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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수기]빛을 찾아 만리1 - 홍은영
동지회 13 7807 2005-10-26 09:47:22
빛을 찾아 만리

홍 은 영

그 날은 97년 9월 30일이었어요.

그때 저는 학급동무들과 함께 평안남도 대동군 금정리란 곳에 가을걷이 동원에 나가 있었어요.

언니의 말을 들어보면 그래도 가을걷이 동원은 봄 모내기 동원보다 모든 게 낫다고 하던데 우리는 그렇지 못했어요.

농민들도 식량이 떨어져 풀죽으로 끼니를 에우던 때이고 보니 농장관리위원회에서는 우리한테 아무 도움도 주지 못했어요.

기껏해야 김장 무우, 배추 솎은 것을 얼마간씩 실어다 줄 뿐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우리들은 가지고 나간 쌀과 농장에서 주는 것으로 끼니를 에워야 했어요.

끼마다 노란 옥수수밥 한 그릇과 밑굽이 보이는 국 한 사발이 먹는 것의 전부였고 우린 워낙 하는 일이 힘들다보니 게눈 감추듯 먹어버리곤 했어요.

오전 일을 끝내고 점심 먹으러 숙소에 돌아왔을 때였어요.

조그마한 작업반 선전실을 식당으로 썼기 때문에 몇 차례씩 꺾어서 식사를 하였는데 저희들은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때 큰 길 쪽에서 먼지를 보얗게 일구며 하얀 승용차 한 대가 식당 쪽으로 미끄러져 들어오더군요.

또 어느 간부가 나오는 것이겠지하면서도 웬일인지 알지 못할 불안이 살풋이 고개를 쳐들었어요.

차가 멎자 체통 우람진 두 사람이 내렸어요.

그런데 뒤에 내린 키가 좀 작아 보이는 사람은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었어요. 어데서 보았을까? 생각이 날듯 하면서도 나지 않아 고민하고 있는데 그 사람이 식사 차례를 기다리는 우리를 쌀쌀히 훑어보며 지나가는 것이었어요.

그대로 한번 홅어보고 지나간 것 뿐인데 웬일인지 금방 가슴이 두근거렸어요.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지난번에도 그러다가 무사했잖아 마음속으로 아니라고 부정하는데도 가슴은 그냥 방망이질 치더군요.

석 달 전부터였어요.

누가 집에 찾아와 문을 두드려도, 아니 학교에서 담임선생님이 찾기만 해도 공연히 마음이 콩당거려 이게 마지막이 아닌가 마음을 졸이곤 하였어요 정말 몇 번인지 몰라요.

하지만 그때마다 아무 일 없이 지나갔어요.

그래 이번에도 별일이 아닐거라 생각하면서도 손끝이 바들바들 떨려왔어요.

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그대로 식당 안으로 들어갔어요. 사로청 지도원 선생이 급히 좇아 들어가는 것이 보였어요.

다 고삭아버린 싸리울타리에 기대여 먼 하늘을 쳐다보고 있노라니 웬일인지 눈물이 나더군요.

아! 아버지! 아버지는 지금 어데 계셔요? 맑게 개인 하늘에는 고추잠자리 몇 마리만 떠돌고 있을 뿐이었어요.

석 달 전 어느 날이었어요.

그날도 아버지는 다른 날과 꼭 같이 직장으로 나갔어요.

그때 집에는 아버지와 언니 그리고 저까지 모두 세 명이 살았어요.

어머니는 그 전해에 뜻밖에 불치의 병에 걸려 사망하였으니까요.

어머니가 살아 계셨을 때에도 아버지는 집안의 기둥이었는데 어머니까지 그렇게 되고 보니 아버지는 우리한테 아버지이자 곧 어머니이기도 했어요.

그러다 보니 언니는 물론 저까지 늘 아버지의 얼굴에 한 점 그늘이 질세라 살피곤 하였어요.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아버지가 술을 과음하기 시작하셨어요.

그런데 그저 과음하는 게 아니라 무슨 깊은 시름에 잠겨 술을 마시기 시작했던 거예요.

때로는 마시다가 혼자서 눈물을 흘리시고는 다시 마시고 한번은 자다가 깨어보니 아버지가 머리맡에 앉아 잠자는 저희들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어요.

그날 아버지는 다른 날보다 좀 늦게 돌아왔어요. 얼핏 보기에도 몹시 지쳐 보이더군요.

