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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로 승화한 통일의 꿈 - 김수정
동지회 20 3990 2004-11-19 20:52:27
鄕 愁

마을 앞에는 푸르른 강이 넓게 펼쳐 흐르고 뒷동산에는 이깔나무 숲이 우거져 마치 한폭의 그림처럼 아스라이 다가오는 아름다운 곳!

나의 고향은 김정일의 생모 김정숙의 고향이자 혁명 전적지로 유명한 함경북도 회령이다. 회령하면 북한 사람 누구나 쉽게 떠올리는 것이 주먹크기 만한 새콤달콤한 백살구와 김정숙의 고향이라 해서 동화에나 나옴직한 아담한 문화주택들이 잘 정돈되어 있는 시가지로, 해마다 전국의 모범적인 청소년 학생들과 근로자들, 군인들의 답사여정으로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일찌기 그런 고향을 떠나 이산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리라 생각이나 했었겠는가?

아버지로부터 예술적 재능을 물려받은 덕분에 어려서부터 남보다 가창력이 높아 아무 장소에서나 거침없이 노래를 부르곤 했다. 내가 4살 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남겨진 우리 6형제를 갖은 고생 끝에 홀로 키우셨다. 극심한 가난과 굶주림 속에서도 어머니는 나의 예술적 재능을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 다니셨다. 없는 집안에서 예술 한답시고 평양이니 지방이니 돌아 다니다 보니 뒷바라지 하시는 어머니의 고생이야 일러 무엇하랴? 지금도 고생으로 늙으신 어머니의 얼굴이 손에 잡힐 듯 하다.

고향이란 말은 누구에게나 애절하고 아련함으로 다가가기 마련이다.
우리 탈북자에게 있어 고향의 그리움이란 그 누구에 있어 비길 바 아니다. 특히 추석같은 명절이라도 되면 고향 땅과 어머니에 대한 간절한 생각으로 하루종일 울적한 채 눈시울을 붉히곤 한다. 어머니가 차려주시는 음식을 한숟가락이라도 먹어 보았으면 하는 애틋한 소원을 안고 어제나 저제나 편히 잠을 이루지 못한다.

다시 찾은 인생

우여곡절 끝에 한국 땅을 밟게 되었고, 어렵사리 한국사회에 첫발을 내딛었을 때는 모든 게 막막하기만 했다. 처음에 올 때만 해도 그래도 같은 민족, 같은 언어와 풍습을 누리고 살아 온 조건인 만큼 무엇이든 쉽게 적응하고 다 잘 될 것 같은 기대감도 있었지만 현실은 훨씬 냉정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외로운 처지로 남쪽 땅에서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30대 중반의 여자 나이로 남은 일생을 독신으로 헤쳐 나가기가 쉽지 않다는 판단에 비슷한 처지의 탈북자를 만나 새로운 가정을 꾸리게 되었다. 하지만 남편과의 불화 등으로 결혼생활은 순탄하지 못했고, 아직 젊은 나이에 가정이라는 굴레에 갖혀 그런식으로 시간을 소모한다는 것이 견디기 어려웠다.

어떻게 찾은 제2의 인생이던가?
궁리하던 끝에 북에 있을 때부터 전문적으로 해 온 길을 다시 가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라는 생각에 나는 조심스레 예술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용기를 내어 나의 예술적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물색하였고, 다행히 주변 분들의 도움을 받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동네에서 노인들을 모아 놓고 건강상품 등을 홍보하는 곳에서 노래와 사회를 맡아 일했다. 때로는 부끄러움도 당하고 어려움도 많았지만, 그럴때마다 사선을 넘어 한국 땅을 밟기까지의 고된 역경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고 견디어 냈다. 그러다보니 점차 입소문을 타고 나름대로 인기를 얻어 여기 저기 행사에 불려다니게 되었다. 출연료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동안 잊고 지내던 삶의 보람과 열정을 되찾으면서 내가 좋아하는 일에 몰두할 수 있어 좋았다.

여기 저기 바쁘게 발품을 팔며 활동을 하다보니 몇 달이 지나서는 뜻을 같이 하는 탈북 예술인들을 모아 예술단을 만들 수 있었다. 예술단의 명칭은 갈라진 조국의 하나됨을 바라는 뜻에서「하나예술단」으로 정했다. 비록 열 명의 적은 인원으로 구성되었지만 우리 단원들의 열정만큼은 수백 명의 큰 단체 부럽지 않았다. 하지만 의욕만으로 모든 것이 다 해결되지는 않았다. 단원 하나하나 성격을 맞춰 가며 일정을 관리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고, 그럴 때마다 그만 둘 생각도 여러 번 했다.

이런 저런 마음고생으로 두달여를 보내고 나자 어느정도 예술단의 틀이 잡혀갔고 본격적으로 공연활동도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홍보가 덜 된 탓에 일거리가 많지 않아 각 지역 구청을 찾아다니며 간청도 해 보고, 교회나 복지관에서 무료공연도 벌이면서 우리 활동을 알려 나갔다. 직접 발로 뛴 노력의 결실로 홍보가 많이 되어 지금은 어디서든 찾아주면 바로 달려가 공연을 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각종 행사때 우리가 들려주는 연주와 노래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위안을 얻고 흥을 돋우는 모습을 보면 피곤도 싹 사라진다.

아직까지는 수입이 많지 않아 단원들 중 직업이 없는 사람들은 경제적인 어려움도 적지 않지만 모두들 예술이라는 한가지 목표를 향해 헌신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도 뜻을 같이 하는 사람끼리 열심히 노력하기만 하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금 확인하게 되었다.

예술은 언제나 나의 친구

어렵고 때로는 좌절하고 싶은 여건 속에서도 묵묵히 나를 지켜준 것은 예술이라는 오랜 나의 친구이다. 어머니께서 희생으로 지켜주신 예술의 길, 낯선 남쪽 생활에서 진정한 나를 발견할 수 있게 해 준 예술의 길!

자유의 땅에 안겨 이렇게 적성에 맞는 예술활동을 누릴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내게는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기쁠 때는 기쁜 노래로 사람들과 함께 하고, 명절 때처럼 마음이 울적할 때는 그리운 고향 땅과 사랑하는 어머니를 그리는 노래로 모든 관객들과 함께 슬픔을 달랠 수 있기에 나는 결코 외로운 사람이 아니다.

요사이 우리 예술단의 활동이 각종 신문과 TV를 통해 여러차례 소개된 적이 있지만 앞으로도 넘어야 할 산이 많이 남아있다. 치열하게 경쟁하는 정보화시대 속에서 남들과 발 맞추어 나가자고 하니 아직도 이 사회에 갓 적응한 입장으로서는 여전히 버겁고 부족하기만 하다.

하지만 이제껏 한결같이 걸어 온 예술의 길을 통해 나름대로 많은 결실을 이루었기에 우물을 파도 한우물을 파라는 격언을 되새기며 통일의 그날까지 작은 힘이나마 보탤까 한다. 우리가 벌이고 있는 예술활동 과정이 남과 북의 문화적 차이를 줄이고 북한의 문화와 실상을 널리 알림으로써 통일된 그때에 남과 북이 더 빨리, 더 가까이 다가서는 데 기여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날을 위해 나의 모든 힘과 정열을 바쳐 밤낮없이 열심히 뛰고 또 뛰련다.

2003. 9. 김수정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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