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고(遺稿) 1-꿈으로 보이는 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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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遺稿) * 이 수기의 필자는 얼마 전 중국에서 공안에 체포되어 북으로 이송된 후 처형되었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수기는 그의 유고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다음 순서대로 연재될 예정이다. 1. 행로를 바꾸다(1997~1998. 11), 2. 운명을 건 도박(1998. 12~2000. 1), 3. 인간 동물원(2000. 2~2000. 5), 4. 인간 방목지(2000. 5~2002. 1), 5. 다시 보는 두만강(2002. 4~2003. 3), 6. 인생의 모험(2003. 3~2003. 6).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이와 같은 비극이 하루빨리 끝날 수 있도록 더욱더 견결하게 투쟁하여 김정일 독재정권을 끝장냈으면 한다. 글은 최대한 원문을 살려 정리했다. 꿈으로 보이는 7년 남 광 수 수기를 쓰기에 앞서 인생에서 7년은 짧은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나에게 있어서 이러한 시간은 나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도 있을 만큼 귀중한 시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기간에 체험한 모든 일을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본다는 것은 정말로 감회 깊은 일이라 해야 할 것이다. 생존이냐 죽음이냐 하는 생사 기로에서 내가 겪은 오만가지 고생과 즐거움을 거짓없이 회고해 볼 수 있다면 지나간 7년 기간은 분명 나에게 있어서 허무한 기간이 아닌 인생 방향 전환 기간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나는 내가 지은 모든 죄를 하느님 앞에서 속죄하는 심정으로 진실하게 쓰려고 한다. 1. 행로를 바꾸다. (1997~1998. 11) 1997년의 북조선은 일명 “고난의 행군”이라고 부르던 시기였다. 나는 생활이 제일 어렵던 시기에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사람들이 무리로 굶어 죽고, 음식 아닌 음식을 먹으며 하루하루 숨가쁘게 살던 이 해와 그 전해를 돌이켜 볼 때 지금도 나도 모르게 소름이 끼치는 듯한 감정이다. 이 때에 나는 대학 2학년에서 소대장으로 사업하였다. 소대장이란 한 개 학급의 학급반장과 같은 것이다. 조선은 대학교마저도 군대식으로 소대, 중대, 대대로 부르고 있다. 여기서 소대장은 25명~30명의 학급을 책임지고 학습, 조직 생활을 시킨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욕심이 많았다고 볼 수 있다. 나의 학급을 대학적으로 제일 실력이 높은 학급, 제일 규율이 있는 학급으로 만들고 싶었다. 젊은 패기와 정열로 한 번 해보고 싶은 마음이 항상 꿈틀거렸으며 기울인 노력에 따라 모든 면에서 나의 학급은 대학적으로 항상 첫 자리를 차지했다. 대학에 입학하여 공부하던 시기에 나는 오늘과 같은 날이 있을 줄은 정말이지 상상도 못했다. 오직 대학을 졸업하고 나를 키워 준 부모와 그리고 국가 앞에 충성과 효성을 다해야 하겠다는 일념뿐이었다. 그래서 통강냉이에 도토리가 절반 섞인 한 공기의 기숙사 밥을 먹으면서도 타발하지(불평하지) 않았고 춥고 배고프고 힘들어도 항상 교양자의 위치에서 생활하였다. 이러던 나의 머리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우리 학급의 한 여학생이 대학을 중퇴한 다음부터였다. 공부도 잘하고 수재라고 하던 그가 가정 곤란으로 중퇴하였던 것이다. 그 당시 대학에서는 공부하자면 집안의 방조(도움)가 없이는 상상하지 못하게 조건이 악화되었다. 