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에게 들려 줄 엄마의 “서울살이”이야기 - 윤혜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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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을 들면서 휴일 저녁 이맘 때면 늘 한가로운 시간이어서 오늘부터는 북에 있는 아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엄마의 “서울살이”이야기를 쓰려고 한다. 내 아들은 지금 내 곁에 아니라 아빠와 함께 북한의 청진에서 살고 있다. 올해로 15살, 오늘도 나는 전철에서 함께 타고 가는 내 아들 또래 남학생 여럿이 둘러서서 가벼운 장난과 즐거운 얘기들을 나누는 모습을 넋없이 바라보다 끝내는 손수건을 눈가에 가져가고야 말았다. 처음 서울에 집을 잡고 나왔으나 인제야 자유로워졌다는 즐거움은 한 순간, 아무리 둘러봐도 나 혼자뿐이라는 서러움과 죄스러움에 소리 내어 울었을 때도 아들의 이름을 불렀던 것 같다. 서울살이가 어렵고 힘들 때마다 아들을 떠 올리며 힘을 얻었고 기쁜 일이 생기면 나도 모르게 내 아들과 얘기를 하며 즐거움을 갖는다. 아들이 뭔지 곁에 없는 아들이라도 생각만 해도 정말 힘이 생기고 그립기만 하다. 통일이 언제 될지 몰라도 그 때면 어른이 되었을 아들에게 엄마가 정녕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북한을 떠나온 사연이며 중국살이, 몽골살이, 서울살이의 얘기들을 꾸밈없이 들려주고 싶다. 하염없는 아들과의 대화를 하면서 상념에 빠져있다 보니 몇 시간은 잘 흐른 것 같다. 내일엔 신규주문업체들에 우리 팀이 프로그램을 써 넣은 프로세서 칩들을 계약대로 넘겨주는 날이어서 품질테스트와 파킹을 비롯해 작업스케줄이 빡빡하기에 팀장인 내가 아침 일찍 출근해 작업준비상황을 체크해야 한다. “팀장”의 하루 일과 나는 북한에 있을 때 농업전공의 고등교육을 받고 협동농장에서 작물재배를 시험하던 “농사군”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IT첨단기술을 세계에 자랑하는 대한민국의 손꼽히는 벤처회사에서 “프로그램 라이팅” 실장으로 일하고 있다. 디지털기술로 조종되는 기계나 설비들에는 컴퓨터장치나 마이크로칩이 있는데 이러한 프로세서들이 대상을 어떻게 조종하라는 작업지령을 적은 프로그램이 특수한 메모리칩에 들어있는데 바로 이런 메모리칩에 프로그램을 라이팅(쓰기)하는 작업을 바로 우리 팀에서 하고 있다. 엄지손톱눈금보다 더 작은 메모리칩을 핀셋으로 짚어서 라이팅기계에 장착을 하고나서 컴퓨터조작으로 라이팅하려는 프로그램들을 클릭하여 지령을 주면 오색등이 깜박이는 라이팅기계들에서 메모리칩에 클릭한 프로그램들을 빠른 속도로 써넣는다. 정확히 라이팅되었는지 체크작업이 끝나고 OK신호가 지시되면 새로운 메모리칩을 교체해 넣는다. 고도의 긴장을 가지고 컴퓨터와 라이팅기계들을 다루는 작업을 내가 지금 원만히 해내고 있다는 것이 농사군의 입장에서는 스스로 신기하기만 하다. IT기술이라고는 상식조차 없던 내가 회사초기에 지금껏 보도 듣도 못한 프로그램을 다루는 일을 배우면서 일을 시작할 때만 해도 내가 과연 이일을 끝까지 해낼 수 있을까 시간이 갈수록 마음이 흔들렸다. 지금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서 절로 얼굴이 붉어지는 해프닝도 연발했다. 기술전수를 받기 시작한 다음날 이었던 것 같다. 모든 것이 눈에 설고 손에 설어 조작방법과 관련된 수많은 영어단어들을 전혀 알아듣지 못해 팀장이 영어단어를 잔뜩 섞어 설명해주는 내용들을 절반이나 알아들었는지? 말귀를 몰라 멍해있는 나에게 팀장이 “ 뭘해요 라이터를 켜주세요.”라고 한다. “라이터? 담배를 피우려나 그런데 하필이면 여자인 나보고 라이터를 요구하나?” 