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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다운 삶이 없는 곳 북한" - 김명숙
동지회 14 9676 2005-11-11 14:26:58
김명숙 : 만69세, 요덕 정치범수용소 경험자·중국 심양, 2003년 11월 입국

가족 이야기

저는 1937년 5월 26일 중국 심양시 서탑에서 태어났습니다.
4살 즈음 북경으로 이사하였으며, 북경시 왕부정 뚱단펠로 지구에서 살았습니다.
당시 저의 아버지께서는 북경시 대창조에서 토목노동을 하였고, 어머니께서는 북경시의 한 대구탕 집에서 주방 일을 하였습니다.
저희 가족은 부모님과 오빠, 언니까지 모두 다섯 명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빠가 징병되었습니다.
후에 알게 되었지만 당시 오빠는 중국 팔로군 지대인 태향산으로 가서 해방될 당시 연길사령부(사령관: 주보중)에 작전참모를 하였고, 소위 ‘김일성의 조국개선’ 당시 평양으로 들어가 1945년 해방 이후 평양시 철도경비대 대대장으로 근무하였습니다.
이후 평양 보안간부훈련소를 거쳐 평양학원(원장: 김책) 1기생으로 졸업, 보위성 직속 1연대 참모장(연대장: 최현)을 거쳐 보위성 직속 3연대 작전참모(연대장: 최춘국)로 근무하였고, 1950년 한국전쟁에서 서울을 최초로 점령했던 제3근위서울보병사단 참모장으로 근무하다가 사단장이 포항계선으로 소환됨에 따라 사단장 대리임무를 수행하던 중 사망(1950.8.12) 하였습니다.
오빠는 25세의 젊은 나이에 참모장이 되어 강건으로부터 가장 총애를 받았다고 합니다.
오빠는 빨치산이었지만, 아버지는 경북 김천, 어머니는 경북 안동이 고향인 남한출신입니다.

이제 내가 왜 그 몸서리나는 요덕정치범수용소로 가게 됐으며 인간 이하의 치부와 짐승도 얼굴을 붉힐 고통의 장시간을 허비해야 됐는지를, 보태지도 않고 떼지도 않고 사실 그대로 제가 겪은 요덕정치범수용소에서 만 8년 세월(1970년 10월부터 1978년 12월까지)과 정치범수용소 해제 후 함경남도 함흥주변인 장진군 광산으로 배치되어 금광 하부조구 조장으로 근무한 3년을 통틀어 11년 세월의 치욕의 나날들을 만천하에 고발하고자 합니다.

평탄했던 생활

오빠가 빨치산인 탓에 1970년 까지는 고생도 모르고 자그마한 배려 속에 살았다고 봐도 과언은 아닙니다.
북한은 상, 하층 격차가 많고 평민이 모르는 곳이 너무도 많습니다.
저는 상업성 특수처에 속하는 외국여행자상점 상업부에 근무하였고 고위층만 대상하는 상점입니다.
물론 외국에 가는 정부대표단 대사급, 항일투사 5호댁 등등이지요.
내각비준 문건에 의한 물건을 판매하는 곳입니다.
그곳에 근무하는 사람 역시 사상적 배경이 좋아야 되는 것은 물론입니다.
고위급을 대상하다 보면 그네들의 사생활 역시 잘 알게 됨은 원리가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나의 모든 희망도 사라지는 순간-바로 북한사회에서 버림받고 정치, 경제, 문화 모든 방면에서 다 잃어버린- 다시는 빠져나올 수 없는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저를 1970년 6월부터 보위부는 체계적으로 저를 감시했던 것을 먼 훗날에 알게 되었습니다.

1970년 7월 4일 조선백과사전 출판사에 다니던 남편인 이동명은 병으로 집에 있었고, 저는 직장에 출근했습니다.
퇴근해 집으로 돌아와 보니 남편은 집에 없었습니다.
15일 후 농업위윈회 기요실(취조실)에서 불러서 갔는데 백과사전담당 안전보위지도원이 저를 보고 “동명이가 어데 갔는가?”라고 묻기에 저는 “몸이 아파 출근 못하고 있었는데 제가 출근하려고 할 때 중국으로 가자고 하기에 어찌 가는 가 그런 말 말라고 하면서 출근했고, 퇴근해 집에 돌아와 보니 남편이 없었고 지금까지 행방을 알 수 없다고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 다음날 “동명 신의주에 와 있음” 이라는 전보가 날아왔습니다.(보위부에서 전보를 친 것으로 추측됨) 그 이후 나의 남편 이동명은 어디에 있는지 소식을 알 수 없습니다.

