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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遺稿) 2-꿈으로 보이는 7년
동지회 26 4771 2004-11-19 20:59:45
유고(遺稿)

꿈으로 보이는 7년

남광수

2. 운명을 건 도박(1998. 12 ~ 2000. 1)

생활은 결심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욕망이 아무리 커도 방도가 서지 않으면 망상으로 되는 법이다. 나의 경우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1999년 설날이 다가오고 있었으나 나에게는 부모님들과 나 자신은 물론 동무들에게도 기쁘게 해줄 능력이 없었다. 이러한 일로 모대기던 어느 날인가 나의 동무가 저녁 무렵에 나를 찾아왔다. 이름은 리주혁, 나이 또래, 학교 때부터 가깝게 지내던 딱친구로 직물공장 사로청 위원장이었다. 나보다 사회 물도 많이 먹고 장사 물정에도 밝은 그가 그날만은 안 좋은 표정으로 찾아왔다. 장가도 가고 아이도 있는 몸이어서 웬만히 문제되는 일에는 손도 대지 않는 조심스러운 친구였다. 때 없이 찾아와 술을 마시자고 하는 것을 보니 무슨 일이 있은 듯싶어 내가 그에게 물어 보았다.
“주혁아. 왜 그렇게 주접이 들어 그러니?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냐? 말해 봐라.” “광수야! 내 속 타는 일이 있다. 그래서 오늘 내 너하고 좀 토론해 보자고 그런다.” 그의 말이 자기 사촌여동생한테 처녀가 2명 찾아와서 살기 바쁘기에 자기들을 중국에 보내 달라고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뭘 고민할게 있냐? 보내 주면 되는 거 아니야.” “그런 일이 그렇게 쉽니? 나는 능력도 없다. 그렇다고 나를 믿고 부탁하는 건데 모르는 척 할 수도 없고, 네가 아는데 있으면 좀 도와 달라.”
나도 생각이 많았다. 이런 일을 두고 조선에서는 인신매매 행위라고 하였으며 걸리기만 하면 엄하게 처리되었다. 또한 내가 결심을 내린다고 해도 그렇게 삼엄한 경비대의 눈은 어떻게 피한단 말인가. 그러나 친구도 무겁게 하는 부탁인데 못 들은 척 할 수도 없고 ‘에라 모르겠다. 걸리면 한 번 죽지 두 번 죽으랴’고 생각하며 도와주기로 했다.
하지만 정작 다음날 처녀들을 만나 보니 정말로 아까운 생각이 드는 처녀들이었다. 나이는 모두 스물 한 두 살, 생기기도 이만 저만 이쁘게 생긴 처녀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사정은 이만저만 딱한 것이 아니었다. 부모들은 이미 전에 다 돌아가시고, 자신들도 친척집에 얹혀살았는데 이제는 정말이지 더 살수 없어 중국으로 갈 결심을 했다고 눈물이 글썽하여 말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어 나의 첫 중국행이 시작되었다.
다음날 나는 헌옷에 겨울 신발을 신고 전에 말한 그 진철이라는 아이를 데리고 여자들과 함께 모험의 길에 들어섰다. 물론 떠나기 전에 가다가 일이 잘못되면 어떻게 하라는 당부는 미리 해 두고 말이다. 나에게 있어서 이러한 결심은 큰 용단이라고 아니 말할 수 없다. 일이 잘못되어 잡힐 때에는 그건 더 말할 것도 없이 목이 떨어지는 날이요, 다행히 잘 되어 성공한다면 약간의 돈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운명을 건 도박과 같은 짓이었다. 한마디로 멀쩡한 정신에 도깨비 같은 짓을 하려고 하니 마음이 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여러 모로 생각을 굴리다가, 대낮에 두만강을 넘기로 하였다. 밤보다는 아무래도 낮에 국경경비가 약하기 때문이었다.
12월인데도 강은 아직 얼지 않았다. 우리가 건너려고 하는 곳은 강이 얕아 기껏 배꼽까지 밖에 차지 않는 곳이었다. 11살짜리 진철이가 늘 건너다니던 곳, 국경경비대가 잠복을 하고 있는 복초 바로 앞을 도강지점으로 선택했다. 그곳은 무산읍에서 30리쯤 되는 새골리라는 마을로 중국의 화룡시 류신촌과 마주하고 있는 곳이 된다. 진철이는 바로 그 마을 사람들을 잘 안다고 하여 그 곳을 택했다. 하지만 정작 도강하자고 나서니 어지간히 긴장되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튼 일행을 데리고 도강 지점까지 갔다. 주위를 살펴보니 역시 대낮이라 가까이에는 사람이 없었다. 한 100m 쯤 되는 거리에서 경비대 두 녀석이 다가오고 있었다. 때는 이때라고 생각되었다. “건너자!” 소리를 지르고 일행과 함께 두만강에 들어섰다. 겨울이어서 물은 얼음장 같았으나 찬 줄도 몰랐다. 허겁지겁 뛰어들다가 돌에 걸려 넘어 지고 아무튼 일행이 모두 흠뻑 젖었고 말았다. 뒤늦게 경비대가 우리를 보고 쫓아 왔으나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기였다.