변변치 않은 저녁상이지만 언니가 정성 다해 차려 올렸는데 아버지는 들 생각을 하지 않고 술병부터 찾았어요.

혼자 조용히 마시고 싶다 하시며 저희들을 당신 방에서 나가라고 하셨어요.

아버지 신상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긴 건 알았지만 너무나 무거운 얼굴이어서 물어볼 생각도 못하겠더군요.

우리까지 마음이 무거워져 각자 자기 방으로 나왔는데 꽤 시간이 흘렀는데도 웬일인지 기척이 없더군요.

제가 다가가 문틈으로 엿보니 뜻밖에도 아버지는 빈 술잔을 잡고 울고 있지 않겠어요? 그날 밤 우리들은 누구도 잠들지 못했어요.

그런데 아침이 되자 아버지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더냐 싶게 밥곽을 싸들고 직장에 나갔어요.

그래서 우리는 안도의 숨을 쉬었지요.

하지만 그렇게 나간 아버지가 밤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어요.

이튿날에도 그 이튿날에도 돌아오지 않았어요.

저희들은 놀라 아버지 직장에 찾아갔는데 누구도 대답해주는 사람조차 없었어요.

닷새 만에야 누군가 아버지가 그날 출근하던 길에 보위부에 끌려갔다고 알려주더군요.

보위부가 어떤 곳인지는 적어도 북한에 사는 사람이면 모르는 사람이 없지요.

간첩, 반당, 반혁명분자, 종파분자 등 인민의 원수들만 잡아가는 곳이거든요.

그런데 아버지가 그런 곳에 잡혀갔다니 믿어지지 않았어요.

우리집에는 아버지가 받은 훈장, 메달도 한 주머니나 있었어요.

김일성·김정일과 함께 찍은 사진도 여러 장이나 있었어요.

그들과 단 한번만 찍어도 영광이라고 하는데 우리 아버지한테는 그런 사진이 여러 장이나 있었거든요.

그런 아버지가 반동, 간첩, 암해(暗害)분자라니요?

물론 지난 몇 해 사이에는 그런 일이 뜸했지만 그래도 전 기억하고 있어요.

해마다 4월 15일이 되면 아버지는 엄마와 함께 저희들을 데리고 만수대동상으로 갔어요.

그리고 며칠 전부터 미리 준비해 가지고 온 꽃다발을 동상에 올리었어요.

그때마다 아버지는 저희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너희들도 크면 꼭 수령님의 참된 아들.딸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곤 하셨어요.

그런 아버지인데 반동, 간첩, 암해(暗害)분자라니요? 암만해도 믿을 수가 없었어요.

저희들은 뭔가 오해가 생겨서 그럴 거라고, 얼마간만 지나면 해명되어 풀려나올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하루하루 날이 갈수록 우리들의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느끼지 않을 수 없었어요.

제일 먼저 현실로 닥친 것은 제가 7.15 소조에서 제명된 것이에요. 7.15 소조라는 것은 김정일의 지시로 학교마다 제일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로 전문 공부만 하는 소조를 묶은 것인데 이 소조에 들어가기만 하면 모든 농촌동원에도, 집단체조 훈련에도 면제되어요.

하지만 학교적으로도 불과 몇 명밖에 안 뽑기 때문에 거기에 뽑힌다는 건 정말 여간만 어려운 게 아니었어요.

또 일단 7. 15소조에 들어갔다고 해도 분기마다 한 번씩 보는 시험에서 성적이 떨어지면 누락되게 되었어요.

그래도 전 1학년 때부터 계속 7. 15 소조에 뽑혔는데 그때 마침 우리는 분기시험을 치고 있었어요.

제일 힘든 외국어며 국어 등을 치르고 나머지 수학만 치르면 되었어요.

다른 애들은 수학이 제일 힘들다고 하였지만 전 어렸을 때부터 그 과목에 특별히 재미를 붙여 쉽게 생각하는 과목이었어요.

어느 날 제가 수학시험을 치르러 학교에 나가자 수학선생님이 풀이 죽어 마주 나오더군요. 그때 처음으로 가슴이 덜컹하였어요.

아니나 다를까 수학선생님이 애써 외면하며 이렇게 말하더군요.

은영아, 사람은 한 생을 살다보면 별별 일에 다 부닥칠 수 있다.