이렇게 혼자 중얼거리며 얼른 다른 남자사원에게 찾아가 라이터를 빌려서 가져왔다. 그리고는 선배사원에게 다가가 라이타를 켜면서 “자요! 라이터를 켰습니다.” 순간 그 선배사원의 눈은 화등잔처럼 금방 커져가지고 와뜰 놀라면서 “ 지금 뭐하는 거예요. 이 라이터를 빨리 커요!” “아니 팀장님께서 금방 저보고 라이터를 켜라고 하시지 않았나요? 그래서 라이터가 없어서 빌려가지고 왔는데...” 내말이 끝나기도 바쁘게 팀장이 배를 그러안고 웃기 시작하더니 웃음을 끊지 못한다. “???”무안을 당해 얼굴이 빨개져 있는 나에게 “불을 켜는 라이터 말고 프로그램을 쓰는 이 프로그램라이터를 켜라고 했는데 코앞에 불을 켜대면 난 어찌라고?” “ 아뿔싸, 어제 프로그램라이팅기계를 라이터라고 줄여서 부른다고 했지! 이놈의 영어 때문에 결국은 뭘 팔리네 ”... 언젠가는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작업지시를 하면서 팀장이 “1번은 큰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라이터로 쓸 때 용량이 큰 1G(기가)짜리 칩을 장착하고 2번은 크기가 작은 프로그램이어서 500M(메가)짜리 칩을 사용하라”고 했다. 기가, 메가라는 기술용어가 익숙지 않은데다가 팀장의 작업지시를 자세히 알아듣지 못하다 보니 숫자뒤에 적혀있는 뒤 글자를 따져보지 않고 숫자가 큰 것이 기억용량이 크겠지 하고 나름대로 판단하여 칩을 라이팅기계에 장착을 했는데 프로그램쓰기가 정확히 완료되었다는 합격지시등이 켜질 대신 조작이 틀렸다는 통지문이 컴퓨터화면에 영어로 표시되었다. 영어를 읽을 수가 없는 나는 뭘 조작을 잘 못했나 생각이 들어 라이팅작업을 자꾸 자꾸 반복하기만 하다 보니 오전 내내 실적을 내지 못하였다. 물어보자니 또 사람들이 배를 끓어않고 웃지나 않을까 망설이다가 마침내 용기를 내어 선배사원에게 물어서야 G와 M 글자의 의미를 따져보지 못해 생긴 오류임을 알게 되었다. 그 때로부터 7개월이 지난 오늘에는 내 스스로가 놀랄 정도로 나는 프로그램을 라이팅하는 도사가 되었다. 내 손으로 라이팅되는 프로그램 칩만 해도 하루에만도 700~800개를 웃돈다. 최첨단설비를 다루는 까닭에 작업장공기마저도 몇 차례 정화되어 공급되는 최적의 깨끗한 작업장에서 위생복을 산뜻하게 차려입고 내 손 끝에서 정밀한 기계든, 집채 같은 기계까지도 자동적으로 조종하는 프로그램들이 수 십 가지의 메모리칩들에 척척 써넣어진다. 오늘도 8시 30분 정각에 회사 전 직원이 모여 작업조직을 하고나서 “열심히!, 조심히!, 긴장하게!”라는 회사 가훈을 합창한 다음 각자 자기 테이블로 기대 앞으로 헤어진다. 난 우리 팀이 맡아 오늘 라이팅작업을 해야 할 프로그램과 메모리칩들을 현물과 주문서를 출고 받아 각각의 기대들에 분배하고 나서 내일을 시작한다. 한시라도 생각이 흩어져 조작을 잘 못하면 아까운 메모리칩이 못쓰게 만들 수 있으므로 작업 전 과정에 늘 긴장하고 조심해야 한다. 하루 작업의 결과는 작업결속 후 각자의 컴퓨터에서 집계되는 퀄리티 체크결과로 판정된다. 제품 출하계약은 무조건 지켜져야 한다. 계약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회사만 불이익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직접적인 불이익이 된다. 회사가 잘 돌아가야 나도 여기서 밥 먹고 사는 사람이기에 신바람난다. 북에서는 자본가라고 하면 “노동자들의 피땀을 착취하는 천하의 나쁜 사람, 계급의 원쑤”라고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왔고 또 그것에 긍정을 했지만 지금은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오히려 기업가들이야 말로 엄청난 도전과 경쟁 속에서도 자신의 영리뿐만 아니라 수많은 노동자들의 삶을 도맡고 나라의 경제력강화와 위상제고에 가장 적극적인 기여를 하는 애국자라고 생각한다. 