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는 '군부강경파'도 '온건파'도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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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전 몇 사람이 모여 북한에서 조선노동당 국제담당 비서를 지낸 (고)황장엽 선생과 공부를 한 적이 있었다. 교재는 황 선생이 저술한 ‘민주주의정치철학’이란 책이었다. 황선생으로부터 듣는 정치철학 얘기도 인상적이었지만 보다 흥미를 끌었던 얘기들은 북한에서 벌어진 각종 사건들의 이면에 관한 얘기였다. 예컨대 1990년대 중반 북한에 식량위기가 왔을 때의 북한 내부 사정 등에 관한 생생한 얘기는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알게 된 지식과는 차원을 달리했다.
굳이 이 얘기를 먼저 꺼낸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적어도 북한에 관한 연구를 함에 있어서는 북한에서 살다 온 사람들의 얘기를 가장 신뢰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북한에서 살다 왔다고 해서 북한의 전반적인 사정을 모두 잘 알 수는 없다. 그렇더라도 자신이 종사했던 영역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정확한 지식과 정보를 갖고 있다고 인정해줘야 한다. 역사를 연구할 때도 현장을 직접 목격한 사람의 기록인 1차 사료만큼 중요한 것은 없지 않은가.
이런 너무나 당연한 상식이 국내에서 북한을 연구하는 학자들이나 북한을 전문적으로 취재하는 기자들 사이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듯 하다. 물론 모든 전문가들이 다 그렇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렇지만 국내 북한연구자들이나 북한 담당 기자들 사이에 북한에서 온 탈북자들의 얘기를 별로 신뢰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북한 ‘군부강경파’에 관한 국내 언론의 보도태도도 마찬가지다. 물론 기자들이 인용하는 전문가들의 견해도 상당수가 비슷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겠다.
“많은 전문가들은 북한 내부에서도 군부를 중심으로 한 강경파와 내각을 중심으로 한 상대적 온건파의 이견이 있다고 본다.”(오마이뉴스 2010년7월 24일), “군부 등 강경세력의 목소리가 높아지고”(연합뉴스 2010년7월 18일자), “군부강경파의 입김이 상당히 작용하고 있다”(CBS라디오 대담 최성의원), “북한의 미사일 발사는 매우 불합리한 선택으로서 북한 내 군부 강경파의 도발이 아닌가 생각되며”(민주당 강봉균 의원)
결론적으로 북한에는 ‘군부강경파’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군부’도 없고 ‘강경파’도 없다. 무슨 얘기인가. 먼저 군부에 관해 따져보자. 군부의 사전적 의미는 ‘군사에 관한 일을 총괄하여 맡아보는 군의 수뇌부 또는 그것을 중심으로 한 세력’을 말한다. 따라서 ‘군부강경파’라는 말이 성립하려면 북한의 군 수뇌부들이 모일 수 있어야 하고 여기에서 의견을 집약하여 집단적인 의사표시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예컨대 인민무력부장과 인민군 총참모장, 총 정치국장 등이 모여서 미사일 발사에 대한 의견을 조율하고 합의된 내용을 정책에 반영할 수 있어야 한다.
북한에서 온 고위급 인사들 중 이런 협의체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군의 수뇌들은 오직 김정일과 1대1의 관계만 존재하는 것이다. 김정일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가. 미국의 가공할 군사력도, 중국 인민해방군도, 대한민국 국군도 아니다. 내부에서 생길지 모르는 쿠데타를 가장 두려워하고 있다. 김정일은 쿠데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군의 지도급 인사들은 물론 국민 모두를 철저하게 감시하고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나 군 수뇌 몇 사람이 김정일이 모르게 모였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바로 죽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강경파’라는 말만 해도 그렇다. 강경파가 있으면 온건파도 있어야 한다. 여기에 대한 외교관 출신 탈북자인 고영환씨의 견해를 살펴보자. 고영환씨는 국내에 들어온 후 ‘북한 외교정책 결정기구 및 과정에 관한 연구’를 석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한 바 있다. 이 논문에서는 북한에 강경파와 온건파가 있을 수 없다는 점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고씨는 강온파를 나누는 것은 오직 서방식 논리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예를 들면 노동당 국제사업부, 외교부, 일부 경제부처의 관리들은 온건파이고 국가안전보위부, 인민무력부 등은 강경파로 보는 견해를 말한다. 고씨는 개인적으로 강경파와 온건파는 있을 수 있지만 북한에서 정책결정 과정에는 이런 개인적 성향은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북한에서 유연한 사고가 정책에 반영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사상적-이념적 규제와 제약이 가로놓여 있다는 것이다. 즉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교시나 지시,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의 10대원칙에 어긋나는 것은 철저히 억압을 받는 상황에서 온건파니 강경파니 하는 것은 도저히 가능하지 않다는 얘기이다.
고씨는 외교부 관리가 “핵문제를 지금 강경한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들면 우리는 더욱더 국제적 고립에 빠져들 수 있다”고 판단은 할 수 있지만 김정일에 대한 충성심을 가장 우선하기 때문에 이런 판단이 정책에 반영된다고는 절대로 볼 수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물론 정책결정 과정에 고위급 간부들이 내부적으로 약간의 논의는 할 수 있다는 점은 고씨도 인정한다. 특히 주목되는 점은 북한관리들은 ‘우경적 오류’ 보다 ‘좌경적 오류’를 범하는 것이 안전하다는 것을 누구나 체득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우경적 오류를 범한 자는 ‘기회주의자’ ‘투항분자’ ‘부르주아분자’ ‘패배주의자’ 등으로 낙인찍혀 정치적으로 살아남을 수 없다고 한다.
미사일 발사나 핵무기 개발과 같은 사안을 군부강경파가 주도했다는 식의 논리는 자칫 김정일에게 면죄부를 줄 수도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아웅산 테러는 물론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등 지금까지 북한에 의해서 저질러진 극악무도한 테러들은 전적으로 김정일의 주도로 이뤄졌다. 최근 국제사회를 협박하고 있는 미사일이나 핵무기 역시 마찬가지다. 북한에서 김정일의 의도는 절대적이다.
따라서 김정일이 군부의 압력 때문에 강경책을 쓴다는 식의 언론 보도는 지양돼야 한다. 북한체제가 작동되는 시스템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됐다고 봐야 한다. 거짓말을 상습적으로 해대는 김정일과 그 추종자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버리는 어리석음에도 이런 현상은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언론의 잘못된 보도는 국민들에게 북한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줌으로써 결과적으로 큰 재앙을 불러올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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