나도 네가 이번 시험만 잘 치면 전교적으로 3등 권 안에 들어설 수 있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어쩌겠니, 이 세상에는 그 누구도 그 어떤 힘으로도 막을 수 없는 그런 것이 있구나.

우리 눈 앞을 보지 말고 먼 날을 보며 살자 선생님은 저의 두 손을 꼭 잡으며 말씀 하셨어요.

저는 끝내 얼굴을 싸쥐고 그 길로 달음질해 집으로 돌아왔어요.

그래, 반동의 딸이 7. 15소조 시험이라니? 울고 또 울었지만 풀리지 않더군요.

그 일이 있고 난 다음부터는 걸음걸음마다 괴로움이었어요.

먼저 아버지가 직장에서 타오던 배급표가 없어지니 온 식구가 배급을 받을 수가 없게 되었어요.

할 수 없이 텔레비전이며 재봉침 등을 팔아 식량을 사들였어요.

하지만 그렇게는 오래 견디지 못하리라는 걸 알고도 남는 일이었지요.

아무리 절약해 먹는다해도 쌀은 줄어들고 가구들은 하나 둘씩 없어지기 시작했어요.

그건 또 그래도 참을 만 했어요. 제일 고통스러운 건 동무들의 이상한 눈길을 받는 거였어요.

가는 곳마다 쳐다보는 눈길들은 (혹은 멸시하는 듯한 눈빛도 있었지만) 대부분 동정하는 눈길들이었어요.

하지만 그것도 싫었고 공연히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얼른 자리를 피하곤 하였어요. 이런 눈길을 의식한 건 저만이 아니었어요.

어느 날 력포구역 무진리에 농촌지원대로 나가있던 언니가 밤중에 돌아왔어요.

언니는 그때 그곳 농촌지원대 사로청 초급단체위원장을 하였어요. 그런데 이날 사로청 지도원 선생이 나와 갑자기 그를 해임하고 부위원장이었던 애를 위원장으로 올려놓았다는 거예요

그렇게 석 달을 살고 다행히 우리는 가을걷이에 동원 나왔고 이날을 맞게 되였던 거예요.

갑자기 선전실 문이 열리며 몇 사람이 나왔어요.

승용차를 타고 왔던 두 사람이 앞서 나오고 사로청 지도원 선생님과 담임선생님이 뒤에 나왔어요. 담임선생님은 얼굴이 빨갛게 익어 금방 울음이라도 터뜨릴 듯 말했어요.

아니에요.

가더라도 식사는 시키고 가야돼요.

이제 가면 어디 가서 식사시키겠어요 담임선생님이 승용차를 타고 온 키 작고 우람지게 생긴 사람에게 매달리듯 사정했어요.

식사? 반동 놈의 자식한테 식사는 무슨… 그 사람은 코웃음을 쳤어요. 그래도 그 옆에 선 다른 사람은 좀 생각해보는 듯 한 기색이었어요.

아니 얼른 식사는 시키자구. 어차피 늦었는데 담임선생님이 안도의 숨을 쉬는 것 같았어요.

그래요. 5분이면 돼요. 은영아! 은영아!

선생님이 다급히 저를 찾았어요.

나를 부르는 소리인 줄 뻔히 알면서도 어쩌면 땅속 저 깊은 어디에서 들리는 소리 같아 나는 얼른 대답을 못했어요.

은영아! 선생님이 널 찾아. 은영아! 옆에 있던 금이가 다급히 저를 흔들었어요.

사실 그때까지 저와 금이는 그렇게 좋은 사이가 아니었어요.

우리 아버지는 고지식해서 학교에서 내라는 걸 아무 것도 가져오지 못하는데 비해 그의 아버지는 ○○병원 원장이다 보니 아무거나 다 학교에서 요구하는 건 모두 잘 가져 왔거든요.

또 공부는 제가 그 애 보다 좀 더 잘했지만 그 대신 그는 사로청 조직생활 등을 잘해 선생님들의 신임을 받았어요.

그런데 그도 무슨 느낌이 들었는지 그때만은 당황한 얼굴로 막 나를 흔들더군요.
은영이 빨리와요.

먼저 식사해야겠어요

담임선생님이 저를 알아보시고 식당으로 끌었어요.

기다리던 애들은 물론 먼저 식사하고 나온 애들까지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저는 선생님에게 이끌리어 식당에 들어갔어요.

