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가야한다 - 이일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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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고프다. 밤이 깊은지도 오래다. 이대로 자리에 쓰러지고 싶다. 뭐 먹을 게 좀 없을까?… 가야지… 집으로 가야 한다!… 1. 첫 프로젝트 이젠 지하철도 끝났겠지? 택시로 집까지 가는데 12,000원 정도 든다. 지하철을 이용하면 한주일 출퇴근 할 돈이다. 후유~ 내가 왜 이러지? 이것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도 아닌데… 정말 이렇게 밖에 사는 방법이 없을까? 당장 다 때려치우고 싶다. 내일부터 막노동판이라도 나가면 지금보다 훨씬 월급도 높을 수 있다. 육체적으로 좀 고달프겠지. 까짓것 그만큼은 이겨낼 수 있다. 아침에 출근하여 이렇게 밤늦게 퇴근해야 하고 휴식일도 책에 붙어 씨름 질하고, 이게 무슨 사는 거야? 저녁이면 영화도 좀 보고 일요일엔 친구들과 놀려도 좀 다녀야 하는 건데… 입술은 타들고 머리는 핑 도는데 웬일인지 잠은 오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정신이 더 또렷해진다. (지금쯤은 아마 처장도 팀장도 모두 먼 꿈나라에 헤매고 있겠지?) 야간 택시의 창유리에 코웃음 치던 팀장과 머리를 가로 흔들던 처장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그리고 나를 소개해주던 학원선생님들과 교회집사님의 근심어린 얼굴도 보인다. 지금까지는 그런대로 버텨왔지만 앞으로가 문제이다. 처음으로 맡은 프로젝트를 무사히 통과해야만 정식사원으로써 자격을 당당하게 갖추게 된다. 물론 실용적이고 현실에 도입할 프로젝트는 아니고 앞으로 회사에서 정말 쓸 만한가를 타진하는 종합프로젝트이다. 그래픽 디자인 학원을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의기양양했다. 학원에서 꽤나 높은 성적으로 자격증을 취득했고 배운 범위 내에서 모든 프로그램을 소와 할 수 있었다. 덕분에 선생님들이 멋진 평을 내려주었고 나를 언제나 따뜻이 대해주던 교회집사님이 홈쇼핑 호스팅 전문 업체에 알선해 주었다. 회사에선 머리를 기웃거렸으나 모두가 내 편을 들어주었고 또 소개해주는 사람들의 인맥관계도 한 몫 한 것 같았다. 차라리 내 몸에 맞는 적당한 일자리를 찾을걸!… 남들이 부러워하는 회사에 입사한다고 공연히 들떠만 있었다. 그러나 단순 그래픽이 아닌 호스팅분야에서 영어실력이 낮은 내가 프로그램을 제대로 다루어 낼 수 없었다. 더욱이 학원에서 전혀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프로그램들을 다룬다는 것이 보통문제가 아니었다. 책을 가지고 씨름 질을 하며 엉기적, 엉기적 한 토막씩 완성하는데 팀장과 실장은 완전히 실망한 얼굴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런대로 겨우 완성한 작품들이 팀원들의 좋은 평가를 받은 것이다. 이번에 처음 맡은 프로젝트는 나의 자질과 가능성을 종합평가하는 입사면접이었다. 여태껏은 그래픽과 복잡하지 않은 소스를 다루는 문제였지만 이번은 홈페이지 하나를 완전히 새로 만들어내야 하고 그래야만 정식사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오후시간에 그림편집프로그램을 짜지 못해 슬그머니 팀장에게 물었다. 그런데 팀장은 나를 한번 흘깃 쳐다보더니 대답 없이 코웃음 친다. (네깟 놈 여기 입사하겠다는 것부터 어리석지) 그의 눈에 이런 말이 생생히 씌어있었다. 