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에 대한 어렴풋한 이해를 가지게 된 것은 소학교(초등학교)시절이었다. 89년 평양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비밀리에 방북했던 ‘남조선학생’ 임수경이 판문점에서 귀환을 위한 단식투쟁을 하다가 판문점의 분단선을 넘는 모습은 강한 충격으로 기억되었다.
유치원 이전부터 불렀던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가 그때부터 북받치는 감정으로 부르게 되었으니 TV를 통해 본 판문점의 모습이 준 영향은 엄청난 것이었다. 날카로운 눈매의 남북한 군인들이 무기에 손을 얹은 채 서로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 모습은 분단의 통증을 알아 가는 데 긴 설명이 필요 없었던 풍경이었다.
군인가정에서 태어나 성장한 나의 꿈은 어려서부터 직업군인이었다. 학교시절부터 국방체육에 몰두해 있었고, 고등학교 졸업 1년 전부터 군 특수병종에 뽑혀 사상과 체력을 검증받았다. 그리고 1차 면담에서 판문점 군인을 지원했지만 그제야 판문점에서 근무하던 북측군인들이 사병이 아닌 사병 계급장을 한 엘리트출신 장교들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어 판문점에서 근무할 수 있는 방법을 물었더니 판문점 내 민경(민사행정경찰)으로 지원하면 가능하다는 대답을 들었다. 마침 특수병종에 민경이 속해있던 터라 나는 주저 없이 판문점 민경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해에 있은 판문점 군인의 귀순사건으로 민경훈련병들은 입대 한 달 만에 인근 민경부대에 배속되게 되었다. 내 나이 만 16살, 1년 가까운 혹독한 훈련소생활을 마치고 13년 군 사병생활의 첫걸음을 판문점을 옆에 낀 비무장지대(DMZ)에서 시작했다.
한국과 달리 최전방지역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은 북한주민들에게 있어 비무장지대는 적과 아군의 대결장을 넘어 싸움터로 인식되어 있다. 비무장지대에서는 남북한 군인들 사이에 전투가 끊이질 않다고 생각하고 있기에 출처불명의 무용담 역시 북한사회에 넘쳐나고 있었다. 정작 비무장지대에 들어오니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비무장을 둘러싼 남북한의 분단환경은 그러한 분위기를 충분히 유도해 내고 있었다.
비무장지대에 들어온 첫해에 북측의 민경과 남측의 민경 사이에 소총과 포(비반충포)까지 동원하여 사상자를 낸 전투가 벌어졌고 중앙분계선(MDL)순찰 중에 지뢰를 밟아 목숨을 잃는 동료들을 마주해야 했다. 또 하루 24시간도 모자란 듯이 고성능 확성기로 서로를 물어뜯는 대북·대남방송과 비무장지대 밖에서 쉼 없이 쏴대는 중화기의 사격소리, 오랫동안 묻혀 있다가 눈앞에서 절로 터지는 지뢰폭발 장면 또한 남북의 첨예한 분단현장에 내가 있음을 실감케 하였다.
그러나 이후 나는 전혀 예상치 못한 사건들을 목도하게 되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이 평양에서 진행되었고 그로 인해 남북한이 어떤 변화의 길을 걷는지 비무장지대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최고 존엄’까지 모독하며 서로를 비방하던 대북·대남방송은 서로 수위를 낮추어 진행했고 두 적대국의 민경요원들은 총을 거꾸로 메고 철책선을 뜯어냈다. 비무장지대의 지뢰원을 들춰낸 자리에는 철도레일과 침목이 깔렸고 자동차가 다닐 수 있게 길도 닦아졌다.
분단은 잔인하였지만 한편으로는 희망을 지니고 있었다. 남북한이 협력하여 개성을 통일지대로 만든다는 소문이 나면서 출신성분이 나빠 움츠려 있던 개성사람들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고 전역 후 평양입성을 꿈꾸던 민경요원들은 전역과 동시에 주둔지 근처에 있는 개성공단에 새 보금자리를 틀었다. 내가 담당했던 제압방송 업무도 한결 여유로워졌다. 몇 년 후 나는 근무하던 DMZ내 북측 심리전 제압방송국에서 이탈하여 분단선을 넘었고 탈출 25분 만에 한국 측 초소에 도착했다.
