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에서 맞은 새봄 - 미소천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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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만 지나면 벌써 4월이다. 우리 집에도 봄이 왔다. 오늘은 일요일이라 오랜만에 집에서 대청소도 하고 간만에 휴식을 취해본다. 내 집에는 '베란다' 라는 자그마한 실내 미니정원이 있다. 그닥 이쁘지 않아도 공기 정화식물이라고 특별히 신경을 쓰는 키 높은 고무나무로부터 그 앞에 주런히 에스메랄다, 튤립, 돈키호테, 데이지, 러빈, 루포, 마레니나 등 작고 여린 이쁜 꽃화분들이 줄지어 있고 그 뒤론 산세베리아, 산호수-마불툭, 인삼 파라분제, 동양화초인 금화산 등 금방 물을 주고 잎을 씻어 놓아 더 투명하고 푸른 기운을 풍기는 화분들이 중층을 이루고 그 옆엔 3월이 생일이여서 며칠 전 친구가 생일선물로 가져온 핑크색 호접난이 허리에 금빛 리본을 두르고 우아하게 그 자태를 뽐내고 있는데.... 어여뿐듯 수집은듯 희고 작은 예쁜 꽃잎이 다문다문 초롱초롱한 백색덴파래와 길쭉길쭉한 잎새들을 섹시하게 늘어뜨린 베이지색의 매혹적인 후레지아도 그에 못지않게 아름답다. 동양란, 서양란 다 있으면 좋겠지만 작은 베란다에 꽃화분이 많다고 이것저것 들어봐야 실지 몇 개 안된다. 하지만 난 이렇게 작은 공간이나마 바라보는 것이 너무 좋다. 그리고 지나간 추억을 살리며 흡족한 미소를 짓는다. 얼마나 그리고 그리던 자유이고 바라던 공간 이였을까. 남한에 와서 처음 맞는 봄이고 보니 더 감회가 새롭고 행복하다. 하지만 아직 많은 이들이 삶의 고통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힘들어 하고 있다는 생각이 나서 내가 누리는 이 모든 것이 불쑥 미안해지기도 한다. 베란다 구석에 놓인 헝클어진 푸른잎새들이 더 매력적인 바람 부는 들가에 홀로 선 외로운 여인같은 모습인 자바를 보고 있느라니 문득 아름다운 친구의 못 잊을 얼굴이 떠오른다. 나에게는 아름다운 한 친구가 있었다. 그의 남편의 말을 빌어서 표현한다면 "그의 눈은 호수 같고 금방 그 맑은 물에 풍덩 빠지고 싶을 만큼 부드러움을 머금고 있다. 그 눈은 너무나 많은 얘기를 하고 있어서 바라보고 있느라면 난 언제나 어머니의 옛 이야기를 듣고 있는 어린 소년같이 언제까지라도 꼼짝 않고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가 많이 있었다." '금새라도 풍덩 빠져들고 싶은 충동을 느낄 만큼 호수 같은 맑은 눈동자와 상큼하고 오똑한 콧마루, 특별히 매력적인 도툼한 입술, 그리고 희디흰 맑은 피부' 라고 표현한다면 어느 소설책에서 많이 보아온 인상이여서 지어냈거나 따온 이미지라고 생각할지 할지 몰라도 적어도 그는 그랬다. 단정하지만 약간 부푼 듯 한 연한 머리색갈, 평범하게 수집은 듯 얼굴에 띄운 평온한 미소는 대하는 사람을 안정시켜 주는 태평스런 데가 있었고 이쁜 생김새하고는 조금 의외인듯도 하였던 그녀의 유머와 사랑스런 목소리는 듣는 사람을 매우 즐겁게 해주군 하였다. 그 중에서도 그에게서 제일 이쁜 것은 그의 마음이었다. 그는 참 마음이 따뜻한 여인이었다. 불쌍한 사람을 보면 동정이 많아 당신이 먹지 못해도 주어야했고 누구 집에 문제가 생기면 솔선 나서서 해결해주었다. 그를 알고 있는 어떤 사람은 그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한마디로 덕이 있는 사람"이라고... 인민군대 여성소대장 출신으로 입당하고 소위견장을 달고 귀가한 그에게 어느 날 사랑이 찾아왔다. 