수림 속에 들어가 불을 피우고 옷을 말리었다. 진철이를 마을에 보내고 우리는 그 자리에서 기다리었다. 남의 나라 땅에 들어선 건 분명하지만 기분이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여자들도 무서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어슬어슬할 무렵에 진철이가 소형 또락또르(트랙터)를 타고 우리 있는 곳까지 왔다. 처음 보는 중국 사람이었으나 무서운 생각이 없고, 그냥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나이를 보니 나보다 세 살 아래였다. 나는 그에게 오게 된 사연을 말하고 여자들을 잘 살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우리들은 그를 따라가 그의 집에서 하루 저녁 묵었다. 수고마을 사람들이 찾아와 음식도 권하고 술도 권하였다. 떠나올 때 그 중국 청년이 나에게 중국 돈 500원을 주었다. 수고비라며 준 그 돈 500원을 손에 쥐는 순간 나의 감정이 어떠했던가? 당시 중국 돈 100원은 조선 돈으로 3,000원 정도 하였다. 그러니 500원이면 조선돈 15,000원 되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살면서 나는 아직 그렇게 큰 돈은 손에 쥐어 본 적이 없었다. 이제는 조선으로, 집으로 무사히 돌아가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도중에 경비대에 단속이라도 되면 어떻게 할까? 그래도 아이한테는 단속이 덜 하므로 나는 진철이에게 돈을 주어 감추게 했다. 돌아오는 길은 깊은 야밤, 새벽에 어둠을 이용하여 두만강에 들어섰다. 옷을 벗어 추운데다가, 물은 차고 무섬증까지 더해 몸은 마냥 떨리기만 하였는데 아무튼 그때에 정상을 말이나 글로써는 다 표현하기 어렵다. “하느님아버지 제발 진짜로 계신다면 나를 도와주소서.” 아니 꼭 하느님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아무 것이든 도와줄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라도 붙잡고 빌었을 것이다. 다행히도 우리 두 “빨치산” 대원들은 경비대에 들키지 않고 무사히 집까지 왔다. 집에서 떠나 돌아올 때까지는 3일 걸렸다. 이 기간에 나의 수명은 얼마나 감소되었는지 나로서도 가늠이 가지 않는다. 가져온 돈은 그대로 바꾸었다. 물론 주혁이와 진철이한테도 주고 그래도 많은 부분은 내가 가졌다. 그 돈으로 쌀도 사고 명절 준비도 하고 선물 같은 것은 살 형편이 못 되었지만 아무튼 1999년 설은 그렇게 쇠였다.
이 때부터 나는 중국 사람들을 알게 되었고 그들과 연계를 가지었다. 물론 우리 부모들은 내가 중국으로 넘나드는 것을 몰랐다. 알면 큰일나니까 절대 비밀에 붙여야 했다. “돈은 어디서 벌었냐”고 물으면 누구의 물건을 가져다가 누구에게 팔고 남은 돈이라고 넘겨 버렸었다.
방학이 끝나고 대학에 와서도 중국에 갔던 일은 잊혀지지 않았다. 그래서 ‘또 그런 사람이 없겠는지’ 늘 생각했다. 내가 운수 좋은 놈이었던지 또 일을 생겼다. 청진 사람들인데 중국에 가겠다고 한다. 한 명은 친척을 찾아가는 사람인데 찾아만 주면 중국 돈 500원을 주겠다고 했다. 또 다른 한 명은 31살 된 아주머니였는데 “고난의 행군(90년대 중반 식량난)” 때에 남편을 잃고 더는 살아갈 길이 없어 중국으로 가겠다고 했다.