비무장의 남쪽에서 분단을 경험하다
임수경 의원의 ‘탈북자 비하발언’사건은 나에게 여러 가지 의미로 다가왔다. 북측에서 경험했던 분단이 간접적인 분단이었다면 남한에 와서 경험하고 있는 분단은 당사자로 낙인된 분단이었던 것이다. 한국에 온 순간부터 나는 휴전선을 넘어온 귀순자라는 꼬리표가 갖는 거리감과 이질감을 맛보아야 했다.
이미 귀순자에 대한 대우와 배려가 사라진 때여서 ‘북한이탈주민’이라는 용어로 불리던 탈북자대열에 합류했지만 많은 탈북자가 북측 국경경비대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던 터라 나를 대하는 시선이 곱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탈북 경로와 출신을 묻는 탈북자들에게 휴전선을 넘어온 귀순자임을 밝히기가 꺼려졌고 탈북자라는 보편성과 귀순자라는 특수성 앞에서 일반 탈북자였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부러움이 압도했다. 탈북자사회 내에도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한 미묘한 갈등과 내적 긴장의 폭은 생각보다 깊고 다양하다.
탈북자정착기관인 ‘하나원’을 퇴소하고 사회에 나오자 이번에는 또 다른 분단적 정체성과 가치관의 혼란이 찾아왔다. 탈북자라는 편견이 차별로 이어지고 있는 사회에서 탈북자들은 스스로를 ‘조선족’이라 얘기해야만 3D업종에라도 취업이 가능했다. 나는 차마 자신을 조선족으로 소개할 수 없어 억양이 비슷한 강원도로 소개했지만 北 강원도인지, 南 강원도인지를 물어보는 집요함에 두 손 들기도 했다.
임시방편이지만 언어교정만이 탈출구라고 생각하며 라디오를 들으며 발음교정을 하다가 솟구쳐 오르는 서러움에 왈칵 눈물을 쏟기도 했다. 하지만 언어교정이라는 요식행위 후 남북의 간극이 한결 좁아진 것은 사실이다. 주위 탈북자들이 삼삼오오 ‘탈남’을 했지만 오기가 생겼다. 분단이 무엇인지를 배워서 분단을 뛰어넘는 통일을 사유하고 싶어졌다.
대학에 진학하여 정치학을 전공했고 혈혈단신이지만 휴학 한 번 하지 않고 졸업했다. 학점이 안 좋아 장학금을 받지 못해 십 수 가지의 일을 하며 등록금을 마련했고 탈북과정을 물어보는 똑같은 질문에 웃으면서 수백 번 반복하여 대답하는 날들을 거쳐 조금씩 적응했다. 졸업 후 전공을 살려 국회에 취업했지만 공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무작정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리고 천착의 범위를 분단과 통일로 넓혀 공부를 다시 시작했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분단과 통일은 책이나 이론보다도 자신의 위치와 삶을 통해 더 정확히 드러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요즘은 분단을 그 조난자나 피해자들을 통해 안방에서도 알아갈 수 있는 환경에서 살고 있다. TV와 언론매체에 접속하면 언제든 탈북자나 분단으로 인한 피해자들을 볼 수 있고 또 구구절절한 사연을 접할 수 있다. 그리고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남북한의 얼룩진 분단사를 알 수 있음만큼 정보들이 공개되고 있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여권도 발급받지 못하던 탈북자들에게 여권발급 제한은 이제 옛말이 되었다.
