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들이 겪는 수모와 인신매매" - 이경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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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희 : 북한 양강도, 2000년 12월 입국 신분에 따른 결혼의 제약 저는 양강도의 아버지가 남한출신인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성분이 좋지 않아 형편이 어려워서 시집도 제 마음대로 갈 수 없었습니다. 당시 북한에서는 못 먹고 힘드니까 입쌀을 배급받는 평양사람이나, 국경경비대원, 안전보위부원에게 시집가는 것을 최고로 여겼습니다. 또한 부모님들까지 챙겨드리기 위해서라도 조금이라도 배급을 더 타는 곳으로 시집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부모님이 남한출신이라고 아무도 데려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한 광산에 국문학부 교원으로 갔습니다. 교원이 왔다고 하니까 한 남자가 백과사전이고 뭐고 매일 와서 책을 빌려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느 날 그 사람이 합숙하는 곳으로 가보니까 책이 많았습니다. 예술기동대에 속해 있었던 그는 저에게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남자의 아버지가 옛날 남한에서 통일혁명당 당수 김종태 씨와 같이 지하투쟁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우연히 들춰본 그의 일기장에는 ‘종파는 씨 종자까지 없애겠다’는 내용의 김정일의 교시내용이 적혀 있었고, 그 대목에서 눈물방울 같은 것이 떨어져 젖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의 일기장에는 그의 집안이야기도 적혀 있었는데, 그 안에는 종파사건과 관련해서 당시의 중앙검찰소 소장의 이름도 적혀 있었고, 그의 아버지가 박헌영, 이승엽과 같이 활동하던 중 그들에게 지워진 비판까지 그의 아버지가 감싸주려다가 죽었다는 이야기가 적혀있었다. 출신성분 때문에 고민해온 처지가 저와 비슷하기도 하여 그가 더 좋아졌습니다. 하지만, 막상 그 사람과 결혼하려고 하자, 친척들의 반대가 심하였습니다. 그의 출신성분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그 사람과 결혼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보내셨습니다. 힘든 가정생활, 뇌물을 바쳐야 하는 이혼재판 결혼생활은 남편과 성격도 서로 맞지 않았고, 예전 그 사람이 생각나 남편을 살갑게 대하지 못하니까 어느 날부터 남편이 저를 때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남편만 해도 괜찮은데 시동생까지 함께 나를 때렸고, 시어머니도 말리는 척 하면서 ‘이 계집이 우리집 식구들은 막 되어 먹은 사람들이라고 떠벌이고 다닌다’고 거들며 그냥 맞도록 내버려두었습니다. 하지만 남편에게 맞았다고 해도 안전부에 이야기할 수도 없고 거기에서 해결을 해주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남편에게 맞은 것은 오로지 내 망신이었습니다. 참다못해 짐을 싸들고 시댁을 나섰지만, 출장증이 없어서 다른 지방에 있는 친정으로 갈 수도 없어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방황하다가 결국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남편은 이밥(쌀밥)만 먹으려고 했습니다. 나는 매일 출근을 해야 했지만, 그래도 남편에게 맞지 않으려면 어렵게 시간을 내어 배급 받은 강냉이 쌀을 팔아서 술을 만들어, 그것으로 이밥을 샀습니다. 왕복 60 리를 걸어가 기차를 타고 가서 감자를 캐어 돌아와 그제 서야 제 끼니를 때울 수 있었습니다. 너무 많이 고생을 하다보니, 병이 나서 입원할 정도였습니다. 40일 입원해 있는 동안 심근경색 진단을 받았습니다. 시집에서는 ‘심근경색은 김일성도 죽는 병인데, 우리 집에서는 상치기를 안 하겠다’고 하면서 친정어머니에게 나를 데려가라고 하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제 병은 ‘심근경색’이 아닌 ‘급성심장긴장증’이었습니다. 의료기술이 낙후되다보니 오진이 내려진 것이었습니다. 퇴원할 때까지, 시집에서는 누구하나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눈 밖에 났구나’ 싶었습니다. 섭섭했지만, ‘그냥 참고 돌아가 살아야지’ 하고 생각했는데, 한 동네 사는 언니가 어느 날 찾아와 하는 말이 “넌 뭐하려고 거기서 사냐. 너 죽은 줄 알고 다른 여자가 들어갔는데……” 저는 그냥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냥 친정으로 돌아가자’ 그렇게 생각하고 이혼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재판소에서 이혼을 안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시댁이 잘 살았기 때문에, 나무를 두 트럭이나 실어 보내고, 휘발유를 100리터나 사서 재판소에 바쳤지만 잘 되지 되었습니다. 