나는 대학에 어머니가 급히 앓는다고 구실을 붙여 3일간의 시간을 얻어냈다. 말이 3일이지 한 주일은 걸려야 할 일이다. ‘내가 정말 돈에 환장했지’ 아무튼 이렇게 되어 두 번째 중국 행을 하게 되었다. 방법은 역시 같은 방법 그러나 고생을 꽤 하였다. 겨울이라 한 여자는 괜찮은데 한 여자는 여름 신발을 신었기 때문에 발이 얼어 도저히 걷지 못하였다. 할 수 없이 내 신발을 벗어 아주머니한테 신기고 나는 맨발로 십리 가까운 눈길을 걸었다. 중국 집까지 갔을 때 내 발도 이미 어찌나 얼었는지 물집 투성이었다. 그걸 보고 젊은 아주머니는 울었다. 그러나 나는 괜찮으니 걱정말라고 하는데 중국 사람들 나보고 도깨비라고 하였다. 또 그 사람과 부탁해 친척을 찾아 주고 아줌마는 보내고 두 번째는 700원을 얻을 수 있었다. 돌아올 때도 역시 “빨치산”을 하여 들키지 않고 생쥐처럼 빠져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모두 하늘이 도와 준 것이다. 돈은 조선 돈으로 바꾸어 집에다 절반 내 놓고 나머지는 내가 가졌다. 발이 얼고 치료받는 동안 시간이 걸려 한 주일만에 대학에 돌아갔는데 물론 비판도 받고 욕도 배가 터지도록 먹었다.
이렇게 중국에 다니던 나에게 변화가 생겼다. 중국에 있는 동안 처음으로 중국 텔레비전을 통해 세상 돌아가는 것도 알게되고 한국 영화까지 보았다. 선전만 믿다가 진실을 대하고 보니 내가 이제껏 속아서 살아왔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한다 해도 무슨 도리가 있는가? 아직도 세상을 다 알자면 멀었다. 내가 아는 것은 너무나도 적었다. ‘이제는 공부나 알심 있게 하여 내가 바라고 부모들이 원하는 대로 꼭 사회에 필요한 사람이 되자’고 생각하였다.
이제 나도 대학 3학년생이 되었다. 고생을 2년만 더하면 대학을 졸업하고 내가 바라던 소망도 이루어 질 것이다. 그러나 그 2년을 또 어떻게 참지? 사람이 돈맛을 들이면 떼기 바쁘다(힘들다). 돈은 버는 재미도 있지만 쓰는 재미는 더욱 있는 것이 아닌가.
세 번째 중국 행은 여름철이었다. 앞에서 말한 내 동무 리주혁이 또 참견하였다. 이번에는 스물 한 살 처녀가 3명이나 된단다. “너는 어디서 그런 사람들을 자꾸 데려오니? 재간도 좋다. 그런데 너 정말 계획적으로 나쁜 짓 하는 거 아니냐. 정말 그렇다면 너나 나나 망하고 만다. 그만 두겠다.” “아니야. 내 사촌동생이 역전에서 음식 장사를 하는데 꽃제비(거지)아이들이 먹을 것을 빈다는 거야. 그래서 불쌍해서 가끔씩은 먹을 것을 주는데 그 처녀들 셋 에게 먹을 것을 주니, 너무 감사하다고 하며, 자기들은 중국에 가야겠는데 아주머니가 좀 도와 줄 수 없는가 하더라.”
그 친구 말이었다. 조선에서 꽃제비라고 하면 집도 없고 부모도 없고 그 누구도 돌봐줄 사람이 없어 역전 대합실이나 한지에서 빌어먹으며 사는 사람들을 말한다. 주혁이의 말을 듣고보니 심장이 후두두 뛰는 것 같았다. 세 명의 처녀가 모두 인물이나 몸매나 너무나도 아까웠는데 이런 처녀들을 중국으로 보낸다니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그것은 머릿속에서나 돌아가는 생각일 뿐 나한테는 그들을 도와줄 아무 힘도 없었다. 오히려 그 처녀애들을 그냥 놔둔다면 이 무지막지한 세상에서 짓밟힐대로 짓밟히고 나중에는 결국 피어도 보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 것이 아닌가. 지금은 싱싱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곧 시들어 버릴 것이다. 에라 모르겠다. 나도 책임지지 못할 바에는 너희들도 가자고 하는데 실컷 가서 제발 잘 살아라. 아무튼 살게 되면 또 만나게 되겠지. 아무튼 그날 기분은 영 말이 아니었다.