그리고 과거 분단으로 인해 피해 입은 사람들이 재심을 청구하거나 그에 따른 보상도 받고 있다. 분단은 무겁지만 역동적인 것이다. 그러나 분단이 역동적이라고 해서 함부로 폄훼하거나 백안시하는 태도는 지양해야 할 것이다. 분단이 품고 있는 문제는 단순히 잔인함이나 희망, 그리고 무거움과 역동성이라는 흑백론적이고 이분법적 사고가 아닌 전체 스펙트럼을 아울러야 하는 교훈과 진중함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TV에 출연하여 과장되어 소비되는 일부 탈북자들이나 통일 혹은 북한문제를 오락화·상업화하는 사람들이 비난을 받는 까닭도 깊은 성찰이 결여된 채 분단이라는 복잡한 결을 잘못 읽거나 단순하게 이해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특히 분단은 그 누구의 전유물이 아닌 모두의 상생을 위해 잊어서는 안 되는 아픔의 가치이며 역사적 정체성이다.
10년간 한국에 살면서 진보와 보수의 두 정권을 경험했다. 내가 본 한국사회에서의 진보와 보수는 야누스의 얼굴이다. 두 개의 전혀 다른 얼굴로 보이지만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얼굴이다. 탈북자는 어떤가? 진보정권에서는 분단의 사생아인 것은 맞지만 이방인이었고 보수정권에서는 활용의 가치는 있지만 잠재적 위험분자가 아닌가.
그러나 탈북자는 결코 후흑한(厚黑漢)이 아니다. 오래전부터 같은 민족이고 분단 이후라도 헌법상 국민이었으며 지금은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가진 시민일 뿐이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경계당하고 주변부로 몰리는 것은 분단의 아비투스가 낳은 실체가 불분명한 잘못된 집단기억 때문일 것이다. 통일은 선이요, 분단은 악이라는 통찰 없는 선악의 이분법이 적합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에 대한 잘못된 기억의 착종과 그림자를 걷어냈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나의 소원은 통일
한민족은 통일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잘 응집해주는 용어였다. 그러나 70년 가까운 분단으로 인해 서로 다른 삶을 살아왔던 남북한 주민들에게 있어 한민족의 통일은 언제부터인가 진부한 용어로 연상될 뿐이다.
분단으로 인한 고통에 점점 무감각해지고 개인을 중심으로 한 배금주의는 확산되고 있으며 한민족의 동질성은 소멸의 길을 걷고 있다. 통일의 결정적 계기가 우리 옆에 찾아와도 ‘우리의 소원인 통일’의 노래를 부르며 통일을 환호로 맞이할 자세가 아닌 통일로 인한 이해득실의 계산기를 두드려보는 것이 작금의 모습들이다. 통일이 현실임에도 분단상황에 만족하고 안주하려 하는 것, 이 또한 오랜 분단이 안겨준 형용모순이다.
고향과 그곳에서의 20여년의 기억을 가진 나로서는 통일은 간절한 희망이자 꼭 이루어야 할 꿈이었다. 그러나 한국에 와서 통일을 얘기할 때 과제를 내주는 조교처럼 불편한 시선들에 둘러싸이게 된다. 우리는 지금이 좋은데 당신이 바라는 통일로 인해 왜 우리까지 손해를 봐야 하는 식이다.
때로 우리가 한민족이라는 증거를 대보라는 기상천외한 질문을 받는 날이면 분단의 조난자로서의 입지가 더욱 슬퍼진다. 한국사회에서 탈북자의 신분이 일반국민이 아닌 조선족보다 못한 이등 국민이라는 것은 만인공지의 사실이기도 하다. 탈북자를 양아들로 삼아도 사위로 맞을 수 없다는 10년 전 얘기나, 탈북여성이 착한 것은 사실이나 며느리로 들일 수 없다는 TV속 탈북미녀들의 하소연은 세월이 지나도 변함없는 아웃사이더들에한 이곳 사람들의 분단적 구습을 말해준다.