미술가이며 기타수인 그 청년은 평양미술대학을 졸업한지 얼마 안 되였었고 그녀보다 3살이나 연하였지만 그들은 금방 꿈과 같은 무지갯빛 사랑의 무아지경에 빠져 들었고 신이 주신 축복의 아기를 가지게 되였다. 부모들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혼하였다. 특별히 남편의 부모들은 전쟁 노병이고 김일성 수하에서 오랫동안 역사수록을 해온 작가이고 이름 있는 집안 이였던 까닭에 형누나 모두 제끼고 먼저 결혼해야 하는 호로자식같은 그의 남편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패가망신시킨다고 하면서 청진시 어느 구석에 옥탑방을 얻어 쫓아내다시피 살림을 차려주었다. 서너 평 될까말까한 단칸방에 조그만 녹이 쓴 솥 두개가 달랑 있는 부뚜막은 나무도 몇 가치 못 들어가게 작아서 연기가 밖으로 미여지게 터져 나와 숨 막히고 콧물눈물 다 나온다. 결혼식이라 친구들이 모여 국수는 먹어야 한다고 하여 제일 가까운 친구라고 내가 가마 뚜껑운전을 맡았다. 하지만 나도 워낙 공주로 컷고 그때 아직 시집 안간 처녀다보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데... 국수발이 물렀는지 설었는지 팅팅 붓고 툭툭 끊어지는 국수사리를 재간스레 말아서 몇 그릇 놓고 친구들이 쭉 둘러 모여 앉았던걸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난다. 그때는 그것이 뭐가 그리도 재밌었는지 한마디씩 던지는 우스갯소리에 박장대소 하고 웃어댔다. 찌들게 없는 속에서도 신부는 행복해 보였다. 그렇게 그들의 행복한 신혼생활은 시작되었다. 지금처럼 봄이 오고 있었다. 미술가였던 남편은 그 옥탑 방을 늘여 아름다운 자기들의 세계를 이쁘게 꾸리고 마당에는 미니정원을 꾸렸다. 키낮은 젓가락 같은 싸리나무를 가뜬히 잘라 울타리를 두르고 가장자리에 한 뽐 되게 흰색 칠을 하였다. 돌을 골라내서 축축하고 부드러워진 흙을 갈아서 고랑을 째고 파, 마늘, 시금치, 부루(상추), 쑥갓, 홍삼(당근) 을 아기자기하게 키 맞춰 심고 울타리 따라서 돌아간 도랑을 손질하고 낮게 돌담을 둘렀더니 벌써 파릇이 미나리가 맑은 물에 하느적 하느적... 어느 덧 이쁜 공주가 태어났고 그들은 더욱 생활을 사랑하였다. 공주가 크면서 남청진 고급 아파트로 이사를 하였고 집을 찾는 사람들을 스리랑카 아동궁전에 인도하는 듯 잠간씩 꿈에 세계에 도취하게 그들만의 분위기로 이쁘게 집을 꾸렸다. 두 사람이 언제 한번 떨어져 다니는 것을 본 기억이 없다. 남한에서는 그런 부부를 닭살부부라고 하는데 문명하지 못한 그 세월에 언제나 세련된 옷차림에 아기를 안고 여유 있는 미소를 띤 그들의 모습은 뭇사람의 시선을 끌었고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어르신들의 입에서는 "일제시기도 이렇게 곤란하지 않았는데.." 하는 한숨소리가 새어나오기 시작하였다. 고난의 행군은 이 사랑스런 부부에게도 지옥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였다. 남편은 김정일의 모친 김정숙 대형그림이나 김정일 만수무강탑 등을 비롯해서 국가기관의 그림을 그리고 그나마 배급표를 가져왔지만 배급을 타려면 천사 같은 안해가 하루 종일 배급소에 지켜 서서 몸싸움을 하고도 쌀이 떨어졌다고 빈손으로 돌아온 적이 수 없이 많아 배급을 타본지가 오래되었다. 애써 체모를 지키려는 사람들이 다 그러하듯 옷은 반반히 입고 다녔지만 배급을 안 주니 직장에 나가도 소용없었으므로 그들도 어떤 방식으로든 식량과 돈을 마련하여야 하였다. 어린 남편은 처자식을 먹여 살리려고 무지 애를 썼다. 칠보산이나 금강산 등을 유람하며 그림을 그려서 가명으로 중국 장사군 들에게 팔았고 하루도 쉬지 않고 선원구락부 등 국가기관이나 잘사는 귀국자들 집으로 전전긍긍하면서 인테리어를 해주었다. 처음에는 안해가 붙잡고 남편이 대패를 밀고 하여 그녀의 손이 다 부르텄던 생각이 난다. 