더 바치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원래 시 재판소로 갔어야 했는데, 제 수업을 들은 사람들이 많은 도 재판소로 찾아가서 직접 빚어둔 술을 바치고, 거기서 정해준 각본대로 재판장에서 대답하여 마침내 합의이혼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자유를 박탈당하는 5과 사업 이혼한 이후 새로 일하게 된 곳에서는 상급자가 너무 치근대는 것이 싫어서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제 아버지뻘 되는 나이였습니다. 그가 너무 심하게 치근대자 저는 ‘그저 딸처럼 생각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 후 다른 사람에게는 모두 부츠를 내어주는데 저만 안주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런가 하고 물어보니까 ‘쟤는 곧 내보낼 애니까 안줘도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 때 마침 제 어머니와 한동네 살던 한 지도원이 ‘조금만 기다려라. 5과에 자리를 알아봐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결혼을 했다가 혼자가 된 여자가 5과에 들어간다는 것은, 쉽게 말해서, 다시는 남자를 안 만나겠다는 조건으로 혈서를 쓰고 ‘궁녀’처럼 중앙당에 들어가서 가정부 일을 하는 것입니다. 평생 굶지 않고 부족함 없이 살 수는 있지만, 일체의 자유는 박탈합니다. 하지만 그렇게도 들어가는 것조차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운 일이며, 북한에서는 그렇게 팔려가더라도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에 좋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일단 그 곳을 사직하려고 했는데, 사직도 쉬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후 한 동네 사는 언니의 도움으로 장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 언니에게 200원을 빌려서 매월 10%씩 이자를 주었습니다. 처음에는 강동군 탄광지역에 장사를 하러 갔습니다. 아는 사람은 없었지만 탄광지역이기 때문에 입쌀과 기름이 배급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물품을 풀어놓으면 두루 돈이 되었습니다. 강동군에 도착하여 한 할머니를 만나 그 집에서 7일간 머물렀습니다. 그 할머니가 딸에 대해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딸은 외국어대학교를 졸업했는데, 어느 날 집으로 차가 한대 오더니 딸을 태워 어디론가 떠나고 손자는 만경대혁명학원으로 데려갔다고 하였습니다. 좋은 곳으로 가는 것 같아 그런가보다 했고, 1년 후 어느 날 딸이 예전보다 더 예쁘고 젊은 모습으로 돌아왔는데, 내내 검은 안경을 벗지 않아서 제대로 눈을 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상한 느낌이 들었고, 옆에는 계속 간부 같은 사람이 함께 있었다고 합니다. 딸이 슬며시 할머니를 끌어안으며, 주머니에 편지를 살짝 넣어 건네었다고 하였습니다. 할머니는 제게 그 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 딸은 혈서를 쓰고 5과에 지원하였는데, 외국어를 잘해서 다른 곳으로 간 것이었습니다. 어느 나라에선가 기생을 풀어서 외화벌이에 성공했는데, 북한도 그것을 따라서 외화를 벌기 위해 기생호텔인 양각도 국제호텔(평양 대동강 양각도, 1995년 개관)을 지었습니다. 국가에서 기생호텔을 만들려고 하는데 그 딸이 나이는 적지 않지만 외국어도 잘하고 노련하며 세련되어서, 그 곳으로 보내진 것이었습니다. 기생이든 무엇이든 딸이 잘 있다고 하니까, 그 할머니는 그런가보다 싶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2년인가 있다가 할머니의 아들이 안전부에 있다가 어느 날 탄광으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딸이 혹시 잘못 되었나 덜컥 걱정이 되었는데, 손자는 만경대학원에 그대로 있었기 때문에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어쨌든 늘 소식이 궁금했는데, 아들이 찾아보고 수소문하다가 딸이 어느 외딴 섬으로 유배되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딸은 유배되었고, 손자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대로 만경대학원 다니고 있었습니다. 무언가 사고를 치긴 하였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중앙당 내막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격리되어 죽어야만 사망여부가 확인될 수 있는 처지였습니다. 할머니와 그 이야기를 하며 함께 한참을 울었습니다. 저는 덜컥 겁이 났고, 5과도 갈 곳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기차간에서 겪는 수모 강동군과 길주 사이를 장사하러 오갈 때, 기차간에서 본 북한여성들의 수모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북한에서는 기차를 타고 다니려면 증명서를 내어야 하는데, 발급받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당시 저는 150~200원 정도 뇌물을 주어서라도 증명서를 발급받아 다녔지만, 많은 여성들은 돈을 아끼기 위해 증명서 없이 그냥 다니곤 하였습니다. 기차역마다 증명서가 있는지 계속 검열하는데, 증명서가 없는 사람들은 한 곳에 전부 몰아놓고 때린 뒤 어디론가 끌고 가곤 하였습니다. 