그날 처녀들은 조선 땅에서의 마지막 밤이라고 하면서 자기들의 수중에 있던 돈을 다 털고, 입을 수 있는 옷가지들까지 팔아 술과 음식을 마련하였다. 최후의 만찬이라 할까? 어쨌든 아직은 길을 떠나지 않았으니 가다가 죽더라도 먹고 죽자는 심사였는지 모른다. 우리는 주혁이와 헤어져 다음날 위험이 도사리는 도강 길에 올랐다. 그날따라 비가 왔다. 우리는 비를 긋지 않고(피하지 않고) 30리를 꼬박 걸었다. 비가 오면 강물이 불어난다. 두만강을 건너는 것은 혼자 몸으로는 별일이 아니지만 일행이 있고 그나마 세 명의 연약한 처녀들이고 보면 사정은 달라진다. 물이 불어나기 전에 강을 건너야 한다. ‘비가 오니 그나마 경비대 녀석들이 다 숨어버릴 것이 아니겠는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빨리 가야 한다. 나는 우리가 늘 건너다니던 곳과는 달리 강폭이 좀 넓은 곳을 선택하였다. 그곳은 강폭이 좁고 물은 얇지만 물살이 세찼다. 벌써 강물은 흙탕물로 변하고 물도 세차게 요동쳤다. 이런 때는 좀 더 돌아 둑이 넓고 물살이 잔잔한 곳을 택해야 한다 생각이 들었다. 100m쯤 더 올라가니 마침한 곳(적당한 곳)이 보이었다. 나는 지형과 주위를 살펴 본 다음 일행을 데리고 강에 들어섰다. 내가 제일 위에 서고 그 뒤를 따라 세 명이 손을 잡고 강을 건넜다. 물이 가슴까지 쳤다. 처녀들은 공포에 질려 어쩔줄을 몰라했다. 나도 어지간히 긴장했지만 이 때에 내 표정이 달라지면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우정 자신감에 넘치는 척 조그만 참자. 5m만 전진하면 물은 얕아진다. 힘을 내서 내 손을 꽉 잡고 건너자. 이렇게 우리는 두만강을 무사히 건너 목적하는 집에 도착했다.
정말이지 대낮에 비를 맞으며 걸었는데 근 10리나 되는 큰길가에 개미 한 마리 얼씬하지 않았다. 내가 시간 타산을 잘한 것인가? 혹은 또 하늘이 우릴 도운 것인가. 분명 하늘이 우리를 도운 것이다. 목적지 집에 도착하고야 겨우 숨이 나가고 성공했다는 기쁨의 웃음이 나왔다. 중국 사람이 처녀들을 안전한 곳까지 데려다 준 다음 나에게 자기는 이제 화룡시내에 가겠는데 곧 돌아가겠는가 물었다. 문득 시내 구경을 하고 싶은 생각이 났다. 그리고 시내에 살고 있는 친척도 찾고 싶었다. 나는 그에게서 돈을 1,000원을 가진 다음 그와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화룡시내에까지 들어갔다. 물론 옷은 중국옷으로 갈아입고 말이다. 시내에 들어와 중국 사람의 도움으로 친척집을 찾은 나는 여러 친척들을 만나 1,000원을 더 방조(도움) 받고 사흘만에 버스를 타고 귀로에 올랐다. 우리가 건너온 곳과는 100미터 쯤 떨어진 다른 곳을 도강장소로 택했다. 대낮에 두만강가의 수풀에 앉아 건너편의 경비대 동향을 살피며 도강시간을 결정하였다. 경비대의 식사시간은 7시부터 7:30분까지이다. 낮에 돌던 순찰조도 6시 30분이면 철수하고 야간 근무가 7시 30분에 나온다. 그러면 도강시간은 7시로 정해야 한다. 7시면 약간 어두워졌을 때다. 사방 200m까지는 모든 움직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국경 지대의 주민들도 7시면 모두 식사하러 들어가고 조용한 때이다. 에라 또 한 번 모험해 보자. 두만강을 건너 1분도 안 되는 사이에 강가에 있는 큰누이네 집에만 들어가면 성공이다. 나는 7시를 기다렸다가 번개같이 동작하여 역시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세 번째 중국행도 성과적으로 진행되었다. 물론 돈은 동무와 나누어 가지고 집에도 내 놓았다. 나로서는 대단한 돈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세 번째 도강이 있은 후에 나의 생활은 비교적 순조롭게 흘러갔다. 딴 생각이 없이 공부만 하고 규율생활도 하고 그렇게 한 학기가 끝나고 어느덧 겨울 방학이 되었다. 방학기간에도 여러 가지 생각을 해 보았지만 사는 형편이 좀 나아졌으므로 행동은 하지 않았다. 이 해 방학 12월말에 큰누이 소개로 처녀 선을 보았다. 내가 원하는 형태의 처녀였다. 말이 있기 바쁘게 우리는 열렬히 사랑했으며 양측 부모들도 기뻐하였다. 우리는 약혼식 날을 2000년 2월 16일로 결정하였다. 또 결혼식은 3월 21일로 정하였다. 나는 이 글에서 우리의 사랑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한다.