명색이 온수 난방으로 된 기숙사는 외지 학생들이 숙식하는 곳이다. 그러나 온수 난방은 말이 온수 난방이지 1년에 온수가 한 두 번 오나마나 하는 정도였다. 거기에다 식사 질은 한심한 상태이니 집안의 방조 없이 견딘다는 것은 실로 말도 되지 않았다. 정상적으로 집에서 돈을 부쳐 주어야 장마당에서 매식이라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당시 전국이 모두 살기 바쁜 고난의 행군을 하는 판인데 자식 하나 공부시키자고 정상적으로 돈을 보내 준다는 것은 그 어느 집도 힘에 부치지 않을 수 없었다. 하기에 그 시기 공부도 잘하지 못하고 머리도 좋지 않은 사람들이 가정 배경과 그 어떤 줄타기로 대학에 입학해서는 건달을 부리며(빈둥거리며) 호의호식하는 것을 보면 정말이지 눈에서 불이 일었다. 그러던 차에 그 여학생이 가정 곤란으로 대학을 중퇴하였던 것이다 참으로 이 광경을 보면서 나의 머리에는 처음으로 변화가 오기 시작하였다. 나 자신도 우리 집안에서는 장손이다. 우리 부모들은 나에게 모든 기대를 걸고 있었으며, 집 식구들이 고생하고 굶어도 나만은 고생시키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나는 대학에서 한 개 학급을 책임진 소대장이었으므로 남보다 돈이 많이 들었다. 나는 항상 남보다 머리를 더 써야 했다. 자기 공부도 하기가 바쁘지만 학급 25명의 학습과 조직 생활과 규율, 개인 생활에까지 신경을 써야 했던 것이다. 대학적으로 자주 제기되는 사회적 동원에도 학급 전원을 동원해야 했고 잘하면 칭찬, 못하면 욕이 차례 졌다(욕을 먹었다). 대학생은 학습에 열중해야 한다. 그러나 그 시기로 볼 때 대학은 자기가 처한 어려운 난국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학 학생들을 많이 들볶았다. 모든 것이 부족한 때라 나로서도 살아가야 했으므로 점차 학습에 모든 것을 집중한 것이 아니라 다른 데 신경 쓸 때가 있게 되었다. ‘하늘에서 돈뭉치가 좀 떨어져라.’ 쓸데없는 공상도 해보았고 날아가는 돈을 쥘 궁리도 해 보았다. 큰 장사를 하는 사람들과 어울려 물건 구입도 다녀봤고 직접 방학 때면 장사질도 조금씩 해보았다. 하지만 그 때 하였던 장사질이란 방학 때에 다른 지방에서 담배나 옷가지 같은 것들을 눅게(싸게) 사서는 내가 공부하는 지방에 가져다가 좀 비싸게 팔아먹은 짓 같은 것이 전부였다. 가끔은 앞 지방에서 들여오는 개구리기름 같은 것을 외상으로 넘겨받아 국경지대에 가서 중국 보따리 장사꾼들에게 비싸게 팔아 리득을 보기도 하였다. 공부하는 학생이 공부는 뒤에 놓고 이러한 장사에 신경을 썼으니 실력은 어떻게 되고 또 자기가 책임진 학급은 또 어떻게 되었겠는가? 그것으로 인하여 비판도 되게(심하게) 받고 처벌까지도 받았다. 아무튼 내가 제일 싫어한 것은 생활총화시간이었다. 생활총화란 한 주간의 자기의 학습과 생활을 조직 앞에 털어놓는 것인데 이런 회의에서는 자기 비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남까지도 비판해야 한다. 나는 생활총화 때 비판을 받으면서 오만가지 생각을 하였다. ‘나는 나 잘 살려고 장사도 하고 결석을 한 것이 아닌데 이 사람들은 왜 나를 이기주의자라고 하는가, 왜 또 자유주의자라고 하는가, 자유라는 ‘자’자도 모르는 자들이 나를 비판하다니, 내가 나 혼자 잘되자고 내가 그런 것이냐, 물론 나 자신을 위해서 한 것도 있지만 학급을 위해서 그런 것이 더 많은데, 나를 믿고 대학에 보내주고 나의 뒷바라지를 하는 우리 부모들이 내가 이렇게 비판을 받은 걸 알게 되면 얼마나 가슴아파하랴.‘ 이런 생각들을 하니 불평은 더 커져만 갔다. 어떤 때는 대학교원들의 생활도 생각해 보았다. 우리 학부의 노(老)교원은 대학교단에서 근 20년을 보내온 사회적으로도 존경을 받아야할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교원의 생활은 매우 비참하였다. 위 탈이 심하여 수업 중에도 슬그머니 약을 먹었고, 집에 석탄이 떨어져 고생했으며, 땔거리가 없어 여간만 고생하지 않았다. 언제인가는 그 노교원이 직접 석탄을 배낭에 지고 오는 것을 보았는데 사회적으로 우대 받고 존경을 받아야 할 노교원이 그러는 것을 보니 그런 인텔리들을 존경해 주지 않는 사회에 불만이 커졌다. 