검열원들은 증명서가 없는 여성들을 잡아내면, 여성에게 소중한 자궁이 있는 곳을 걷어차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어떤 때는 너무 심하게 걷어차인 여자들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얼굴만 시꺼매져서 배를 움켜쥐고 뒹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검열원들의 비정함은 심지어 임산부까지도 그곳을 걷어찰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임신여자를 심하게 걷어차면 법에 걸리니까 그나마 심하게 차지는 않았는데, 그 임산부가 창피해하며 돌아서자 다시 엉덩이를 세게 걷어찼습니다. 증명서가 없는 사람에 대한 폭행은 할머니라도 예외가 될 수 없었습니다. 어느 할머니는 걷어차이고 강제로 끌어내리려 하는 것을 내리지 않으려고 버티다가 열차가 심하게 덜컹대는 순간 발이 껴서 절단되어 피를 철철 흘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이러한 장면들을 보면서 얼굴이 확 달아오를 만큼 모멸감을 느꼈고, 여성들이 돈이라는 것을 벌자면 여성으로서의 모든 것을 다 버려야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수모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결국 북한을 떠나 중국으로 건너가야겠다고 더욱 마음을 굳히게 되었습니다. 중국에서 겪는 인신매매 우선은 먹고 살기 위해서라도 중국으로 넘어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밀수하는 사람을 알게 되어서 오징어 등을 팔면서 먼저 동생들을 보냈습니다. 공짜란 것은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대신 여동생들을 시집보낼 때, 가고 싶은 곳으로 보내주도록 부탁했습니다. 인신매매 일당들은 동생을 장백현으로 관광 온 한국남자에게 소개시켜주었고, 운 좋게 동생은 그를 따라 한국으로 먼저 갔습니다. 저는 한 식당에서 일했습니다. 열심히 일하다보니까 한국인 사장님 부부가 돈도 더 주고 잘 대해주었습니다. 그러자 같이 일하는 조선족 여자들이 시기했고, 조선족 남자들은 탈북자가 있으니 위험하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끝내 그곳에서 나와야 했습니다. 다음 일자리는 연길에 다방 겸 노래방이었습니다. 당시 탈북자들이 매일 버스로 몇 대씩 실려 갈만큼 단속이 심했던 시기라, 한국인 사장님이 차라리 노래방에 숨어 있는 것이 안전하다고 배려해 주어서 지하 노래방에서 청소를 했습니다. 보통 일자리는 구하기 힘들었고, 만일 제가 발각될 경우 사장은 5000원씩 벌금도 내야 하니까, 저를 중매로 시집보냈습니다. 그 동네에는 북한에서 팔려 시집온 북한여자들이 많았는데, 한 여자는 500원에 팔려와 아이를 낳았지만 호적등록(3000원 정도 소요)을 하지 못하고 있었고, 앞의 정미소에 사는 여자는 1000원 정도에 팔려와 아이를 낳고 호적등록까지 하였습니다. 그나마 두 여자는 잘 살았지만, 40대였던 다른 한 언니는 32살 남자와 살았는데, 자신은 늘 잘해주고 순종하고 살았는데, 그 남자는 매일 술 마시고 두들겨 패곤 했습니다. 그 언니와 같이 한국으로 가고 싶었지만, 그녀는 아기도 있었고 쉽게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닌데다가, 까딱 잘못했다가 일이 잘못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신중을 기했습니다. 그 언니와 같이 살던 남자는 늘 저를 경계하며, ‘창고에 있는 도끼로 각을 뜨고 배낭에 넣어 야산에 묻으면 넌 세상에서 아무도 찾지도, 문제가 되지도 않는다’고 겁을 주곤 했습니다. 그래서 그 집에서 떠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혼자서는 무서워 떠나지 못하겠기에 계속해서 함께 길을 떠날 여성동무를 찾으려 했습니다. 일하며 모아둔 돈과 한국에서 동생이 보내준 돈을 쥐고 있으면서 어떻게 하면 마음 맞는 사람을 구할 수 있을까 하면서 사람들을 살펴보았기에 여성들이 인신매매 당하면서 다닌 사연들을 모두 알 수 있었습니다. 그 동네에서 2년을 살면서 많은 일을 보고 들었습니다. 28살 된 한 여자는 가난한 집으로 1000원에 팔려왔는데, 남자가 임신을 시킨 후 다른 남자에게 팔고, 팔려간 곳에서는 또 유산을 시키고, 그 즉시 장작을 패도록 혹사시키기에 도망갔다가 붙잡혀서 다시 그 동네로 팔려온 것이었습니다. 한족에게 팔려간 한 여자는 그 남편이라는 사람이 매일 집을 나가면서 칼을 든 채로 문을 잠그고 들어올 때는 다시 칼을 들고 들어오면서 그 여자를 감금했습니다. 그 여자 또한 도망을 치면 늘 인신매매꾼들에게 팔리고, 팔고 팔리는 것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제가 결혼한 남자는 돈을 벌기 위해 원래 부인을 한국으로 위장 시집보낸 상태였습니다. 그는 저를 낮에는 그냥 일만 시키고, 밤에는 끌어안고 자는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돈을 주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저를 언제나 떠날 여자라고 말하고 다니곤 하였습니다. 중국에서는 항상 사는 것이 불안해 그 남자를 떠나기로 결심했고 2000년 12월 주위의 도움으로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이경희(가명) 자료제공 : 북한인권시민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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