출장조직이 요덕수용소로

어느 날 갑자기 젖먹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에게 출장조직을 했습니다.
출장인 즉 신의주 화장품 공장이 북한에서는 제일 특제품이 나오는 곳이었고 또 신의주 펄프공장이 북한에서 제일 좋은 종이가 나오는 곳입니다.
그 곳에 가서 생산조직을 잘해놓고 오라는 과제를 상업부장으로부터 받고 신의주로 출장 증명서를 받아 8월 20일경에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날 저녁 청진-신의주행 열차를 타기위해 서평양역으로 나갔습니다.

역에서 약 15분쯤 앉아서 기다리고 있을 때 군복 입은 대위가 오더니 저에게 증명서를 보자고 하면서 무엇을 좀 알고자하니 잠깐 같이 나갔다가 가라고 하면서 밖으로 데리고 나갔습니다. 저를 69형 짚차에 태우고는 어디론지 달렸으나 어두워서 밖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간 시간이 흘렀다고 생각될 때 차는 멈추었고 내리라고 해서 내렸습니다.
기분이 이상했어요.
층계를 올라갔는데 약 3층 정도 되는 것은 알았지요.
건물의 생김은 아파트였습니다.
방 현관을 올라와 문 앞에 들어서니 방으로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방의 구조는 문 열자 우측에 세면장과 화장실이 있었고 좌, 우측으로 방이 둘이 있었는데 방 좌측에는 2명의 사람이 있었고 저는 우측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방안에는 침대가 우측에 있었고 좌측에는 책상과 의자 2개가 있었습니다.
저를 데리고 온 사람이 저를 보고 하는 말이 이제부터 이방에서 생활을 해야 한다고 하면서, 저를 보고 출장준비로 가지고 가방은 달라고 했고 (물론 당증도) 그리고 의복도 다른 것으로 바꾸어 입혔는데 병원용 의류였습니다.
그리고는 나보고 자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그저 어안이 벙벙했으며 특히 저는 젖먹이 애를 두고 왔기에 젖이 불어서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밤을 뜬 눈으로 지새웠습니다.
저는 이 세상에 살면서 그날 밤이 제일 길었습니다.
그날 밤의 조용한 고문은 말로 표현하기 힘이 듭니다.

옆방에서는 저를 밤새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길고 긴 밤이 지나고 아침은 왔습니다.
날이 밝아 세수를 했으며 그리고 아침 식사를 어떤 여자 취사원이 갖다 주는 것을 저를 지키고 있는 사람이 저의 방 책상에 갖다 놓았습니다.
저는 밥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배도 안 고팠어요.
그런데 생리가 또 왜 생겨가지고 처음으로 산후에 생리를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했더니 가제 천을 갖다 주더군요.
이렇게 똑 같은 시간을 무려 3일을 아무 말도 없이 침묵의 시간, 무서운 시간을 보내게 하였습니다.
3일 어간에 중좌 보위원 한 사람이 오더니 저를 보고 이제부터 무턱대고 쓰라고 했어요.
저는 무엇을 쓰느냐고 물었더니 그 지도원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를 들면 “아침에 일어나서 어떻게 했고 출근을 해서 누구를 만났으며 또 무슨 말을 했고 등등 자세하게 하나도 빠짐없이 상세하게 쓰라”고 했습니다.
누구한테 들은 말, 본인이 한말 등을 일체 사소한 것이라도 빠짐없이 다 쓰라고 했으며, 종이와 잉크 펜을 주고 나갔습니다.
저는 처음 당하는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너무도 기가 막혀 약 3일을 아무것도 쓰지 않았으며 또 3일 동안 단식을 했습니다.
약 10일이 지난 후 제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밤중이었습니다.
어렴풋이 생각나는 것은 그때 보위부 병원의 한 군의가 와서 몰핀을 놓아준 것 같았습니다. 그 후 이러다간 죽겠구나 살아야지 하는 생각으로 밥을 먹었습니다.
식사는 밥, 고깃국, 가자미, 튀김 등 질적으로는 괜찮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의 생활을 쓰기 시작했고 만 두 달 동안 그 보위부 초대소에서 취조를 받았습니다.