실장도 얼굴가득 비웃음을 띄우고 머리를 끄덕였다. 온 몸이 갑자기 물먹은 눈사람처럼 스르르 주저앉는 것 같았다. 더 어데 물어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니 이대로 쫓겨나면 되지 무엇 땜에 비웃음을 받으며 물어보겠는가? 자바스크립트를 설명한 책자를 펼쳐들었는데 가슴에 끓어오르는 분노와 부끄러움 때문에 어데가 무엇이고 무엇부터 보아야 할지 안겨오지 않았다. 맥없이 앉아서 애꿎은 책장만 번지다가 모두가 퇴근한 뒤에야 정신을 가다듬었다. 아찔하던 산이 무조건 넘어야 할 산으로 안겨왔다. 그 얼굴들 앞에 당당해 지고 싶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그들 앞에 보여주어야 했다. 비록 책을 보며 하나하나 고달프게 짜나갔지만 의도하던 대로 그림과 창들, 링크된 버튼들이 제자리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실수하면 다시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 백번, 이백 번, 반복하다나니 프로그램이 엉망이 되어 다시정리하고… 그렇게 하나하나 완성된다… 내일 저녁까지 서버에 올려놓아야 하고 팀원들과 간부들의 평가를 받아야 한다. 기본적으로 완공되었다고 생각하고 자리에서 일어설 때에는 눈앞이 핑 돌고 심한 현기증이 일었다. 온 이발이 다 물러앉는 느낌이 들었다… 택시 문을 조금 열고 시원한 찬바람을 한껏 들이켰다. 오색영롱한 불빛들이 시야를 채우며 멀리 내 몸을 끌어낸다. 아!… 그때도 이렇게 힘들었지? 이런 밤이었지?… 2. 일어서야 살 수 있다. 겨울이 얼마나 모질었던가? 떠날 때부터 눈이 내렸다. 그 놈에게 잡히지만 않았어도 지금쯤 돌아오는 길이 엇을지 모른다. “짐승 같은 놈!” 나도 모르게 입속에서 흘러나온 말이다. 하필이면 그 오빠시(땅벌-북한영화 “누리에 붙는 불”에서 악착한 일본형사의 별명)같은 놈에게 걸릴 건 뭐람?!… 배낭에서 나온 동화(겨울신발) 열 걸레를 발로 툭툭 차며 말없이 코웃음 친다. (그래도 살아보겠다고 버지럭 거린단 말이지?…) 그의 눈에 쓰인 말이었다. 목구멍으로 씁쓸한 먹물이 올리 밀었다. 나이 어린 특사 놈이 옆에서 히물히물 웃어댔다. “농촌에 장사를 가? 장사하면 먹고 살만해?” 침을 뱉고 싶은 징그러운 얼굴이 내 얼굴에 가까워 졌다. 당장 주먹이라도 날아올 것 같아 한걸음 주춤 뒤로 물러섰다. “공장제품을 함부로 못 빼돌린다는 걸 몰라?” 장마당에서 샀다고 아무리 항의해도 통하지 않는다. 하긴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겠으니 깐… 그래도 나보다는 융통성 있는 친구가 밖으로 달려 나가더니 어느 장사군 한데서 외상으로 구했는지 중국담배 세 갑을 들고 나타났다. 오빠시에게 두 갑을 주고 특사 놈에게 한 갑을 찔러 주었다. 그제야 그놈은 말없이 우리를 놓아주었다. 몹시 다급했다. 네 시간이나 빼앗겼기 때문이다. 아는 사람도 없는 농촌에 가기 때문에 밤을 새울 곳도 없었다. 먼 길에 눈썹도 짐이라더니 신발 열 걸레도 쉽지 않았다. 눈은 점점 굵어지더니 어느덧 눈보라로 변했다. 산을 넘는 좁은 오솔길은 다 메워지고 무릎까지 눈 속에 푹푹 빠졌다. 짧은 겨울 해는 저녁 5시가 되자 사라졌다. 75리 길을 걸어 마을에 들어서니 저녁녘이었다. 갑자기 찾아든 칼 추위 때문인지 겨울신발은 생각보다 빨리 팔렸다. 강냉이(옥수수)는 한 걸레에 4kg, 감자 전분은 3kg 씩 받았다. 다 팔고 나니 밤 9시다. 마지막으로 들린 집에서 쌀을 좀 적게 받고 대신 감자를 얻어 저녁을 대신했다. 갈 길이 끔찍했다. 36kg이나 되는 배낭을 메고 산을 넘어야 한다. 처음에는 좀 견딜만했다. 