씬 차가왔다. 내 옆을 지나칠 때면 으례 눈을 흘기고 심지어는 "원수"라는 말까지 뱉더니만 "나라를 배신한 자는 인간도 아니니 같이 말하기도 싫다"면서 공공연히 떠들고 다녔다. 그럴 때마다 숙소로 돌아와 문을 잠근 채 서러움에 복받쳐 얼마를 울었는지 모른다.

마침내 최초의 남북 여자 아이스하키 시합이 열렸고, 수비수로 출전한 나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기량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0:10으로 대패하고 말았다. 경기 전에 친한 후배이던 북한 선수로부터 경기때 보자며 은근히 협박을 받기도 했고 실제 경기 내내 집중적인 견제와 몸싸움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다행히 살아 남았다. 경기가 끝나고 선수들끼리 악수를 하며 인사를 나누는데 북한 선수들은 내 앞에만 오면 한결같이 손을 내리고 외면해 버리는 것이었다. 그만 그자리에 주저앉아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 돌아서서 실컷 욕이라도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미움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오히려 측은함과 안타까움이 더했다.

그래, 이해한다. 어쩔수 없다. 당연히 교육을 그렇게 받았으니까. 하지만 나는 너희들이 더 불쌍해. 언젠가는 너희들도 나처럼 자유롭게 운동할 날이 꼭 올거야.

새로운 도전

나는 이제 다시 펑범한 일상으로 돌아와 있다. 비록 일본에서는 정겹게 얘기조차 나누지 못했던 친구들이지만 꿈에서는 함께 운동하면서 땀 흘리고, 재미있는 얘기로 같이 웃고, 맛있는 거 나눠 먹는 꿈을 꾸곤 한다.

언젠가는 서로에 대한 오해와 미움을 씻고 다함께 정겹게 살아갈 수 있는 날이 꼭 오리라! 그날이 어서 오기만을 간절히 소망할 따름이다.

내년 3월로 다가온 세계 선수권대회에서는 또다시 북한팀을 만나더라도 지난번과 같은 참패는 면하기 위해 요즘도 부지런히 땀방울로 꽁꽁 언 얼음판을 녹이고 있다. 그리고 대학 진학도 생각하고 있는데 내년에 학교에 들어가게 되면 공부도 열심히 하고 틈틈이 지도자 자격증도 준비할 생각이다. 선수생활을 마치고 나면 지도자의 길을 걸으며 한국 아이스하키 발전에 조금이나마 힘을 보탤까 한다.

나는 결코 외롭지 않다. 하루하루 내 꿈을 향해 조금씩 가꾸어 가는 시간들이 내게는 너무도 소중한 친구이기 때문이다. 이제껏 나를 위해 고생하신 어머니, 그리고 지금의 안정을 찾기까지 물심양면 도와주신 주위 분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내게 주어진 시간들을 후회없이 가꾸어 갈테다.

오늘도 열심히 흘린 땀방울로 얼음판을 녹이고 있다.

2003.9 황보 영 씀
좋아하는 회원 : 22

좋아요
신고 0  게시물신고
  • 바람 2005-05-22 00:18:43
    늦게 이 글을 보게 되었군요. 신문에서 기사를 보았는데..
    경기장에서의 기분을 글을 읽는 동안에 깊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아무튼 좋은 생활하시고,, 꿈을 이루시기를 기원합니다.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댓글입력
    
이전글
추적, 중국 내 탈북자들의 삶 - 정일영
다음글
예술로 승화한 통일의 꿈 - 김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