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하는 삶, 함께하는 삶 - 김향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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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가을이다. 내가 대한민국에 와서 4번째로 맞이하는 가을이다. 이런 가을이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쓸쓸해진다. 내가 한국으로 오던 도중 북한으로 북송 될 때가 4년 전 가을이었다. 그래서인지 가을이 오면 마음이 허전하고 기분이 이상해진다.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소름이 끼쳐 잠을 깨곤 한다. 때로는 무서운 악몽 속에서 밤을 지새울 때도 있다. 지금도 내가 어떻게 되어 대한민국에 오게 되었는지 믿겨지지 않을 때도 많다. 나는 오늘도 대학로를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 끼어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문득 걸어오면서 내 다리를 내려 다 보았다. 북송 당하면서 다리에 마비까지 왔던 내가 정말 장애인에 가깝게 걸어야 했던 내가 오늘은 이렇게 마음껏 활보 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믿어지지가 않는다. 아마 내가 대한민국에 오지 않았다면 영원히 장애인으로 살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정말로 나에게 새로운 삶을 준 대한민국에 항상 고마운 마음뿐이다. 나는 북한에서 19년을 살아봤고 대한민국에서 4년간을 살아봤다. 내가 바라 본 두 나라, 각자의 이념을 가지고 있는 이 두 세계를 바라보는 나의 작은 마음은 왠지 씁쓸하다. 19년 동안 북한당국에 속고만 살았다고 생각하니 정말 억울하기 그지없다. 그런 땅에서 충성심, 애국심을 외쳤던 내가 정말 어리석다. 이 나라가 부모에게 효도를 하는 그런 문명한 도덕을 가르칠 때 그 나라는 오직 어버이수령에게만 충성하는 공산주의 도덕을 가르쳤고 이 나라가 이웃과 친구들에게 배려하는 마음을 가르칠 때 그 나라는 서로 감시하고 고발하는 체제를 가르쳤다. 또 이 나라가 국가발전에 이바지 할 수 있는 최첨단 기술과 지식을 가르칠 때 그 나라는 왜곡된 수령의 역사를 가르치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런 독물을 마시고 자란 우리들이어서 우리네 가지마다에 쉽게 건강하고 싱싱한 열매가 맺히기 어렵다. 하지만 나도 하루 빨리 이 나라의 물과 공기를 마시며 다시 찾은 이 땅에서 새로운 아름다운 열매를 맞으려고 오늘도 열심히 노력하며 살고 있다. 나는 어려서 일찍 아버지를 잃었다. 내가 4달 될 때에 교통사고로 돌아 가셨다. 어머니는 어린 나를 그 험난한 땅에서 금이야 옥이야 아껴가며 예쁜 딸로 키워주셨다. 나는 이런 어머니가 있어 아빠 없는 설음을 모르고 지금까지 어머니 사랑 속에서 남부럽지 않게 잘 커왔다. 어머니는 지금까지 전 생애를 나를 위해 바치셨고 이런 어머니에게 있어서 나는 하나밖에 없는 살붙이며 또 늘 의지해서 바라보는 남편이기도 하다. 이런 어머니의 소중함을 나는 한국에 와서야 깨달았다. 정말 북한에서 살 때에는 조국의 품을 어머니 품이라고 장군님을 아버지라고 외치며 배워왔던 나에게 있어서 어머니는 낳아주셨을 뿐이지 진정한 나의 어머니는 당의 품이라고 늘 믿어왔고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왔었다. 정말 낳아준 어머니에게도 마음껏 효도할 수 없는 나라, 사람의 윤리와 도덕마저도 우롱당하는 그 나라가 원망스럽다. 내가 19살 되던 해에 어머니와 나는 한국으로 먼저 오게 된 친척의 도움으로 탈북을 시도하게 되었다. 그때는 정말로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 또 내가 왜 탈북을 하는지 조차 모르고 그냥 어머니를 따라 나섰다. 내내 마음속으로 장군님의 고마운 은덕을 저버리고 이렇게 나라를 배반하고 도망쳐도 되는가 하는 생각으로 어머니의 선택이 마땅치 않아 보였다. 그러면서도 어머니와 한시도 떨어져 살 수 없는 몸이라 어머니만 믿고 그 험한 길을 따라나섰다. 그렇게 마음을 조이며 탈북 하다가 중국 공안경찰에 붙잡히게 되었다. 정말 이제껏 여리게만 살아왔던 나에게 있어서 내가 세상을 알게 된 계기였고 내가 처음으로 겪어보는 인간 생활의 험난한 길이었다. 나는 중국 공안경찰들에게 매달려 애원했다. “우리는 북한에 나가면 죽어요. 이 큰 땅에서 이 작은 생명이 살 자리가 그렇게도 없어요? 살려주세요...제발 살려만 주시면 시키는 대로, 하라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살려주세요!” 