밤이 되면서 눈보라도 잠들고 변덕스런 하늘에 쟁반 같은 달이 떠올랐다. 입가에서 더운 김 서려 오르고 배낭에 밀착된 잔등은 벌써 땀에 젖어있었다. 배낭끈이 어깨를 파고들고 허리가 삐어지는 것 같았다. 뱃속에 들어간 감자는 어느 구석으로 사라졌는지 쪼르륵 소리만 난다. 눈앞이 아물거린다. 말없이 앞서 걷던 친구도 더 못 참겠는지 배낭을 벗으며 털썩 주저앉았다. “좀 쉬고 가자!” 다행이었다. 이제 막 쓰러질 판이었는데… 친구가 주머니에서 맛내기“미원”봉지에 넣은 담배를 나에게 내 밀었다. “노동신문”종이에 엄지손가락 두께로 말아 피우는 담배 맛이 얼마나 구수하던지… 은반 같은 달을 바라보며 담배연기를 피워 올리니 여해진 으로 물고기 가지러 떠난 누나 생각이 간절했다. 누나가 제 때에 도착했으면 내가 이런 고생을 안 해도 되는 거였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었고 엄마마저 자주 앓아눕곤 하여 중학교를 채 졸업하기도 전에 집안의 가장질을 하던 누나였다. “고난의 행군”을 겪으면서 우리 집은 누나가 열차 장사로 가져오는 물고기를 어머니가 팔아 근근이 유지하고 있었다. 이제 집에 가면 누나가 왔을지도 모른다. 내가 이렇게 장사를 하여 집안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을 알면 얼마나 대견해 할가?… … 산은 오르는 것보다 내리는 것이 더 힘들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휘청거리는 다리로 무거운 배낭을 멘 몸을 유지한다는 것이 보통일이 아니었다. 앞에서 나를 걱정하며 걷던 친구가 갑자기 미끄러지며 비명을 질렀다. 배낭을 멘 채로 열댓 미터 굴더니 키 높은 나무에 걸려 멈췄다. 꼼꼼히 포장해 넣은 배낭이 터지지 않아 다행이었다. 하지만 친구는 일어나지 못했다. 발목을 심하게 다쳤던 것이다. 하는 수 없이 배낭을 무릎위에 올려놓고 두 손으로 땅을 밀며 눈 위를 미끄러져 내려왔다. 깊은 눈이 브레이커가 되어 내려오는 속도도 적당히 조절해 주었다. 우리가 왜 이런 생각을 못했었지?… 산기슭까지 내려오니 조그만 부락이 나지고 시내로 통한 큰길이 보였다. 나보다 힘이 곱절인 친구였지만 다치고 나니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여기에 좀 있어, 내가 썰매를 구해올게” 그를 배낭위에 편안히 눕히고 마을로 들어갔다. 옛날 같으면 개들이 짓는 소리에 온 동네가 난리 났겠지만 불빛조차 없는 마을엔 죽은 듯 기척이 없었다. 농촌마을이라 어느 집이나 나무썰매가 있었다. 울타리가 낮은 곳을 찾아 어느 집 마당에 살며시 들어갔다. 창고 옆에 놓인 나무썰매에 눈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걸 끌고 친구가 있는 곳에 갔는데 축 늘어진 그가 감각 없이 누워있었다. 소리쳐 흔들었는데 한참이나 지나서야 깨어났다. 그리고는 자기를 두고 가라는 것이었다. 덜컥 겁이 났다. 이런데서 잠들면 얼어 죽고 만다. 덩치가 나보다 두 배인 친구가 감자 몇 알로 저녁을 굼 땠으니 오죽하랴… 요새 집사정이 어려워 떠날 때도 변변히 먹지 못했겠는데… … 지금도 그때 어떻게 집으로 왔는지 도무지 생각이 안 난다. 나무군 들의 썰매자국에 단단히 다져진 눈 위로 배낭 두 개와 친구를 눕히고 걸었다. 가끔가다 무서운 생각이 들어 친구 쪽을 돌아보았다. 친구는 자지 않았다. 썰매 뒤에 앉아 성한 한 다리로 땅을 밀고 있었다. 미안한 마음에 조금이라도 나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을 것이다. 아! 친구야~ 내가 지쳐 쓰러졌을 때 담배를 말아 불붙여주던 너. 그 담배를 빨며 끝내 온산이 메아리치게 통곡했던 우리!… 일어서야 한다. 일어서야 살 수 있다… 3. 