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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이해.facebook F의 글 옮김.
재간동이 0 344 2013-02-25 11:55:05

자본주의 부가 얼마나 가치있게 쓰여야하는가.

우리 가족은 토끼를 한 마리 키운다. 애들 엄마는 장을 볼 때 마다 잊지 않고 토끼가 좋아하는 옥수수와 고구마를 한 꾸러미씩 사온다. 작은 아이는 식당에서 브로콜리가 보이면 토끼 생각이 나는지 하나씩 슬쩍 집어오기도 한다. 여느 강아지들처럼 말을 알아듣지도, 재롱을 부릴 줄도 모르지만, 우리 토끼는 귀여운 생김새만으로 큰 사랑을 받고 있다. 토끼는 이제 한 가족이 되었다. 사료, 간식, 건초, 종이배딩, 소독 휴지, 여행 시 돌봐 줄 사람 비용 등 이 조막만한 애완동물에 한 달에 평균 40불 정도가 들어간다.

 

토끼를 위해 매달 지출하는 40불. 그 돈은 현재 아프리카에서 기아 상태에 놓여있는 아이 한 명을 살릴 수 있는 금액이다. 이 아이는 한 달에 35불만 있으면 굶어 죽지 않고 살아 낼 수 있다. 미국 전역에서 애완 동물을 위해 1년에 총 지출되는 돈은 300억 불, 이 돈이면 전세계의 기아를 없앨 수도 있다. 우리는, 아이가 아침만 거르고 학교에 가도 신경이 쓰이고 두 끼만 굶어도 가슴이 아프지만, 지구 저 편에서 남의 아이들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굶어 죽어나가고 있다. 내 아이가 감기에만 걸려도 마음 한 구석이 괴롭지만, 다른 한 쪽에서는 수 많은 아이들이 에이즈와 풍토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고 있다.

 

경쟁의 묘미(자본주의)

전구가 발명되고 공장에서 쏟아져 나온 뒤의 양초 업자들의 딱한 사정이나, 디지털 카메라가 상용화 되고 나서 망하기 시작한 동네 사진관 아저씨들의 사정은 서운함이라는 말로는 다 설명이 안되는 비극이다. 창조와 혁신은 무엇인가를 밟고 파괴하며 생겨나고, 혁신의 뒷면에서는 경쟁에서 쳐져 몰락으로 고통스러워 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있다.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시장이 전체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는 이러한 창조적 파괴의 과정에서 고통스러워 하는 이웃들에 대한 연민이 깊은 나머지 때로는 엉뚱한 곳으로 분노를 표출하기도 한다. 마르크스가 죽은 지 오래고, 그의 실험이 실패로 드러난 지도 수 십년이 지났지만 아직 그의 유령이 좌파들의 입을 통해 우리 주변을 떠도는 이유는 사람들이 이토록 착하고 이타적이기 때문이다. 넘어지는 이웃에 대한 이타심은 그러나 이성의 필터를 거치지 않는다면 위험할 수 있다.

 

전구는 양초업자들에 대한 적대감에서 발명된 것이 아니라, 보다 밝고 오래가는 빛을 공급하려는 사람들에 의해 생산되었고, 바로 그 이타적인 소비자들에 의해 양초 대신 선택되었다. 디지털 카메라나 자동차 모두 다 마찬가지다. 새로운 상품으로 몇몇 사람들은 일시적으로 매우 불행해졌지만, 수 많은 사람들의 생활은 조금씩 그리고 지속적으로 개선된다.

 

양초 업자에게 조차도 양초를 제외한 나머지 (n-1)개의 개선으로 인한 이익이 전구의 등장으로 인한 손해보다 크다. 우리 모두가 조금씩 잘 살게 되고 있다는 사실의 의미는 그런 것이다. 재래시장 상인은 파리바케트가 생겨서 이득을 보고, 동네 빵집도 대형 마트로 이득을 얻는다. 전체가 잘 살게 된다는 의미는 문자 그대로 이런 것이다. 대규모 농장에서 기계로 경작해 가격이 싼 미국 쌀이 수입되면, 감성적인 영화에 나오는 친구 같은 소를 이용해 농사짓던 농민들의 삶은 팍팍해지겠지만, 저렴한 농산물로 전체에게 돌아가는 이익의 합은 농민의 손실보다 반드시 크고, 재래시장에서 망하는 상인들의 숫자보다 대형 유통업체에 고용되어 생계를 이어가는 노동자들의 숫자가 커서 전체적으로 이득이다. 인간이 생산한 상품 중에 기존의 것을 파괴하지 않고 존재하는 것은 아마 하나도 없다. 서울에서 광주로 내려가는데, 무궁화 열차도 타고 또 KTX도 동시에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사실은 누구나 이해한다. 무궁화호를 포기해야 고속철을 향유할 수 있다. 하지만 고속철을 선택한 것이 무궁화호 열차에 기관사나 고속버스 기사들에게 ‘피해’를 준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버스를 이용하면 철도청 직원들에게 그 ‘피해’가 돌아갈 것이다.

 

자본주의가 물신을 모시고 탐욕으로만 소통하며 경쟁만을 부추기며 사랑으로 발화하지 못한다는 그릇된 믿음은 철지난 지식사회학에 미련을 두고 있는 집단주의자들의 선전이다. 라스바드가 이야기 했듯이, 자본주의의 생산력이 증가하여 경제가 점점 풍요로워질수록, 교환할 수 없는 재화의 한계효용은 커지고 교환하기 용이한 재화의 한계효용은 감소하므로 자본주의가 물질주의라는 주장은 오히려 반박된다. 이 시대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소유물에서 자신을 분리하고 존재를 지향하는 명상이나 사랑, 자기 체험과 같은 소중한 가치들에 눈을 돌리고 자아를 찾으려 애쓰고 있는가? 영적인 삶을 위한 물적토대는 더욱 공고해졌다. 환경이나 영혼이 사소한 것들이라서 그간 무시되어온 것이 아니라 그 보다 더 다급하다고 여겨졌던 일들이 다수에 의해 우선적으로 선택되었을 뿐이다. 50-60년대 한국의 대중에게 명상이나 웰빙, 친환경이라는 말이 가당키나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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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생 ip1 2013-02-25 12:42:12
    맑스의 공산주의 이론과 ..... 반 자본주의 이론은....새로운 착취형태...
    즉 몇몇의 자본가가 아닌 ---바로 국가가 자기의 국민을 착취하는 새로운 집단주의적 사회주의 착취형태를 빚어 냈으며...

    또한... 자유로운 기업의 사장들과 기업주들을 없애고 .. 사회주의 각 나라들마다 수령이라는 단 하나씩의 거대한 독거미를 배출해 놓았죠.

    그로 인하여... 맑스의 이념을 따랐던 사회주의 나라들에서야 말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 한 인간에 의한 대중의 자유말살... 이것이 제대로 이루어졌던 것이죠.

    그런데 오직 이 남한 땅에 만은 아직도 그런 제도를 추앙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뭐라 할 말이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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