오전 작업이 끝나 식사시간이 되면 다들 모여 도시락을 풀어 맛있는 식사를 하게 되는데 여자들이 많은 우리 팀에서는 식사를 하면서도 소곤소곤 참 많은 얘기들이 오고 간다. “팀장! 이 김치가 맛있어. 북한식으로 김치를 담그는 방법을 배워줘” “그런데 팀장이 오늘은 컨디션이 영 안 좋은가봐 얼굴이 좀 부석해있어. 아들생각에 밤잠 설친 거 아냐?” “ 정말 저번에 북에 있는 아들소식을 들었다던데 어떻게 지낸대요?” “ ?! ...” 오리무리안의 거위 운명 나에 대한 궁금증에 늘 주려있는 팀원들의 지청구에 생각만 해도 마음 아파오는 북한생활이 또 상기된다. 함경북도 회령이 고향인 나는 어려서부터 성격이 활달해서인지 학교친구들이 많았고 공부나 학교활동에서 늘 열성적이었다. 부모님께서는 마흔지나 낳은 늦둥이라 집안의 사랑은 늘 독차지했었다. 어려서 귀하게 자라서인지 시집도 그쯤하면 잘 갔었다고 생각한다. 남편은 제대군인 당원에 전자자동화대학까지 나온 터라 공장에서는 재능있는 기사님으로 존대를 받았다. 게다가 내가 인차 제 아빠를 꼭 빼닮은 아들까지 낳게 되자 우리 부모님들과 형제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시집 켠에서도 흐믓 해하였다. 수백만이 아사한 그 지긋지긋한 “고난의 행군”이 없었더라면 모든 것이 부족하고 호구지책에 늘 부대끼는 북한생활일지라도 모두들 그저 그렇게 고루 못사는 북한에서 남들과 같이 그런대로 살고 있었을 것이다. 아니! 아니 오히려 북한의 체제하에서는 필연적인 그 혼란과 기아의 사태가 우리들로 하여금 북한주민 각자의 가정에 심각한 파산과 타격을 주었으나 그 결과로 중국이나 제3국에로의 탈북이라는 극단한 상황도 만들어 내었고 우리네 탈북자들이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거듭나게 한 동기를 부여하지 않았나 하고도 생각한다. 어찌되었던지 그 “고난의 행군”은 우리 작은 가정에서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직장에서 내주는 월급으로는 쌀 몇 킬로그램밖에 살 수 없는 극도의 처지에 몰리면서 생계유지를 위해 주부들이 행낭을 메고 일어섰다. 그 행낭은 남자들도 가히 지기 쉽지 않은 무거운 행낭들이었다. 여자는 메지 못하나 엄마들은 가까스로 메고 일어났다. 최소한 애들만은 굶기지 않으려고 돈이 될 만한 물건들을 두루 챙겨 배낭에 넣고 때로는 쌀값이 싼 농촌으로, 때로는 수산물이 싼 어촌으로 찾아가 쌀과 수산물을 물건으로 바꾸거나 돈으로 사가지고는 집으로 돌아와 시장이나 “메뚜기장”( 단속보안원이 오면 메뚜기처럼 튀어버린다는 의미)에서 되팔아 남긴 돈으로 먹을 것을 구해서 식구들의 “입”을 메웟다. 하지만 여인들의 가냘픈 어깨로 메어다 나르는 장사는 도저히 가족의 정상적인 호구지책이 될 수 없었을 뿐더러 내 경우에는 장사를 할 줄 몰라 밑천까지 다 날리다 보니 도저히 앞으로 살길이 보이질 안았다. 극단한 선택만이 우리가족을 살릴 것 같았다. 나는 동네아줌마들이 돈 벌러 중국으로 많이 가는 것을 보면서도 이 땅에서도 내가 열심히만 뛰면 먹고살 수는 있는데 왜 하필이면 민족반역죄라는 생각만 해도 끔직한 악형이 따를 중죄를 지으며 중국에 가겠는가고 내심 위안하면서 중국에만은 안가겠다던 마음속 마지노선을 넘을 수밖에 없었다. 중국에 가려고 작정을 했다. 어느 날 한 중학친구가 찾아와 중국 연길에 먼 친척이 있는데 그 집을 함께 찾아가 한 달만 일하고 오자, 그러면 1년은 넘게 먹을 돈을 벌 수 있다고 장담하기 때문이었다. 한 달? 생각해 보니 남편 몰래 갔다 오기에는 기간이 넘 길었다. 중국에 간다면 남편이 승인도 해 줄 리가 없어서 그냥 황해도에 식량을 구하러 간다고, 그래서 차랑 제때에 못 타면 한 달 정도는 걸려야 한다고 적당히 둘러 얘기하고 한 동안 남편과 아들이 먹을 식량이랑 의복가지들을 두루 챙겨 놓았다. 