그렇게 밀고 깎고 책장, 서랍장, 농을 비롯한 가구를 만들어 시장에 팔았다. 그녀는 청진항으로 들어오는 중고 옷가지들을 박스채로 인수하여 집에서 새롭게 디자인하고 다림질하여 시중에 넘기는 일을 열심히 하였다. 허나 그 사회에서의 생존경쟁은 완전한 의미에서 긍정적일 수 없었고 부정행위가 없는 돈벌이는 생각할 수 없었다. 돈을 좀 모아서 장사를 시작한 뒤 국가기관을 빌려서 외화벌이를 시작하였고 중국국경을 넘나들면서 중국대방들과 만남이 잦아지던 남편은 어느 날부터인지 보위부 출입이 잦아졌다. 돈 문제로 보위부에서 오라 가라 하니 시달리는 게 좀 만 시끄럽고 귀찮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인지 남편에게선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중국 사람들이 사가면서 맛을 보던 얼음인지 하는 것을 자꾸 한 번씩 빨아보라고 준 것이 화근이 되여 차차 익숙해지기 시작하였고 귀찮은 일이 생기면 세월을 좀 잊고 싶다고 조금씩 사서 피우다가 그것 없이 못살게 된지도 3년이 되였다 한다. .... 내가 중국에서 잡혀 북송 되여 3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고 우연한 기회에 그 녀를 만나게 되였다. 몸이 절반도 안 되는 폐인이 된 나를 붙잡고 내가 변을 당한 것이 아니라 그녀의 가족 중에 누가 사망이라도 한듯 깊이깊이 흐느끼며 그녀는 슬프게 울었다. 남청진 큰 집은 어디에 가고 조그마한 단칸방에 세련된 소파와 이국적인 전화기, 보기 드문 일본제 가구들은 북한에서 괜찮은 축에 속한다고 볼 수 있었지만 천성적으로 늙지 않게 동안으로 타고난 그 남편에게선 어디선가 고리타분하고 따분함이 느껴졌다.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는 듯 한 친구와 그 집의 분위기를 느끼면서 이제 돈도 가정도 건강도 다 잃고 희망마저 없는 이 여자(나)보다 더 막막하고 답답한 느낌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그는 농 아랫단을 뒤져 무엇인가 풀어 헤치고 100달러짜리 두 장을 쥐어 주었다. 웬일인지 안쓰러워 보이는 친구에게서 이런 돈을 받는 것이 미안스러워 나는 괜찮다고 몸이 많이 안좋은거 같은데 병원에 가보고 치료도 받아야 할 것이 아닌 가고 했더니 아무런 희망도 이제 없다고 애꿎은 술병만 기울이던 내 친구... 그렇게 이쁘던 눈동자는 공허해지고 산발한 머리칼은 흰가슴위에 흩어졌다. 내가 정신 차리라고 술은 왜 자꾸 마시냐고 했더니 "어떻게 맨 정신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느냐? 너는 그래도 눈물 없는 세상에서 잘사는가. 했더니 이렇게 붙잡혀 뼈다귀만 남아 내 앞에 온 걸보니 나는 넘 넘 슬프다..." 고 목이 메여 더 말을 잊지 못하던 그 녀... 1998년 내가 중국으로 떠날 때도 길가의 가로수 밑에서 당신에게 이것밖에 없다며 그때 북한돈 200원을 손에 쥐어 주던 그녀가 지금 또다시 200달러를 손에 쥐어 주고 "다시 가지말라하면 말을 듣겠느냐. 넌 이미 이 나라에서 마음이 떠난 사람이니 나처럼 살지 말라" 고 울면서 갈 길을 재촉하였다. 하지만 그때 난 그의 남편이 그렇게 심각한 상황인줄 알지 못하였다. 나의 한국행이 성공한지 몇 달이 지나서 중국에서 나에게 전화가 왔다. 그녀의 외동딸이 탈북한 것이다. 그 친구의 딸은 아주 예쁘고 똑똑한 애였다. 중국에서 그애는 나에게 부모가 큰 엄마(나)한데 가라고 해서 왔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보름동안 먹을 수도 잘 수도 없이 숨이 막혀왔다. 