하지만 그 어떤 애원도 눈물도 나라를 잃은 피난민에게는 소용이 없는 것이었다. 어머니와 나는 공안들에게 이끌려 중국 도문 변방의 한 수용소에 이송 되었다. 수용소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정말 놀랐다. 수많은 북한 여성들이 다 죄수복을 입고 줄 맞춰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나는 가슴이 메어 지는 것 같았다. TV에서만 봐오던 일제 때 종군 위안부 모습을 방영케 했다. 살길을 찾아 남의 나라에 갔다가 이렇게 쫓겨 오는 불쌍한 우리 조선민족~! 그때 나는 마음속으로 이런 말을 외쳤다. “장군님, 장군님께서 지켜오고 세우신 강성대국(强性(大國)은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장군님께서 ‘세상에서 제일가는 행복한 민족’이라고 자부하고 가르쳐왔던 사회주의 공산주의는 과연 어떤 것입니까?” 그때서야 나는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진정으로 어디인가를 깨달았다. 그때서야 비로써 지금껏 속아 살아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며칠 후 어머니와 나는 북한으로 후송 되었다. 북한 보위부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나라를 배반한 반역자라고 몰아댔다. 하지만 나는 그런 그들이 너무 불쌍해 보였다. 김정일한테 속으면서 발라 맞추며 살아가는 그들이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보위부 안에서 배고픔과 굶주림, 이겨내기 힘든 벌책, 정말 어린 나에게 있어서 감당하기 힘든 너무도 어려운 고난이었다. 다리에 마비가 오기 시작했고 정말 일어설 힘조차 없었다. 아마 내가 그때 진리를 깨닫지 못했더라면 그 험한 고초를 치루며 다시 재 탈북을 시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죽어서라도 기어서라도 가리라! 언젠가는 꼭 찾아 가고야 말거야!’ 그들의 압박이 더 가해질수록 나는 마음속으로 이런 맹세를 더욱 더 다짐했다. 정말 북한정권은 너무도 순진하게 충성하며 살아온 나에게 너무도 큰 배신을 던져주었다. 19년 동안 그렇게 믿고 살아왔던 충성심이 불가 몇 달 사이에 그렇게 큰 반발심을 낳을 줄 몰랐다. 간난신고(艱難辛苦) 끝에 나는 어머니와 함께 2002년 말, 꿈결에도 그리던 대한민국의 품에 안겼다.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내렸다. 인천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는 내내 감격을 금치 못했다. 깔끔하게 정돈 된 포장도로와 줄지어 달리는 자가용차와 버스들, 꿈에서만 그리던 이상 세계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때 나는 소중하게 찾은 이 땅에서 열심히 살아보리라 마음속으로 다짐했었다. 어머니와 나는 ‘하나원’에서 2개월 교육과정을 마치고 대전으로 집을 배정 받게 되었다. ‘하나원’에서 나올 때만 해도 나는 우리집이 생긴다고 하니 넘도 마음이 들떠 있었다. 정말 생각만 해도 행복했었다. 내가 설계하고 그려 보았던 그 멋있는 집! 이런 환상은 오래 가지 못했다. 담당 형사님과 함께 집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집에 방도 아주 작은 방이었다. 화장실을 성인 한 명이 들어가서 샤워하기조차 어려울 만큼 좁고 좁은 사이즈에 또 청소를 안 한지 며칠, 아니 몇 달이 지났을 지도... 쥐똥이 여기 저기 널려 있는 그런 집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이 광경이 현실임을 알고 나는 받아들였다. ‘아니야, 지금 이 조그마한 집이라도 어디야.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자’라는 생각을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집이 작으니 청소하기도 쉽고, 집안 페인트칠, 벽지를 바르는 것도 얼마 안 걸렸다. 청소를 시작한 지 꼬박 3일 만에 번듯하게 꾸며 놓았다. 정말 한국에 온 것을 후회할 때도 있었다. 한국에만 오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한국에만 오면 부자처럼 사는 줄 알았는데... 이런 생각들이 때로는 나를 나약하게 만들었고 좌절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나는 다시금 생각했었다. ‘이 땅에 빈손으로 찾아온 내가 무슨 염치로 더 큰 것을 바래! 자그마한 것에 감사해하고, 또 감사하자!’ 그랬다. 나는 잠시나마 나를 잊고 살았다. 