남편과 헤어질 때는 몰라도 학교로 가는 아들을 마지막으로 저기까지 멀리 등 뒤에서 바래주는 내 눈에 눈물이 왈칵 나왔다. 혹시나 안 좋은 일을 당해 다시는 내 새끼를 못 보지나 않을까? 제발 갔다 올 동안 앓지 말고 건강하게만 있어주렴, 엄마가 돈을 많이 벌어서 네가 그렇게도 가지고 싶어 하던 게임기도 사줄게.... 마음속으로 애와 하염없이 부탁의 말을 남기면서 친구와 나는 낮에 두만강 근처에 옮겨 숨어 있다가 밤을 타서 국경경비초소 병사들이 시키는 지점으로 가슴위로 오르내리는 두만강물결을 가르며 도강을 해 중국으로 건너왔다. 연길까지 들어오느라 발이 다 부르트도록 공안초소를 에돌아 산을 넘고 또 넘고, 버스를 타고 가면서 발각 될까 간이 콩알만 해서 마음을 조이던 생각을 떠 올리면 지금도 몸이 다 오싹해진다. 연길에 무사히 들어왔으나 그 다음이 순탄치 않았다. 한 달만 벌고 돌아간다는 것이 헛된 꿈이었음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중국 땅에 들어 온 첫 순간부터 북한여성들은 여자를 물건처럼 팔고 사는, 인신매매꾼들의 표적이 안 될 수 없었고 탈북자라는 것을 안 순간부터 치한들은 돈과 위협공갈로 우리를 괴롭히고 정녕 응하지 않으면 공안경찰에 고발 해 도로 북한에 끌려가게 만들었다. 하루 종일 허리 펼 새도 없이 몇 십 킬로그램의 고기를 삶아서 음식을 만들고는 지친 몸에 저녁에 식당에 있는 침실에 들어오면 또 전화가 온다. “내일까지 시간을 준다. 돈을 받고 팔자를 고치겠는가? 아니면 조선으로 도로 끌려 나가겠는가?” 조선족 인신매매꾼들이다. 정말로 더럽기 그지없었다. 돌아가자니 고향은 천리 밖 먼 곳이었다. 그날 저녁으로 우리 둘은 연길을 떠나 무작정 조선족이 적게 사는 안쪽 지방으로 정처 없는 유량길에 올랐다. 여기저기 들려서 잠깐씩 일해주고는 용돈을 벌어 더 안전한 곳으로 가고 가 나중에는 한국기업들이 많이 들어와 있기에 취업도 가능하다는 청도에까지 오게 되었다. 한 몸을 둘 곳이 없어 정처도 없이 청도로 오기까지 만장 같은 고생은 이루다 말할 수 없다. 하여튼 고생 고생 별 고생을 다하며 청도에서 한국기업에 중국조선족으로 위장해 봉재공장에 취업을 하기까지 1년이 훌쩍 지나갔다. 조금 여유가 생기면서 난 그동안 생각만 해도 울음부터 나오던 남편과 아들의 소식을 듣고 싶어 겨우 줄을 놓아 돈을 주고 북한에 있는 언니와 통화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언니가 전해주는 우리 집 소식은 마른하늘에 벼락이 치는 기막힌 사연이었다. 내가 떠나고 나서 한 달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자 남편은 우리 친정집에 와서 내가 어디로 갔느냐고 하도 들이대기에 그러는 모습이 안 스러워 친정어머니가 사실은 하면서 애 엄마가 중국에 가서 돈을 벌어가지고 한 달 후에는 꼭 오겠다고 했으니 넘 걱정을 말라고 애를 돌보기 힘들면 그 애를 외갓집으로 데려오라고 하였다 한다. 어머니의 얘기를 듣자마자 남편은 자기를 속인 건 참을 수 있지만 당을 속이고 나라를 속이고 반역을 한 건 용서할 수 없다고 하면서 당장 이혼을 하겠다고 그리고 아들은 자기 얘니깐 다시는 찾지 말라고 외마디를 하고는 훌쩍 나가버렸다고 한다. 그리고는 그 뒤로 들려오는 소리는 나보다 10살이나 어린 여자에게 새 장가를 들었다고 하였다. 참 기가 막혀서 난 할 말을 잊었다. 자식을 낳고 산지도 10여년, 내 남편이 도대체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이었던가? 물론 시집의 가정성분이 좋아 친척들 모두가 당비서요, 세포비서요 하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북한정권을 위해 죽으래도 죽을 사람인 것은 알아도, 가족을 위해 먼 길을 떠난 자기 안해 조차 졸지에 민족반역자라고 몰아붙여 이혼하고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리는 이런 인간에게 일생을 맡기고 살았던 내 삶이 허전하고 야속스러웠다. 