그 후 나는 방학을 끝내고 순조롭게 대학 4학년에 진급하였다. 그 때 당시 나의 수중에는 조선 돈 30,000원 정도 있었다. 공부에서보다 장사의 머리가 튼 나는 1월초에 청진시내의 련진리라는 바닷가 마을에 해삼을 구하러 갔다. 일이 잘 안 되자고 그랬는지 떠날 때부터 몸이 오싹오싹해 나면서 열이 났다. 하지만 당시 나는 원래부터 건강한 몸이었으므로 ‘감기겠지’하고 생각하고 떠났다. 현지에 도착해서 현물을 보니 해삼이 신통치도 않았거니와 값도 비쌌다. 그만두기로 결심하고 돌아오려고 하였다. 청진으로 가는 자동차를 잡아야 하겠는데 오전 내 기다려도 차를 잡지 못했다. 할 수 없어 걸어서 돌아갈 것을 결심하고 떠났다. 청진까지 30리 앞둔 교원리 마을에서 점심을 먹으려고 길가 어느 한 집에 들어갔다.
그 집은 보통 가난한 집이 아니었다. 식구는 세 명인데 모두가 여자들이었다. 어머니와 처녀인 2명의 딸들뿐이었다. 온돌방인데 장판도 하지 못하고 시멘트 바닥에 누더기 같은 이불이 펴져 있을 뿐이었다. 먹는 것을 보니 정말로 기가 막혔다. 나는 처음 떠날 때 도중 식사로 밥을 많이 쌌다. 그 집 식구들에 나까지 4명이 점심을 먹었는데 그러고도 좀 남았다. 그러고 금방 떠나려고 했는데 갑자기 열이 나면서 앓아눕게 될 줄이야. 수중에 있던 돈을 꺼내어 약도 사오고 쌀도 사오고 부식물도 사오게 하였다. 이렇게 그 집에서 먹지도 못하며 꼬박 3일간을 앓았다. 3일째 되는 날 열은 시작할 때처럼 갑자기 내렸다. 그리고 갑자기 밥도 먹고 싶어졌다. 그래서 시원한 김치에 밥 한 그릇을 다 먹었는데 그때부터 한 시간 도 안 되어 아fot배가 송곳에 찔리운 것 같이 느껴지며 숨까지 막혔다. 앉지도 눕지도 못하고 땀만 흘린다. 그 집 식구들은 소동이 일어났다. 소달구지를 내여 병원으로 데리고 간다고 야단 쳤다. 리병원으로 갔더니 맹장염이라고 진단했다. 당장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정말이지 의사 자격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때 만약 내가 맹장염이라고 수술을 했더라면 틀림없이 저 세상에 갔을 것이다. 다행하게도 수술의사가 외출하고 없기에 청진 의과대학병원으로 의뢰서를 떼 주었다. 다음 날 아침 간신히 버스를 얻어 타고 그 집 아주머니 부축을 받으며 병원으로 향했다. 큰길에서 병원까지 1km가량을 아주머니가 나를 업고 갔다. 진단한 결과 장티프스로 인한 천공복막염이었다. 당장에 수술실로 옮겨졌고 4시간의 수술 끝에 생명은 구원되었다. 이후 병원에서 30일 가량 치료받았다. 내 수중에 돈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돈이 없었더라면 영락없이 죽었을 것이다. 수술 후 한 주일만에 집에서 아버지와 동생이 오고 큰누이가 오고 퇴원할 때까지 내 옆에서 간호하여 주었다.
결국 대학을 그만두고 말았다. 몸이 약해졌고 6개월간의 안정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대학에서는 나에게 1년 후에 다시 와서 공부하라고 하였다. 하지만 그 1년 후 내 운명이 과연 어떻게 될 것인지 그때에는 정말이지 아무 것도 몰랐다. 체포, 교화소 생활, 석방, 정말이지 생각만 해도 몸서리치는 일들만 연이어 꼬리를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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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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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군 2009-09-15 01:33:52
    눈물이 앞을 가리워 볼 수가 없네요.
    이 나라의 사나이들이 있어 수많은 여성들이 탈북의 길에 오르지 않았을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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