수년을 중국 땅에서 고생이란 고생 다하고 북송 되여 처절한 고통을 당한 나로서는 20살 꽃나이인 그애를 살벌한 중국 땅, 그것도 연길에 둔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였다. 돈으로 브로커를 사서 보름 만에 한국에 입국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애는 하나원을 나와서 홀로 단독 주택을 받고 잘 살게 되였다. 그 애에게서 그애 엄마 아빠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아빠는 마약중독자가 되어서 병원으로 감옥소로, 집도 팔고 가전제품도 다 팔아서 약을 사고, 길거리에 쓰러지고 그러다가 이젠 살 가망이 없고 엄마는 알콜중독으로 위청공되여서 수술을 받고... "더는 북한이라는 나라와 부모에게서 희망을 볼 수 없었어요.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 엄청난 일을 저질렀어요. 부모를 저버린 저를 용서해주세요." 이것이 그 애가 나를 찾아온 이유였다. 아빠는 더 살 것 같지 못하였으니 하는 수 없지만 엄마라도 살려야겠다며 나라에서 살림하라고 준 돈 300만원을 몽땅 북한에 연락하고 있는 아줌마에게 보냈다. 그 북한 아줌마에게서 따로 듣자니 내 친구가 수술을 받은 뒤 몸이 많이 쇠약해진데다 남편이 사망하고 어린 딸애마저 잃어버리고 정신이 나가서 새카만 모래 바람 부는 청진 장마당을 맨발로 가로 꿰지르며 "소연아!! 소연아!!" 하고 통곡하며 넋 없이 헤맨다고 한다. 하지만 그 말을 소연에게 전해줄 수 없었다... 소연이는 내가 대충 살림살이를 장만해주었고 조금 안정되어서 살고 있다. 베란다 유리창에 부서지는 찬란한 햇빛에 몸을 맡기고 평화로운 모습으로 졸고 있는 듯 한 담담한 모습의 저 폴러샤스 화초처럼 순수하고 행복하고 정스럽기만 하던 그애 어머니... 하지만 이제 내 친구는 그런 당신의 모습으로 살지 못한다. 가을바람 부는 들가에 홀로 선 외로운 국화인양 갈기갈기 밟히우고 찢기운 한 버림받은 여인의 모습이 환영처럼 떠오른다. 아름다운 천사 같던 친구가 어찌하여 오늘 날 그렇듯 처절한 모습으로 되여 버렸을까? 그토록 생활을 사랑했고 고난의 행군의 모진 폭풍 속에서도 꿋꿋이 버티며 가정을 지키려고 모지름을 썼고 열심히 사랑했던 사람들에게도 예외는 없다. 북한은 범죄를 낳는 현장! 이런 사회를 그냥 두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루 빨리 북한에도 새봄을 오기를 바란다. 한국생활의 아름다운 봄날에. 2008년 3월 31일 미소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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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따뜻한 봄날씨가 언제쯤이면 북한에두 올까요?
사람이 태어나서 행복이란 두글자를 느끼면서 사는게 사람이거늘~~
일제치하에서도 그렇지 않거늘 어째서 북에서 그런일이 있는지 꼭소설책을 읽는것 같네요
타향살이에 지치고 외로움에 삶이 힘들다는 생각들때마다 천사님의 글을 접하게 되네요. 참 많은 격려와 위안 용기를 얻어가군합니다.
정말 고마워요.사람의 마음이란 참 간사해서요 하나를 얻으면 둘을 갖고싶어하고 욕심이란 끝도 없나봐요. 인간이란 항상 미래를 내다보며 살아야하고 보다 나은 생활을 위해 도전하는게 당연하지만 지금의 삶에 감사를 모르고 투정하는 제모습 이렇게 스스로 보고나니 얄밉고 짜증나네요.
좋은글 올려주심에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항상 감사하며 열심히 사는모습 너무너무 보기 좋았구요,좋은 분이신것 같아서 사귀여보고싶네요.ㅎ 저두 미소천사님이랑 똑같은 여자라서 다른뜻은 없어요.조금 이기적인것이 있다면 도움 부탁드리고싶은것이 있구요.
그냥 편하시면 연락 주세요.