그보다는 사람들을 이런 냉혈인간으로 만든 북한제도가 증오스러웠다. 남편은 남편이고 아들이 불쌍하기 짝이 없다. 친어머니가 우릴 버리고 저 혼자 살겠다고 중국으로 도망을 쳤다고 말했다는 아빠의 세뇌를 아들이 정말 그대로 믿고 있을까? 그 보다는 제 엄마의 모습이 마음에 새록 새록 떠오를 텐데 새 엄마를 친 엄마로 여겨야 할 아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넘 아프다. 아프다 못해 미어지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북한으로 돌아가려는 마음을 완전히 접었다. 또 돌아갈 수도 없었다. 혹여 돌아간다 해도 민족반역자의 오명을 쓰고 감방신세를 져야 하고 주변으로부터의 냉대와 사회적 매장을 당하니 말이다. 2006년에 접어들어 중국공안의 탈북자들에 대한 색출과 강제북송을 미친 듯이 강화하면서 청도에서 조선족으로 신분을 위장해 살기가 어려워졌다. 밖에 승용차가 갑자기 들어서도 와뜰 놀라 심장이 콩닦질을 했고 어쩌다 거리에 나갔다가 먼발치에서 공안경찰만 보아도 쥐구멍이 없나 주변부터 살핀다. 정말이지 하룻밤을 자고 나 별일 없으면 한 숨을 호 내쉬면서 사는 게 중국에 숨어사는 우리 탈북자들의 불쌍한 삶의 전부이다. 하여 나는 가다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탈북자들의 마지막희망인 한국으로 가리라 결심하고 2006년 초봄 몽골을 경우하는 한국행 한 대열에 끼웠다. 몇 개월의 한국행 장정은 정말로 순탄치 않은 길이었다. 그 길에서 벼라별 고생을 다 겪었지만 지금도 늘 마음에 걸리는 것은 중몽국경을 넘는 우리를 발견하고 중국변방군대들이 쏘는 실탄에 맞아 죽어가는 동행자를 돌아다보지도 못하고 살려고 줄행랑을 놓은 일이다. 함께 떠났던 그 위험천만한 길을 끝까지 오지 못하고 아무도 모르게 중몽국경에서 무덤도 없이 한 줌의 흙으로 변해 버릴 내 형제들께 늘 죄송하며 그들의 영혼이라도 한국에 와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길 바란다. “ 한국 아줌마”로 거듭나기 나는 이젠 서울사람이다. 베이징에서도 한동안 살았지만 참 서울은 어데라 할 것 없이 깨끗하고 낭만적이다. 하지만 서울사람인 나는 아직은 새내기이며 마흔살 어린애다. 어른이 되기까지 어린애의 머리에는 사회생활에 적응하고 모든 대처할 수 있는 모든 프로그램들이 라이팅된다. 하지만 나의 머리에는 북한에 준한 프로그램은 가득차 있지만 새로운 한국사회에 걸맞는 프로그램이 들어있지 않아서 나이는 먹었으나 삶의 지혜나 가치관은 분명히 어린애와 흡사하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하나원을 금방 나와 동서남북도 모를 때인데 은행에서 돈을 찾으려고 집을 나섰는데 아파트 경비아저씨에게 물었더니 이 길을 따라 곧추 가면 “로타리”가 나오는데 그 “로타리” 왼쪽으로 조금 돌면 은행이 있단다. 나는 길가의 간판이 하도 영어가 많아서 “로다리”라는 건물이 있는 줄 알고 한 참 가다가 하도 “로타리”라는 건물이 나타나질 않아 도로가 둥근 길을 따라 교차되는 원형교차로에서 걸음을 멈추고 길가는 아줌마에게 여기 '로타리'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 아줌마가 날 이상한 듯이 빤히 쳐다보더니 로타리앞에서 로타리를 찼느냐고 하면서 웃어버린다. 순간 나도 웃음이 났다. "아 참! '로타리'란 북에서 말하는 이 원형교차로를 말하는구나?!..." 문화적 차이로부터 오는 이런 나의 웃지 않을 수없는 해프닝들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면서 점차 차이를 인식했고 나의 생각과 언행들을 현지화하기 스스로 애써 노력하였다. 