두 달 된 어느 날 웬 간부들 5명이 제가 있는 방으로 밀려왔지요.
그들이 하는 말이 "영자동무는 참대순처럼 고이 자랐습니다.
그러나 조선노동 당원으로서 영자가 한말이 남한에 전달되었다고 할 때 책임을 져야 되지 않겠냐" 또 “이제부터는 당이 취하는 조치에 수긍할 수 있겠냐” 등으로 두 차례 방문을 하였고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엄중한 후과를 빚었다면 응당 책임을 져야지요, 그리고 당이 키워주었는데 당이 취한 조치를 응해야지요"라고 대답을 하니, “이제부터 누구도 어떤 간부도 만나면 안된다”고 협박을 했습니다.
그리고 69형 짚차로 집으로 옮겨졌고 도착 후 문은 봉쇄당하였으며 그 누구도 들어오지도 나가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지옥국 15호 요덕 정치범 수용소에서의 생활

좋은 물건을 묶어 책과 함께 다 압수해갔고 나머지 짐과 함께 가족 식구(아버지 70세, 어머니 73세, 돌 지난 아들, 5살짜리 아들, 소학교 1학년 아들, 소학교 3학년 딸)가 함께 트럭에 실려 평양역으로 나가니 이미 간부들 6명이 나와 있었습니다. 저를 보고 가서 일을 잘 하라고 위안을 했으며 중좌인 담당 보위원과 기차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기차에서도 좌우측으로 7식구가 앉고 보위원이 끝에 앉아 우리 가족을 감시하면서 갔습니다. 금야군읍에 도착하자 저희들은 걸어서 금야역 바로 앞 여관에 도착하였으며 그곳에서 대충 점심을 먹고 기다리다가 저녁이 인차(금방) 도래했습니다. 그때가 10월초였고 추웠습니다.
밤이 되자 트럭한대가 도착해 저희들 인도자는 웬 사람에게 저희들 문건을 인계해주더니 잘 가라며 일 잘하면 돌아온다고 위안의 말을 남기고 떠나갔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보위원은 악당이지만 당시는 그 보위원과 헤어질 때 왜 그리도 눈물이 나던지 참 서러웠습니다.
저희 가족 7명은 트럭에 태워졌고 트럭은 울퉁불퉁 도로를 밤새 달리고 또 달렸습니다.
후에 알았지만 바로 그곳이 토정이 룡흥강 줄기를 따라 일왕령을 넘어 요덕군읍 제15호 보위부 수용소였습니다.
꿈에도 무서운 지옥국이였지요.
정문에는 옛날 초기에는 건물이 없었고 철조망을 둘러친 곳에 쌍 보초가 서있었고 투황등(감시등) 큰 것이 양쪽에 있었습니다.
정문을 통과하여 길이 안 좋은 도로로 한참 들어가더니 이젠 다 왔다고 내리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리하여 저희 가족 7명은 내렸습니다.
서로 볼을 때려도 모를 캄캄한 밤이었습니다.
자그마한 기와집 앞에서 또 쓰러져가는 초가집으로 저희 7식구를 들어가라고 하기에 들어갔더니 대좌인 소장 박청서라고 하는 사람이 저희 7식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네들은 무의식간에 당과 정부에 반동적인 유일체계에 걸리는 발언을 하여 이런 통제구역에 오게 되었으니 일을 잘하라 잘하면 과오를 씻고 나가고 못하면 영원히 이곳에 살게 된다” 3작업반으로 저녁을 먹고 올라가라고 퉁명스럽게 말하더니 관리위원회 사무실 뒤에 식당으로 웬 사람의 안내로 갔습니다.
식당에 가라는 말의 제 아들 5살짜리가 저를 보고 " 엄마 옥류관 가니?"라고 묻기에 저는 눈물을 머금고 "오냐. 그래."라고 대답하면서 가, 멀건 소금국에 통 강냉이밥을 먹고 나와서 그 야밤 삼경에 넘어지면서 처음 산골도로를 걸어 약 10리 되는 길로 3작업반에 안내자도 없이 유치원으로 찾아가 그날 밤 아무 침구도 없는 밤을 밝히다시피하고 아침이 되니 분조장인지 한 사람이 오더니 웬 초가집 윗방으로 저희를 안내하였습니다.
7식구가 살기에는 정말로 말도 안 되게 좁았습니다. 부엌도 강냉이대로 엮은 부엌이었고 시커먼 무쇠가 맨 흙 부뚜막이였습니다.
정말 기가 차 말이 안나올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살아야겠기에 또 난생처음 산으로 나무를 하러 올라갔습니다.
작업반은 약 40세대 정도였습니다. 산에 올라가 내려다보면서 실컷 울었습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두메산골로 왔단 말인가. 7식구에 노력자는 저 한 명이었고 생활은 자급자족이어서 어찌 살까? 생각하니 참 기가 막혔습니다.
통강냉이 며칠 분을 주었고 일을 나오라고 했습니다.
망을 빌려 강냉이를 분쇄했으며 처음 해온 나무는 다 옻나무였으므로 버려졌고 겨우겨우 얻어서 불을 땠고, 그때가 가을걷이 철이어서 낫을 하나 가지고 일을 나갔습니다.
난생 처음 강냉이 가을걷이를 하는데 먼저 입소한 사람들은 저를 보고 혀를 찼습니다.
일하는 것이 우스웠겠지요.
이렇게 15호 수용소인 죽음의 문을 열고 들어갔고 8년 동안 내 가족 중 부모와 막내는 가혹한 노동과 영양실조로 수용소에 묻게 되었습니다.