정착의 어려움을 반증하듯 그동안 탈북자사회에서는 ‘탈남(脫南)’이 표면화되어 왔다. 공식적으로는 2천 명, 비공식적으로는 3천 명이 넘는 탈북자들이 한국을 떠나 외국으로 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숫자는 국내에 입국한 탈북자의 10%를 훨씬 상회하는 숫자이며 특히 독일통일과정에서 외국으로 간 탈동독자의 숫자가 극히 소수였음을 상기할 때 우리 안의 분단이 생각보다 견고함을 알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제3국에 체류중인 탈북자들이나 탈북을 고민하는 북한 주민들에게까지 ‘한국에 가면 오히려 더 살기 힘들다’라는 소문이 퍼져 있다. 그 결과 자연스레 탈북의 최종 목적지는 한국이 아닌 제3의 국가로 바뀐다. 주된 이유는 한국사회에서의 차별과 편견이다. 이는 한민족에 대한 전통적 인식구도에 변화가 있었음을 뜻하며 통일에 필요한 관용이나 가치관 등이 충분치 못함을 의미한다.
내가 대학원에 진학할 시기만 해도 대학원에서 공부하는 탈북자가 별로 없었다. 그럼에도 박덕하고 부박했던 생활환경과 엄청난 학비와 생활비로 인한 고생은 상상을 초월했다. 한국에 수백 개가 넘는 장학재단이 있어도 등록금을 마련할 능력도 연고도 없는 탈북학생을 도와주겠다는 곳은 없었다.
국가와 학교로부터 등록금과 생활비 전액을 지원받으며 공부하는 외국학생들이나 군 위탁생들이 솔직히 부러웠고 한편으로는 통일에 투자할 학교나 정부정책이 없는 것에 대한 서운함도 있었다.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취약한 상태는 아니었다. 대학원 성적이 나쁘지 않아 조교장학금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등록금 외에도 집세나 생활비를 스스로 마련해야 하는 불비한 처지이기에 아쉽지만 그것마저 포기해야 했다.
절치부심 끝에 학비를 마련하려고 기업에 입사원서를 냈는데 탈북자임을 밝힌 입사지원서를 받아주는 기업이 없었다. 탈북자라는 흔적을 지우고 다시 지원 서류를 제출하니 그제야 대부분 합격이었다. 서류심사를 통과하면 그다음은 비교적 명확해진다. 인·적성 시험을 통과하고 두세 차례의 면접 과정에서 면접관들에게 나를 알리고 그들이 나를 선택하게 하는 것은 대기업일지라도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때 나는 분단이 만든 부정적인 적폐가 얼마나 사회 곳곳에 깊숙이 뿌리 내렸는지 보았다. 그러나 그러한 분단논리에 맞서 직접 부딪치며 적극적으로 설득하면 진심이 전해졌다. 탈북자라는 이름으로는 서류심사에 통과할 수 없었지만 정작 시험장에서 경쟁력과 자신감, 진실성을 보이니 그때부터 이념이 아닌 사람의 일로 변한 것이다. 분단극복도 마찬가지이다. 70여년 분단의 잔인함과 무거움 속에서도 생명력을 가지고 있었던 역동성과 희망을 통일로 승화시켜 갈 때 가능성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통일을 둘러싼 빛과 그림자
‘통일은 대박’이라는 통일대박론이 신변 벽두에 터지면서 우리 사회에서 다기다양한 통일논의가 소용돌이치고 있다. 결코 장밋빛 미래만을 얘기하는 통일대박론이 아니기에 다양한 의견과 이해관계가 표출되면서 이제는 통일을 둘러싼 갈등도 갈수록 커지고 있는 양상이다.