귀에 설은 단어들은 네이버검색창에서 확인해 따로 적어두고 반복하여 익혔고 '서울말 배우기'라는 테이프를 구입해 전철이나 길 다닐 때에도 열심히 중얼거리며 제대로 될 때까지 반복하였다. 이웃집하고도 내가 문을 두드리고 다가가 잘 도와달라고 부탁을 드렸고 자주 부딧치다 보니 정이 들었으며 모르는 것, 알고 싶은 것들이 생기면 이웃집에 의례 물어보군 하였다. 사전에서 혼자 찾는 것도 좋지만 옆집에 물으니 훨씬 빠르고 정확하게 알 수가 있었다. 차츰 '북한 아줌마'의 티를 벗고 말씨와 언행, 패션이나 메이컵, 머리스타일, 매너에 이르기까지 '한국 아줌마'로 거듭나면서 조금씩 자신심과 의욕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특히 쉰이 넘었어도 정통부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는 옆집 아줌마를 보면서 나도 무언가에 도전해 내 능력을 새롭게 다지고 마음껏 활용하고 싶었다. 그런데 북에서 농사만 짓다가 온 마흔을 넘은 여인이 무엇을 할 수 있으랴 라고만 생각하면서 안 된다. 할 것이 없다는 선입견만으로는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었다. 여러 회사들의 채용에 대담하게 도전하고 거절당하면 다시 준비하고 또 거절당하면 다시 공부를 해서 부족함을 채우고... 회사에 지원서를 낸 것만도 열 번은 넘는다.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차례진다.”고 아직 원숙하게 준비는 갖추지 못했어도 열심히 노력한다는 내 모습이 마음을 움직였는지 지금의 회사에서 면접 후 입사지원을 승인해 주었다. 그날 아들에게 이런 마음속 말을 건넸다. “아들아 이 엄마가 첫 번째 목표를 달성했어. 아주 조그마한 목표였지만 엄만 이제 죽지에 나래를 펼 수 있어 마음껏 날 수 있는 새가 된 기분이란다. 지금처럼만 열심히 산다면 널 만날 땐 지금보다 더 멋진 엄마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넘 좋다!” 나의 작은 소망 한국에 온지 아직 열 달도 못되는 새내기가 자랑을 하려고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도 말하였지만 이 다음 내 아들에게 엄마가 서울에 첫 발을 들여놓고 지금껏 어떤 마음과 각오를 가지고 세상을 열심히 살았는지를, 그래서 아들도 인생의 지대한 목표를 세우고 실천해 가는 훌륭한 젊은이가 되기를 되기를 바래서이다. 그러면서 이 얘기를 함께 하나원을 수료한 금O이나 순O에게 내 생활의 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고 또 나처럼 마흔을 넘었기에 별로 새로움을 기대할 수 없다고 탄식하고 푸념하고 있을 친구들을 위해서 “하면 된다!”는 확실한 내 작은 경험을 들려주고 싶어서이다. 난 꼭 뭔가를 이루고 싶다. 그것이 현재의 일에서 최고의 기능장이 되든지, 아니면 열심히 돈을 벌어 내 작은 사업장을 만들든지 어쨌든, 내가 그린 디자인에 내 인생의 자취를 남기고 싶다. 이번에 한국방송통신대학 경영학부에 입학하였기에 예전보다는 삶이 넘 바쁘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정신적 재부가 차곡차곡 새롭게 차나가는 것을 느끼면서 내 육체안의 영혼을 현재가 아니라 미래에 가서 그 가치를 평가하고 싶다. 그 미래의 가치를 만들어나가는 내 삶은 오늘보다 내일 조금씩 더 윤택해 질것이고 삶의 즐거움과 성취감도 나날이 조금씩 더해 질 것이라 확신한다. 2007년 10월 윤혜영(XX디지털상사 프로그램라이팅실 팀장) 자료제공 : 북한이탈주민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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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다..