나는 그 교원들을 매우 존경하였다. 방학이 끝나서 대학으로 오면 꼭 그 선생님을 찾아가 인사하였다. 한 번은 그 선생님이 석탄이 없어 고생하는 것을 보고 나 자신이 앞에 나서 사업하여 석탄을 실어다 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것도 한 두 번 그런다고 해서 선생의 처지가 달라질 것은 없었다. 선생님은 정말로 진실한 사람이었다. 일부 대학교원들은 그때에 벌써 학생들과 공모하여 부정행위를 하고 뇌물을 받아 챙겼지만 그 선생만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그 선생님도 학부의 부학장으로서 나를 성심성의로 도와주고 걱정해주고 내 뒤를 밀어주기도 했다 정말이지 지금 생각해 봐도 잊혀지지 않는 선생님이시다. 여름방학도 끝나고 새 학기가 들어서면서도 나의 마음은 안정되지 못했다. 그 때 우리 집은 함경북도 무산군이라는 곳에 있었다. 무산군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린접한 국경지대이다. 그런데 중국은 개혁, 개방을 하면서 모두가 잘 산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 때에 벌써 많은 사람들이 두만강을 몰래 건너 중국으로 간다고 하였다. 중국을 통해 외국도 가고..... 한편 중국에서 나온 보따리 장사꾼들은 값이 나가는 골동품이나 희금속, 은 같은 것들을 다 사갔다. 이러한 현상을 보면서 나는 ‘중국이라는 큰 나라는 정치를 어떻게 하기에 그렇게 크고 인구도 많으면서 잘 사는데 조선은 작은 나라인데도 이렇게 못사는가. 왜 우리나라는 꼭 외국에서 쌀이랑 의약품이랑 원조를 받아야만 살 수 있는가’하는 의문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무엇 때문에, 누구 탓인가 하는 의문도 없지 않았으며 나 자신도 한번 중국이라는 나라에 가보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가끔은 곁에서 학급 동무들이 내가 중국국경 지대에서 살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 좀 알 것이라 생각하고 이야기를 해달라고 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 나는 오히려 안타깝기만 했다. 사실 그 때 내가 국경지대에서 사는 건 맞지만 중국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그 곳에서 조선으로 장사하려 오거나 친척 방문을 오는 몇몇 사람들이나 보고 그 사람들에게 돈이 많다는 것밖에 없었다. 또 두만강 건너에 있는 중국 마을들에 버스 다니는 것밖에 본 것이 없는 내가 어떻게 중국 이야기를 할 수 있겠는가? 우리도 아버지 쪽으로는 중국에 친척이 여러분 있다. 원래 우리 아버지 고향도 중국의 화룡시 승선진이라는 곳이다. 그래서 어느 때든지 꼭 한번은 중국에 가보리라 생각은 하였지만 그 때까지는 그런 생각이 아직은 뜬구름이었다. 하지만 세월은 흐르기 마련이다. 그럭저럭 공부도 하고 여러 가지 일도 하고 하는 사이에 한 학기의 시험도 끝나고 겨울 방학 기간이 되었다. 공부에 전력을 기울이지 못했지만 그 학기에는 우등을 하였다. 방학은 되었으나 마음은 무거워졌다. 그 당시 우리 집안 형편은 매우 좋지 못하였다. 국가가 어려우면 그 국가를 이루는 개별적인 가정들도 어려운 법이다. 우리도 역시 생활에서 전에 없이 곤란을 많이 느꼈다. 당시 우리 식구는 할머니까지 다섯 명이었다. 한데 그 다섯 명 식구가 모두가 어머니 손 하나를 믿고 그날그날 살았다. 어머니는 그때 여자들의 머리를 단장하는 미용사였다. 어머니는 미용기능이 높고 년한도 20년이나 되었다. 어머니가 하루 100원을 벌면 국수 2㎏을 샀다. 그보다 좀 더 많이 벌면 채소도 사고, 여러 가지 양념감들도 샀다. 집안 식구들의 목숨이 어머니 손에 달려있었으므로 우리 어머니는 그 어느 하루도 쉬지 못하였다. 어머니의 다리는 계속 부을대로 부어있었으며 파마약에 손가락은 뚫어지고 거기서는 늘 빨간 피가 새어나오군 했다. 이런 고생을 참아 가며 어머니는 나를 공부시키고, 먹여주고, 입혀주고, 내세워주셨다. 