모든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조용한 사무실에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완성한 홈페이지의 바탕색이며 패턴들을 더 정리했다. 오후 늦게 올려도 되지만 내 재간으로는 더 다듬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며 프로젝트를 마무리했다. 이젠 점심 먹을 시간이 되지 않았나 하고 시계를 쳐다볼 때 갑자기 김ㅇㅇ씨가 환성을 질렀다. “어머! 이ㅇㅇ씨 벌써 올렸네. 와! 멋지다. 모두들 좀 봐요~” 사람들의 눈길이 일시 나에게 집중되었다가 다시 컴퓨터로 옮겨갔다. 내가 만든 프로젝트를 뒤져보는 것이다. 첫마디 칭찬에 마음이 헤벌쭉 해졌는데 그래도 왜 그런지 어떤 불호령이 떨어질 것만 같아 가슴이 쿵쿵 뛴다. 말없이 컴퓨터를 뒤지는 팀원들이 무섭기도 하고 얄밉기도 했다. 뭐라 한마디씩 말이라도 하지… 조금 시간이 지나자 팀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허! 참 모를 일이야. 이ㅇㅇ씨는 실제 물어보면 아는 게 하나도 있는 것 같지 않아, 그런데 결과물은 참 신선하단 말이야…” “퓻~” 몰렸던 한숨이 일시에 쏟아졌다. 결국 합격이란 뜻이다. 실장도 내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내 어제 저녁 뭐라 했어. 저 놈이 꼭 해 낼 거라고… 여하튼 보통 놈이 아니니깐…” (흐앗!~) 정말 일어서서 미친것처럼 만세를 부르고 싶었다. 그래! 비웃기도 하고 머리를 흔들기도 했지만 결국 내가 해 낼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단 말이지… 아니, 저 사람들에게 믿음이 가도록 내가 해 냈단 말이지… 정말 이래서 일한 보람이라는 게 있는 것 같다. 그동안 쌓였던 마음고생과 말 못할 외로움이 한방에 속 시원히 날아가 버리는 것 같았다. 옆에 있는 선배에게 다가갔다. “저…선배님, 담배한대 얻을 수 있을까요?” “왜?… 담배를 끊는다면서…” 그러면서도 순순히 내어준다. 밖으로 나가려는데 정수기 앞에 서있던 팀원이 커피를 내민다. “담배 피울 땐 커피를 함께 들어야 제 맛이 나지” 눈물이 핑 돌았다. 무엇인가 대답이 오는 것 같았다. “그래 항상 목숨을 걸어야 한다! 모든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목숨을 걸었기에 그날에도 살 수 있었고 목숨을 걸었기에 이 땅에까지 올 수 있지 않았던가? 지금도 그날이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산을 넘어야 했던, 쓰러진 친구를 태우고 썰매를 끌어야 했던… 주저앉으면 죽어야 했고 그래서 목숨을 걸어야 했던 지금도 그날이다. 그 나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시원한 담배연기에 고향이 보인다. 그리고 집. 저기에 내 집이 보인다. 초라한 모습으로 덜덜 떨며 떠나던 고향! 굶어서 먼저 떠난 친구를 가슴에 안고 눈물조차 메말라 울지 못하던 고향! 이제는 돌아가는 모습이다. 세상이 다 아는 디자이너가 되어 고향에, 그리운 사람들에게 한 가득 선물을 안고 집으로 간다… 그렇게 가야한다. 내 사랑하는, 죽어서도 눈감지 못할… 아! 집으로 가야 한다. 2007년 9월 18일 이일선 자료제공 : 북한이탈주민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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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사회 힘들죠??