나는 내가 이 땅에 큰 통일영웅 마냥 내 자신을 세워보았고, 그런 나에게 이 땅에 모든 대접은 다 응당한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언제나 우리 탈북자들에게는 특혜와 ‘당연히’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녀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내가 너무 부끄러웠다. 나는 그때부터 내 자신을 낮추었다. 4년이라는 길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 동안 한국에서 살아보았지만 아직 감히 적응이라는 말은 못하겠다. 내가 일하던 식당 사장님이나 공부하던 학원 선생님들, 그들은 항상 나에게 열심히 살라고 고무적인 말씀을 해주셨고 나를 친자식처럼 아껴주셨다. 이런 분들이 계시기에 나는 이 땅에서 떳떳이 살아 올 수 있었으며 그런 고마운 대한민국 국민들이 있어서 탈북자라는 설움을 모르고 오늘까지 행복하게 사는 것 같다. 나는 지금 성균관대학교 학생이다. 이 땅은 아무것도 한 것 없는 나에게 대학생이라는 영예를 안겨주었고 다른 학생들과 같이 아무런 근심걱정 없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도록 크나큰 행복을 안겨주었다. 나는 얼마 전 MBC에서 신동엽 씨와 함께 ‘남북 청소년 알아맞히기 경연’에서 MC로 출연하게 되었었다. 나는 정말 수많은 탈북자들 중 평범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이런 내가 그런 중요한 프로그램에 참가 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영광인가? 어머니는 너무 기뻐 눈물까지 흘리셨다. 또 수많은 팬들이 나를 응원해주셨고 반겨주었다. 정말 평범한 대학생인 내가 받아 안기에는 너무도 큰 행복이고 자랑이었다. 나는 지금 너무나 행복하다. 내가 북한에서 살았더라면 아마 평생토록 이런 행복을 받아 보지 못하고 자랐을 것이다.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런 고마운 땅에 보답하는 그 날까지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아직은 많이 부족한 내 자신이지만 이 땅에 효도하는 그 날까지 달리고 또 달릴 것이다. 조금만 기다려 달라. 우리도 갈 것이다. 이 나라도 의식 못했던 50년대, 힘들었던 60년대, 자각했던 70년대, 분발했던 80년대, 성장했던 90년대를 거쳐 오늘의 21세기의 위대한 대한민국이 되지 않았는가? 포기와 좌절과 절망을 이겨내며 내일 날 승리하고 보답하는 우리가 될 것이다. 믿어 달라! 결코 힘들 때 우리를 품어주고 키워준 이 땅에 1등 가는 자식이 될 것이다. 언젠가는 우리 탈북자들도 이 땅에 효도하게 되는 그날이 꼭 올 것이다. 2006년 10월 15일 김향미 자료제공 : 북한이탈주민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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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살아주는것에 .
너무 고마워요.
아름다운 향미씨 행복하세요 .
처음은 힘들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이 통하자 서로 많은 이야기를 할수가 있었어요 급여 .정치 경제 장마당등등
저도 잘 정착할수있게 열심히 살게요
우리모두 잘정착하여 이나라의 1등국민이 되도록 노력해요
정말 좋은 날이 올겁니다...우리 모두 화이팅....
우리 탈북자들 누구나 님처럼 생각하시면 힘들고 어려운 이사회에 잘 정착할건데....
아직도 우리탈북자들 정착을 하지못해 마니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향미씨처럼 열심히 살았으면 좋겠네요
개정은이 일당들은 처죽여야되지만,북한 주민들에겐 안타까운 마음가지고 있습니다.
이게 대다수 한국 국민들의 생각입니다..탈북자분들을 차별하는 인간들은 임수경...같은
골수까지 빨갱이 사상에 물든 개종자년놈들이지요.이것들을 싹 수거해서 그들이 씨부려대는 지상낙원으로 보내버려야되는데...그렇게 북한을 찬양하면서 정작 북한으로 월북하는 인간들이 없다는것만 봐도.종북좌파빨갱이들이 씨부리는 말에 모순이 있다는걸 스스로 자인하는거죠..이땅에 빨갱이.자생적 종북빨갱이.권력과 돈벌이를 위해 빨갱이짓하는 폐기물같은 쓰레기들이 너무 많습니다.얼른 통일이 되어서 이런 폐기물같은 쓰레기들이 북한 주민들한테 맞아 죽는걸 보는게 소원입니다..탈북자분들 사실이 이러니 누가 차별하면 걍 무시하십시요.힘드시겠지만,개가 짓는구나 생각하면 속편하실겁니다...파이팅하십시요.
함께 성공하셨다니, 진심으로 축하합니다,,,힘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