제 메일주소는yanxi_5555@hanmail.net입니다
그리고 까페라떼님과 지은님 ....성원을 주신 여러분께도 넘 감사하구요 ^^^^^^
우리 다 같이 그날을 위해서 ...화이팅 해요 !! 사랑해요 여러분!!^^^^
수기의 주인공이신 두분이 정말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아름다운세상 꿈과희망이 있는 세상한번 구경도 못하고 고귀한생명들이
처참히 짓밝혀가는것을 보노라면 분함과 그분들의 희생이 정말 헛된것이
되지않기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통일이 되어야된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내모습일찌도,,
참,,잘읽었구여~
봄기운받아서 힘냅시다,,
참,,여러분 벛꽃구경갈때 같이가볼까요?...헤헤헤헤,,,
글을 쓰시는데 소질이 있는 듯 하네요.
작가나 수필가가 되셨어도 성공하셨을 듯 보여요.
혹 그런쪽으론 생각해 보신적 없으세요?
제 또래 정도 되신것 같은데,
자전적소설이나 수필,또는 그냥 수기를 책으로 내보시는 것은
어떨런지요?
잘읽고 갑니다,
오신지 일년좀되신분이 문체상에선 도저히 새터민이 쓴 글이라는걸 알아볼수가 없어요.
확실히 저의 귀감이 되실것 같은 생각이 찡~하니 스며듭니다.
저도 지금 글 쓰고있는데 아무리 짜내도 님의 문체처럼 되지가 않는답니다.
암튼 그쪽으로 은사가 분명히 넘치는것 같애요.
얼마전 얘기하신 조카가 그렇게 곡절많은 조카인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님의 따스한 인정과 인간애에 머리숙입니다.
앞으로도 지금의 그마음 변치마시고 하시는 일마다,쓰시는 글마다 우리 새터민들 나아가서는 우리 한반도와 온 세상을 감동시킬 미소천사님 되시길 충심으로 바랄게요.
참... 이만 명 시대에는 더 확 달라질 탈북자 인재들에 대해 기대가 큽니다. 화이팅! 입니다.
동영상세대라 읽는것 좋아하지는 않지만
님 글은 눈앞에서 보이는것처럼 생생해보여서 좋네여
북송되여 감옥에 있으면서 탈북인들의 역사를 세상에 알려야 하는 사명감을 사무치게 느끼고 생각은 많았지만 맘만 앞서고 자신이 없었는데 이렇게 여러분이 저에게 용기를 주시니 ...참 힘이 생깁니다
여러분들의 사랑과 기대를 잊지 않겠습니다
사랑합니다 !!
천사님 혹시 님이 직접쓰신거에요?
아니면 쓰시고서 교정을 새로받았나요?
정말 글을 읽을때면 감명있고 생생하면서도 사실적으로 적으셨네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혹시 시간돼시면은 좀더 글을 올려주세요
기대할께요 ㅋㅋ
그것이 중요한것이 아닌거 같았습니다
지금의 북한 사회를 알리고 서럽게 죽어간 영혼들의 넋을 기리며 지금도 여전히 신음하는 북한인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입을 모우고 싶은 간절한소망을 담아 구구절절 적었을 뿐데 .....
이렇게 과찬을 주시니 참말로 감사합니다
까페라떼님과 거식쟁이 님을 비롯한 사랑하는 가족여러분과 친구님들에게 진심으로 머리숙여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미소 천사님... 다시 떠 올리기 싫겠지만 감옥 생활에 대해서 한번 써주세요.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신 분들에게 조그만한 위로가 될만한 그런글 말이에요.
이토록 아름답고 간결하면서 가슴에 와 닿는 글을 쓸수있는지 님이 궁금해집니다..소연이 엄마를 구출해낼 수는 없을까요..
자기희생을 감수하면 님에게 처음 도움 주신 소연이 엄마같은 분은
이목숨 다 받혀서라도 구출해 내드라도 후회없는 그런 가치가 있는 여인같군요...!!!저 어제 밤새도록 천사님과 친구분의 그 모습이 아련거려서
밤을 꼬박 뜬분으로 새었습니다.
님의 글을 보게된 것을 큰 행운으로 생각합니다...미소천사님!!천사님!`~
거식..님 ,쪽배님 대한, 장미,남새분조원...님 그리고 하늘 ,지나님...
저의 글을 성의 있게 읽어주시고 힘을 주신님들을 언제나 기억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들의 기대에 노력으로 보답 하렵니다
그리고 저와 저의친구를 떠올리시며 잠을 못이루신 아지랑이님의 뜨거운 동포애에 감동과 다함없는 친근감을 느끼고 님을 비롯한 사랑스런 여러분과 친해지고 싶어 졌습니다 .