제15호 정치범수용소에 갇혀 있는 사람들

제 15호 수용소가 어떻게 생겼는가를 이야기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1969년 7월 김일성이 전체 노동당 간부들에게 보낸 녹음 강연이 있었는데 강연 제목은 "간부들이 안일 해이됐다.때문에 간부들이 혁명화 할 때 대하여" 이러했는데 여기에 근거하고 생긴 시기가 1969말이고 첫 입소생이 박연민, 주허숙 부부와 시모와 1명의 딸(대외봉사부문에 근무 평양)이었으며 당시 1반부터 4반까지가 구읍리였고 5반부터는 입석리였으며 10작업반까지 있었습니다.
배가 나온 사람들도 15일이면 배가 들어갔고 그곳에 들어간 구성을 보면 가족단위, 독신자이고 가족단위에는 장본인, 비본인으로 되어있고 독신자인 경우는 다 장본인이었습니다.
초기에는 간부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물론 그 후에도 외국의 대사로 갔다 와도 요덕 수용소로 끌려왔습니다.
사단장들, 장령들, 행사부문종사자, 호위국 출신, 유학생(군사부문-프른제 아카데미) 그 이외 정성희 안과박사, 신불출, 김홍식 등 남한 출신 배우 귀국자, 최승희 제자 등등 그들 중 살아나간 사람은 극소수이고 모두 다 죽었지요.
실컷 당의 목소리를 내라고 하여 써먹고 그 무엇을 잘못했는지 조차 모를 죄명을 씌워서 죽음으로 몰고 가는 당국자들의 말로야 말로 눈에 보는 듯 합니다.

15호 수용소 수감자들의 죄명은 "김일성의 목에 혹이 났다"고 한 말이 죄가 되었고, 김일성 석고상을 깬 사람, 김일성 초상이 있는 신문으로 장판을 바른 사람, 외국 비디오를 보거나 이웃에게 돌린 사람, 남한방송을 들은 사람, 저와 같이 말실수(성혜림 건) 등 정말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야 죄도 될 수 없는 죄명으로 8년, 10년 또는 그곳에서 영영 죽게됩니다.
이러한 나라가 지구상에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 뿐이겠습니까? 정신병자, 바로 미친 사람들이 무슨 말인들 못하겠습니까?
그런 미친 사람들을 모아서 가두어 놓은 수용소도 바로 요덕수용소 입구에서 우측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정신병자이면서 김일성에 대한 발언을 하였다고 끌어 모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독감방에 가두어 죽게 하였으며 상,중,하 법을 결정해 놓고 일을 시켰으며, 정말 세상이 알면 기고만장할 지경인 것입니다.

요덕에는 구읍리와 산이 가로 막혀 있는 용평지구가 있습니다.
그 곳에는 지주, 치안대, 종교인, 월남자 가족이 있는데 1세대는 다 처단되고 일부 살아있는 할머니와 2세 가족들입니다.
끌려온 사람들은 지리적으로는 평원, 어파 그리고 황해도 삼천, 배천, 신계, 곡산, 연안, 개풍군 옹진, 해주, 재령, 은률, 태천 구성 등지에서 모아 와서 1975년 초부터 영원히 나올 수 없는 완전통제구역으로 설정하였습니다.
해방된 땅에서 죄 없이 살아온 그들이 무슨 죄를 지었다고 그들을 다시는 나올 수 없는 곳으로 끌고 갔고, 또 그곳에서 남자라고 생긴 것은 다시 구류소로 또 끌고 가서 죽여 버려 결국 씨를 말리는 참으로 무서운 곳입니다.