은숙아 준비됐지? 빨리! 선생님이 부엌일을 맡아하는 은숙이란 애에게 급히 재촉하였어요.
네, 잠깐만요. 잠깐이면 돼요.하고 은숙이가 대답했는데 웬일인지 한참 지나서야 식사가 올라왔어요.

그러나 올려온 밥그릇을 보는 순간 저는 끝내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어요.

우리들이 늘 먹던 옥수수밥 대신 하얀 이밥이 올라왔거든요. 그 사이 밥을 새로 했을 수는 없고 옥수수쌀과 입쌀을 함께 앉힌 밥솥에서 입쌀만 골라 담느라 시간이 걸렸던 거예요.

은영아, 많이 먹어. 잘해줘야 하는 건데 미안해 은숙이가 울먹울먹하며 말했어요.

그래 은영아 많이 먹어. 은숙이, 고추장 있지 그걸 이리 줘 선생님이 말했어요.

그 고추장은 선생님께만 올리던 것이에요.

그때 우리는 밥에 국만 먹었는데 선생님께만은 차마 그렇게 올리기 어려워 누구를 평양에까지 보내 얻어왔던 거였어요.

선생님은 은숙이가 가져온 고추장을 제 밥에 막 비벼주었어요.

은영아 내 전에도 말했지. 어디 가서든 공부는 손에서 놓지 말라구. 그럼, 언젠가는 꼭 좋은 날이 온다구. 절대로 잊어서는 안돼 선생님은 끝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념도 안하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들을세라 낮게 말했어요.

하지만 그들이 왜 못 들었겠어요.

승용차를 타고 왔던 키 큰 사람이 머리를 돌리고 말더군요.

그때 저는 무슨 정신으로 식사하고 나왔는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지금 생각나는 건 밖에 나오니 온 학급 동무들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모두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거예요.

은영아! 잘가. 네가… 네가 이렇게 가다니 학급반장 숙이가 목이 메어 저를 껴안았어요.

다른 동무들도 저를 붙잡더군요.

처음 선생님이 식사시키려고 끌 때에는 갑자기 가슴이 꽉 막히는 것 같았는데 그렇게 되고 보니 오히려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애들은 저마다 저의 손에 뭔가 기념될 만한 것들을 쥐어주려 애썼어요. 누구는 만년필을 또 누구는 머리 빗을 가지고 있다가 선생님이 저의 배낭을 꺼내오자 거기에 넣기 시작했어요.

이건 뭐야! 반동놈의 새끼가 가는데 초상난 것처럼! 승용차를 타고 왔던 키가 작은 사람이 꽥 소리를 쳤어요.

애들이 화들짝 놀랐어요.

그러나 흩어지지는 않더군요.

자, 어서 차를 타! 그 사람이 우왁스레 저의 팔을 당겨 차 쪽으로 끌었어요. 애들이 으왕 울음소리를 내며 따라 나섰어요.

지나간 이야기지만 이런 일이 우리학급에서 처음은 아니었어요.

그 해에만도 저까지 해서 세 번째였는데 저하고 다른 것은 두 애는 다행히 어머니들이 있었다 뿐이에요.

송미화라는 애 아버지는 인민무력부에서 장령까지 달았던 분이고 또 정심이란 애네 아버지는 소련에 오랫동안 유학까지 갔다온 분이었어요.

그런데도 그런 분들까지 무엇 때문인지 하룻밤 새에 없어지고 가족들은 물론 누구도 알지 못할 곳에 끌려갔던 거예요.

애들은 제가 어머니도 없다는 것 때문에 더 가슴 아프게 생각했는지 몰라요. 아무튼 차가 떠나는데 따라오면서까지 울며 손을 흔들었어요.

담임선생님이 마지막으로 하던 말이 생각나요.

은영아 어디 가서든 우리 절대로 공부를 손에서 놓아서는 안 된다. 절대 잊지 말아라. 그럼 꼭 좋은 일이 있을거야. 차가 떠나자 키가 큰 보위원이(뒤에 안 일이지만 그들은 보위원들 이었어요) 쓸쓸히 얼굴을 돌리며 이렇게 말하더군요.

이거야, 차라리 내가 추방당하는 게 낫지 언제까지 이런 일을… 키 작은 보위원도 이때만은 말이 없더군요..

이미 가을걷이가 끝난 황량한 들판, 마지막까지 손을 젖던 동무들의 모습도 사라지고 뿌연 먼지만이 일어나고 있었어요.

(다음호에 계속...)


1999년 탈북자동지회 회보[망향] 연재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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