여기친구들중에게 저에게 미니 홈피 같은것을 만드는 것이 어떤가하고 제안한 분도 계시던데 저는 아직 컴을 잘 활용할줄 모르는 형편이여서 .....
그럼 사랑하는 친구분들 .....모두들 건강하시고 여러분들의 앞날이 지금까지 살아온 나날들중에 가장 아름다운 날들로 되시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삶이 고단해지고 정신자세가 허트러질 때면, 탈북인의 글을 읽으면 마음을 다잡아주는 계기가 됩니다.
미소천사님의 글은 다른 탈북인들의 글과는 차별성이 있네요. 한마디로 부드럽다고 할까요?
물론 북한과 완전히 다른 남한에 산다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는 않겠죠.
하지만, 사람사는 곳은 어디던지 다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디에서 사시던지 행복하세요.
거상 정주영회장도 이북 황해도 출신이시고
큰인물들이 많이 나는 땅에 인물들을 쓸 수 없게 만드신 하나님이 야속합니다.
미소천사님 글연습을 조금만 더하시면 문학계에 등단하셔도 손색없겠군요.
여기도 그렇고 저기도 그렇고...
언제 이런 악몽에서 깨어나서 피붙이가 서로 얼싸안고 돌아가며
춤추고 희망의 날을 맞이 할건가..
가여운 조선이여 참고 인내하며 그날을 기다리세.
이제 얼마 안 남았다네.
이 홈페이지에 들어와 보면 시간가는 줄도 모르겠구요, 눈물나는 이야기를 실감있게 잘 쓰셔서 더구나 감사히 보았습니다.
저도 올해 대한민국땅에서 첫 봄을 맞았습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중국에서 봄을 맞았는데...
지난 해 12월에 새 사회에 정착의 발을 내 디디고 정신없이 어푸러지듯 달려온 오늘입니다.
하나원에 있을 때 부터 잘 모르는 컴퓨터로 자료를 수집하여 나오자마자 사이버를 보지만 워낙 수십년간의 체제차이는 저로 하여금 너무나 높은 장벽을 넘어야 하는 어려움을 내 놓았습니다.
낮에는 화장품회사, 밤에는 식당알바... 식당일을 관두게 되자 거의 20일만에 운전면허도 따고...
중간고사로 자격시험으로 바쁘고도 알찬 날들을 보내니 한국땅에서의 첫 봄은 바야흐로 흘러가버리고...
너무나 눈물많은 우리의 지난 날입니다.
저도 본의아니게 고향집을 떠나 말도 통하지 않는 남의 나라땅에서 억척같이 살아 온 그 정신으로 열공하고 있습니다.
북한에서 잃어버린 20년을, 본의아니게 해외에 버려진 몇해를 봉창하는 맘으로, 불쌍하게 저 세상의 영혼이 되어버린 가엷은 넋들의 몫까지 힘차게 살아갑니다.
미소천사님^^(*
탈북자여러분, 화이팅!~
좋아서 삶을 살려고 마음먹었고 사랑해서 함께 할려고 했었는데 그 삶이 늙은 나무뿌리가 되였습니다.
사랑했던 달콤한 그시기는 이젠 지나갔고 힘들고 지겨운일들만 그들이 지키고 기다리니 그속에서 태여난 공주는 지나간 과거에 얽매이지 않기를~~
글을 읽다나면 아픈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조선사람들의 현실이 몇분이라는 사이에 눈앞에서 그대로 펼쳐지는 느김이에요
전 중국에서 살고 있는몸이지만 힘을 놓지않고 살아가고잇는 우리 탈북자들의 모습을 보네요.... 앞으로 더좋은 글을 써주시를 바라며...
니 그말이 쏙들어갈기다
탈북자 1천만 내려오면 너새끼 북한 올라가서 땅 사가지고 부자되면 좋잖어.
그리고 늙도록 장가못가고 누렇게 뜬 네놈 거시기 청천강가에서 청소도 좀하고...
오죽 좋으냐? 바보새끼야.
- 고발자님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2010-12-28 21:02:57
현재 소연이 어머니와는 연락은 취하고 계신지요? 궁금합니다.가능하다면 저도 돕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