그 당시 우리 아버지는 자동차 사업소에서 책임기사로 일하였는데 그 사업소의 참모장과 같은 직책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직급이 있고 기술이 있다 해도 기름이 없어 자동차 가 다 멎어 섰는데 아버지인들 어떻게 하겠는가? 아버지는 국가에 충실한 사람이다. 나라가 국난을 겪고 있을 때라는 선전을 믿었으며 난국을 타개하려고 애를 썼다. 그래서 자동차 대용연료도 발명하는데 기여하였으며 어떻게든 종업원들을 살리려고 애를 썼다. 그러면서도 자기 잇속을 채우는 행위는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우리 아버지의 월급은 높은 편이였으나 국가에서 월급을 주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우리 집안 살림살이가 무엇이었겠는가? 나는 나대로 공부한답시고 부모들이 보내는 돈이나 써가며 날을 보냈는데 정작 이러한 정경을 목격하니 목석 같던 나의 마음도 아프기 그지없었다. 결국 도강을 하여야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싹트게 되었다. 한마디로 나는 학생이다 보니 직업적인 장사도 할 수 없었고 어디 가서 뼈빠지게 일을 하려 해도 할 데가 없었다. 그렇다고 대학을 그만둘 수는 더구나 없고, 계절에 맞게, 능력에 맞게, 시기에 맞게, 국경을 넘나들며 장사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결국 그 길밖에 없었다. 우리 마을에는 리진철이라고 부르는 11살짜리 아이가 있었다. 어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는 아이였는데 평소부터 그는 나를 삼촌이라 부르며 각별히 따라다니기 좋아했고 나 역시 그 애를 불쌍하게 생각되어 남달리 대하던 처지였다. 그런데 그 아이는 학교에 다니지 못하였다. 왜냐면 그 집에서는 그 아이가 세대주(가장) 역할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는 이미 오래 전에 사망하였으며 어머니는 늘 꿍꿍 앓기만 했다. 그 아이는 실로 11살인데도 집안 모든 일을 도맡아 하였으며 땔나무까지 보장하느라고 정말 남보기 애처로울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아침에 주먹밥을 싸 가지고 나무하러 산에 가면 저녁때가 되어서야 겨우 나무 한 대를 끌고 집으로 온다. 그 때 사실 학교에 가지 않고 그렇게 나무하러 다니는 애들은 많았지만 그 애처럼 집에서 세대주 역할까지 하는 애들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아이가 나무하러 다닌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또래 다른 아이들과 함께 중국에 넘나든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아이들이 가면 중국 사람들(변경지대)은 불쌍히 여겨 옷도 주고 쌀도 주고 어떤 때는 돈까지도 준다는 것이다. 나의 첫 중국 행은 이 아이가 안내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때부터 나는 공부만 열중하던 행로를 바꾸어 집안도 살고, 나 자신도 살고, 공부도 하자는 배심에서(마음에) 조선 경비대가 조밀하게 진을 친 두만강을 넘나들게 시작하였다. 하기야 그 때는 그것이 조국에 대한 배반이라고는 꿈에서조차도 생각지 않았다.남보다 잘살기를 원해서가 아니라 자칫하면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세상이기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서 택한 마지막 길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길이 나의 인생행로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는 길이 될 줄이야......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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