꼭 누가 말하면, 날 흉보는것 같기도 하고, 고깝게 보이기도 하고.. 그렇지만, 사회란 것은 나의 시험대입니다..
저도 회사생활을 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상사의 눈초리, 준비하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하면, 날아오는 매서운 한마디, 부끄럽고 쥐구멍에라도 가고 싶을때도 있고, 반항심에 한마디하고 뛰쳐 나와버리고 싶지요..
'이것 안하면, 먹고 살길이 없나..' 이런 생각도 하고
더러워서 스트레스에 짜증이 쌓여 다른데에 화풀이 할때도 많습니다..
심지어 일 못한다고 책으로 머리를 맞기까지 할때도 있었지요..
북향민들은 스스로 이런 남한 사회를 이해 못할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실력으로 평가받는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경쟁에 뒤쳐지면, 사회의 낙오자란 소리를 듣습니다..
남한 사회만 그런것 같습니까??
일본, 미국 서구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서구사회는 한국과 다르고 좀더 개방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계 경제력 2위의 가까운 일본사회만 해도,
"상사에게 매맞는 직장인이 많다"라고 일본내에 직장인을 다룬 뉴스에도 작년에 나온적이 있었습니다..
나라의 사회라고 함은, 크게는 정부와 기관부처와 기타 사업장으로 나눌수 있으며, 작게는 사회 단체의 구성체로 회사를 들수 있을듯 싶습니다..
즉 사회속에 또 다른 작은 사회이지요..
사장이 대통령이라면, 그 사장 밑에 지위 간부들이 있고, 그 밑에 내가 있습니다..
나와 그리고 같은 구성원들의 실적으로 회사의 존망이 결정됩니다.. 즉 모두 하나 하나가 뛰어나야만 합니다.. 그래야, 그 회사는
돈을 벌어 들이고, 나에게 월급을 줍니다.. 그렇기에 사원들은 자기 개발을 하지 못하면, 상사에게 욕을 먹거나, 핀잔과 눈초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또한 어떤 상사는 일부로 미워하는 척 합니다..
즉 심하게 괴롭혀야, 빨리 일을 배울수 있고 적응할수 있거든요..
즉 쉽게 쉽게 편하게 일을 가르치면, 받아 들이는 이도, 일을 쉽게 판단하고, 많은 오류나 많은 작은 실수를 범하기 때문입니다..
저도 사회생활을 많이한것은 아니지만, 사회생활을 쭉 해보니 느낀점입니다..
하여간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열심히 사시는 모습 너무 아름답습니다 .
꼭 성공하실거에요. 좋은글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나도 부모 고향이 평안도 정주랍니다.친척들이 북에 많아요.
roh321@kornet.net
멜 주세요,,pmy810421@hanmail.net
너무도 감동적인 글 잘읽고 갑니다. 님이야 말로 진정한 투사입니다. 님의 삶에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힘이 되리라 믿습니다. 더 많은 님의 글을 접할수 있으면 합니다.
참고로 저희동네엔 새터민이 많거든요...앞으론 그들과 상생할수있는방법을 찾아보겠읍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더 열심히 성공하시길...^^
그리고 남의 눈치 너무 의식하지 마세요
나자신도 정작 남의 동정을 그리
살피는 편이 아닌거 처럼 남들도 그럴겁니다
다른이의 눈치보단 이일선님만의 인생을 사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