최근 소식통에 의하면 북한당국이 위성사진을 통해 요덕수용소가 세상에 다 공개되었음을 알았는지 덕천관리소로 옮겼다고 합니다.

또한 북한주민이 1993년으로부터 1997년 어간에 기아로 삼백만의 주민이 굶주림으로 죽고 또 죽었습니다.
굶주림 자체가 아닌 왜 굶주려야 되느냐가 문제라고 봅니다.
북한 주민에게 밥만 주면 해결된다고 생각한다면 저는 북한제도에서 60평생을 살아온 사람으로 정말 용납할 수 없습니다.

북한 사람들도 세계 지구상에 존재하는 인간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오직 제도의 차이로 바로 김부자가 전 인민을 가난뱅이와 무지몽매로 구멍이란 구멍은 다 막아 듣지도 보지도 말도 냄새도 못 맡게 했고 손발도 얽어 매여 놓고 바로 이러한 지구상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 인권을 유린했으므로 세계적으로 제일 가난한 나라 열등 민족으로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그것도 그럴 바, 김부자도 등신은 아니지요.
세계발전 역사를 다 연구해 봐도 바로 현재 발전된 자유민주주의가 제일 무서웠기 때문에 옛날 조선 왕정 독재정권을 선택해야 만이 국민을 영원한 종으로 만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가문이 영원한 대통령으로 하는 나라가 지구상에 또 어디에 있으며 그 얼마나 독재가 무서우면 50년 이래 데모 한번 못 일어나는 나라가 지구상에 어디에 있습니까.
정말 치가 떨립니다

북한체제가 없어져야 만이 북한 인민이 사람다운 삶을 살 수가 있다고 봅니다.
인권유린의 첫째 조항이 김부자에 대한 신조화, 신격화를 위해 전 인민을 눈, 코, 귀, 입 그리고 손과 발을 꽁꽁 묶어놓은 것입니다.
이 문제만 해결된다면 북한 인민은 세계가 일전도 도와주지 않아도 잘 살 것입니다.
평범한 할머니지만 60평생 북한제도에서 온갖 세파 속에서 그슬리고 찢기운 삶의 시간 시간을 지나왔기 때문에 확신성 있게 증언합니다.
세계의 자유민주주의 인사들 그리고 평화를 사랑하는 지구상의 모든 인사들, 그리고 국민들이 하나로 뭉쳐 이름 없이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현재에도 갇혀있는 사람들을 위해 노력해주시기 바랍니다.
믿음도 인간의 소망도 사랑도 없는 북한을 반드시 구원합시다.
기발한 착상을 구상하고 구축한다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어 확신합니다.
감사합니다.

2005년 6월 김명숙(가명)