멋지고 아름답다는 말밖엔 ..
고맙습니다 ~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왜 국기가 미국이죠??
한국 아니셨나요??
항상 건강하시고 보람되고
좋은일들만 있으시길 기원합니다.
긍정적이고 밝은 미래를 위하여.....
윤혜영씨! 화이팅!
탈북자 수기를 읽을때마다
눈물도 나고, 용기를 얻게되네요.
앞으로도 늘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비극 입니다.
불쌍하고, 눈물도 나고...
힘내세요.
읽으면 읽을수록 감동을 받고 가곤합니다.
이런분들이 있어 탈북자들이 열심히 산다는 말을 듣습니다.
열심히 사는 당신이 아름답습니다
같은 민족, 같은 동포가 이렇게 다른 세상에 살고 있어니..
글쓴이 혜영씨 힘내시고 화이팅하세요.
북에 있는 자식을 보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사셔야죠.
북한에 대해 이것저것 찾아보고있었어요 .. 말이 안될정도로 참담한 상황인지라 도저히 믿지 않는 이친구들을 설득시키다보니..문뜩 그 현장에서 모든걸 이겨낸 윤혜영씨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항상힘내시구요 .. !! 서울 정말 아름다운 곳이죠 .. 다시 돌아가고싶네요 ^^ 화이팅!
남한생활 잘적응하신다니 정말 대단하네요
윤혜영씨 힘내시고 행복하세요...!
반세기가 넘고 그 세월속에 사람들은 늙어가며 한 많은 생을 마감하는 분들이 전쟁때 헤여진 이산의 1세대 분들입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헤여진 혈육은 언제나 그때 그 모습으로 눈 앞에서 아롱거리죠. 이것이 오늘의 현실일 것입니다.
언제나 지금처럼 늘 힘내시고 화이팅~
항상 즐거운 일만 있으시기를 ......ㅋㅋㅋ
울 엄마 생각나네.ㅋ
16살에 이모따라 중국와서 지금도 있어요.
난 엄마랑 만날 날 엄마에게 들려주고싶은 딸의 중한이야기를 준비할려구요.ㅋ 빨리 한국 가고싶어요.
하시는것 만큼 보다 크 성과와 행운이 나타나길 바래요.
나도 아줌마처럼 되고싶어요.
그럴날고 오겠져? 화이팅 해주세요 화이팅...ㅋㅋ
제가 혜영씨 글을 읽고 제 글을 올린지도 어언 2년이란 세월이 흘렀네요.
그 세월속에서 글 쓰신 분의 생각과 감정도 많이 변했으리라 생각 됩니다.
부디 아드님과 상봉 했거나 그런 가능성이 있기를 진정 기원합니다.
떠날때는 쉽고 한 순간이지만 현재까지의 인생의 거의 전부가 담겨져 있어 수많은 추억들과 가장귀중한 인연들이 있는 그곳은 언제나 그리움과 아쉬움, 그리고 돌아가야 한다는 막연한 희망과 그럴수 없다는 좌절감이 가슴을 아프게 하면서 시간은 흐를것입니다.
이제 조금 더 있으면 아마도 조급성까지 겹칠것입니다.
부디 모든 일 잘 되시길 다시 기원 합니다.
라이터를 켭니다....ㅎㅎㅎㅎㅎ
그리고 제 자신을 더 깊이 돌아보게 되는 군요.
아드님은 반드시 님의 품으로 돌아 올 것입니다.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면 그 희망은 반드시 현실로 님에게 찿아옵니다.
환한 미소와 활기있고 건강한 엄마의 모습으로 아드님을 만나기위해 더욱 마음과 몸의 건강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님을 사랑하고 응원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음을 꼭 잊지 마시고...
외국에서 우리나라 IT기술,,인터넷 네트워킹 시스템이나 스피드,,무선 와이파이,,인프라 구축 잘되있는곳 있음?? 여기 영국인데 인터넷 많이쓰면 돈 열라 내야되고 와이파이도 열라 느림..
결혼도 하시고 또 아들도 빨리 만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