자료제공 : 북한인권시민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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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담녹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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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aa 2005-11-12 15:22:31
    글을 잘 보았습니다
    북한 제도의 인도주의 만행이 어찌 이하나의 사실의 근거하겠어요
    그보다도 더 억울한 루명을 쓰고 해명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땅에 묻힌 고인 들이 얼마나 많기에요
    무서운 일이에요
    그곳에서 살아왔다는것이,,,
    인민을 잘살게 해주시려 찬눈비 맞으시며 논길을 걸으시는 장군의 대한 북한의 노래가 어찌 뜻에 맞는것인지요???,,
    탈북자들의 하나하나의 수기를 볼때면 넘 엄청한 현실 앞에 순종을 받쳐가며 살아온 그들이 동정과 아울러 북한사회에대한 원망과 저주가 한층 더 많이 타오르는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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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술익는마을 2005-11-14 14:10:53
    나는 조상의 잘못을 후손에게 멍에지우는 연좌제를 반대하는 사람입니다만,
    님의 아버지를 비롯 님의 오빠등은 참으로 민족앞에 큰 죄를 지은 빨갱이였군요.
    호주 원주민의 무기중에 [부메랑]이라는 무기가 있습니다.
    이 무기의 특징은 목표를 향해 던지면 그것이 자신에게로 되돌아 오는
    사냥무기이지요.
    결국 님의 아버지와 오빠가 그토록 민족을 배신하고 추종했던 공산주의가
    님을 옥죄고 감시하고 괴롭히는 괴물이 되었군요.
    가만히 생각해보면 님의 입장도 참 안타깝고 불쌍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님의 아버지와 오빠가 괴롭힌 님의 이웃이 얼마나 될까를 말입니다.
    언뜻 북에서 오신 분께 들은 말이 생각이 나네요.
    만약 통일이 된다면 평양시민은 살아날 사람이 없다고 하시던...
    무슨 뜻일까 했습니다만 이내 수긍이 가더군요.
    현재의 평양 시민은 골수 김정일 추종파들이고 그만큼 민족에게 지은죄가 무겁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과연 지방의 백성들이 통일이되면 그들을 가만히 두고 지내겠습니까?
    형제를 죽이고 부모를 괴롭힌 그들을 그대로 두겠느냐는 겁니다.
    그리고 지금 현재의 북한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미국도 아니고 남한도 아닙니다.
    그럼 그들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역설적이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가장두려워하는 것은 그들이 그토록 괴롭히고 못살게 굴었던 그들의 백성들입니다.
    그런 이유들 때문에 사상교육으로 사상교육으로 그들이 외부소식을 알지 못하게 귀막고 입가리고 더욱더 옥죄이는 것입니다.
    님의 글을 읽어보니
    님께서 당한 고통만 나열 했지 형식적으로라도 님의 아버지와 오빠가 저지른 일에 대한 반성은 전혀 없는것 같아서 참으로 안타깝더군요.
    요즈음 일본인들도 자기 조상들이 저지른 일에 대해서는 반성을 전혀 모르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요?
    연세가 많은 님께 남한에서 나서 풍요롭게 자란 제가 막말을 한것같아서 참 안타깝고 죄송하네요.
    하지만 이런글 쓰실때는
    이글을 읽으시는 대다수 힘없고 불쌍한 탈북자들께 비록 형식이나마 사과부터 하시는것이 순서이고
    도리일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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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변남자 2005-11-24 23:10:20
    술익는 마을님 공산군이 국군을 살해했다면 국군은 또 얼마나 많은 북쪽 사람을 죽였겠나요?난 연변조선족인데 우리 할머니옆집에 사는 70세되는 할머니의 남편도 한국전쟁때 국군에 의해 죽었다고 합니다..
    당시 연변조선족들이 미군,아니면 국군에 의해 죽은인수 상당수를 차지합니다..
    전쟁에서 누가 옳다 그름이 없습니다.. 량쪽이 모두 손해죠..
    지금은 전쟁을 떠나서 우리민족을 살릴때라고 봅니다..
    한국전쟁보다..일제시대보다 더 엄중하고 막심한 수난,재앙이 우리 민족한테 떨어졌다고 생각됩니다..
    한국,해외,북한내부동포.. 전세계 모든 우리 민족의 힘으로 김정일 정권을 뒤엎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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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술익는마을 2005-11-30 19:26:24
    연변남자/ 님 조언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님의 글에 대해서 반론하고자 합니다. 저는 국군과 인민군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는 않았습니다. 어차피 그 일들은 우리민족이 지고 가야 할 십자가 입니다.다시 말해서 전쟁 상황중에는 어쩔 수 없는 살육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글을 쓰신 분의 부모님은 남쪽사람이면서도 사회주의 건설에 앞장섰던 사람이며 1970년까지는 그들의 후광으로 잘 살았다고 했습니다.
    문맥을 잘 이해하시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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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듬이 2006-06-05 17:00:59
    술익는 마을님의 글에 이해가 가네요.그간 독재자의 손발이 되어 잘살어 오다가 하루아침에 수용소로 가게되었다는 이야기이며 평상시에 일반 평민들이 생활하는 것은 이해를 못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줄 잘못선 일일까요?
    이제 지나간 과거이야기이지만 늦게나마 반성을 하셨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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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다듬이 2006-07-28 20:44:00
    이글를 쓰심으로 그간의 잘못을 반성하는 것으로 판단 하실수도 있습니다.
    괴뢰 정권으로 부터 하루아침에 악굴의 수용소로 가게됨과.그곳에서 만난 죄없는 사람들를 보심으로 인해 절실히 잘못된 괴뢰 정권임을 느낀걸 알수가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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