그동안 통일문제만큼은 보수와 진보진영에서도 유일하게 교감하며 교집합으로 한목소리를 냈던 부분임을 상기할 때 ‘통일’을 가운데 두고 또다시 갈등하고 분열하려는 조짐은 춥고 어두웠던 분단사의 긴 터널을 다시금 연상케 한다. 통일도, 통일 후의 미래도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나는 ‘통일은 대박’이라는 통일방침의 표제와 마찬가지로 준비하지 않는 통일은 쪽박이요, 재앙이라는 강조도 차분하고 진지한 통일담론속에서 함께 전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분단문제의 이중성과 중층성을 비롯하여 통일문제의 다중성과 복합성까지도 함께 다루어져야 하며 분단문제의 해결 속에서 통일문제의 열쇠를 찾아야 할 것이다. 분단문제의 이중성은 국제적 시각에서는 탈냉전의 세계화 속에서도 여전히 냉전의 조류가 있는 한반도 분단의 이중적 성격을 뜻하며 국내적으로는 북한을 바라보는 관점으로 볼 수 있다. 북한을 한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위협세력이자 한민족으로 보는 이중성은 아직도 분단극복을 위한 교통정리가 남아 있음을 말해준다.
분단문제의 중층성은 해방과 함께 찾아온 분단으로 인한 정치적 분단, 지리적 분단, 민족적 분단과 경제적 분단 모두를 포함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가치, 생활양식 등 전 분야에서의 이질화를 뜻하며 이는 남북한 모두 서로에게 극단적 시각과 부정적 인식을 갖게 하는 분단적 요인이기도 한 것이다.
통일문제의 다중성과 복합성도 분단문제와 궤를 같이하며 그 연장 선상에서 해부해 볼 수 있다. 예컨대 통일의 방식이 흡수냐 무력이냐, 아니면 합의냐 신탁방식이냐에 따라 난해하고 어려운 다중성을 풀기위한 고차방정식이 필요할 것이며 복합성에 있어서도 한반도 영토문제를 적시한 국제법과 국내법, 그리고 남북관계를 규정한 실정법, 특별법, 남북한 간의 합의서들에 대한 이해와 출구전략들이 과제로 남아있다. 사실상 통일문제는 분단문제의 이해와 극복에서의 출발을 요구하며 어떤 방식으로 통일을 하고 통일 후 어떤 상생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 로드맵과 원숙한 지혜를 필요로 한다.
통일의 궁극적 주체는 남북한 주민이다. 어떤 방식의 통일이든 최종선택은 주민의 몫이다. 한국사회에서 통일론이 호응을 얻으려면 전 국민적 이해와 지지가 필수이듯 북한에 있어서도 어떻게 그곳 주민들의 마음을 확보하느냐가 관건일 것이다. 독일의 상황과는 다르게 현재로썬 한국에서는 북한주민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전무하다.
그럼에도 주민들의 마음을 얻고 통일 후 통합에 대한 능력을 검증할 수 있는 시금석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한국에 와 있는 이탈주민들인 것이다. 그러나 주지하듯 많은 사람이 적응에 실패하고 있고 또 많은 이들이 제3국행을 희망하는 것이 현금의 실상이다. 하지만 이들을 우리 사회에 통합하는 문제가 통일 후 성공적인 통합으로 성큼 다가갈 수 있는 바로미터이기에 시나브로 서로 이해를 넓히고 함께 작은 통일을 이루면서 그 폭을 확대해야 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탈북자 스스로 열등의식과 남북갈등의 대명사를 지우는 일도 필수적 과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분단을 넘어 통일로
어려서부터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을 듣고 부르며 자랐다. 남북한의 분단을 끝내는 방법이 북한이 말하는 무력으로서의 통일인 줄 알았고 그 이유로 분단선인 비무장지대에 섰다.
그리고 얼떨결에 낯선 사회의 이방인과 같은 귀순자가 되었다. 이 땅에서 분단의 조난자로 불리는 삶이 너무 싫어 정치학을 통해 분단을 들여다보았고 통일에 도움되는 사람이 되고자 공부하여 박사학위도 받았다. 결국 아이러니하게도 이 모든 상황은 과거로 인한 업보이자 현재의 삶이요, 그리고 미래로 순환하고 있는 중이다. 그것이 선순환인지, 악순환인지는 아직은 모른다. 분명한 것은 이 길이 이제는 다른 길보다 익숙하다는 점이다.
이 땅에 와 살면서 그동안 상처도 많이 받았다. 초라한 처지를 동정하듯 접근해 오리엔탈리즘적이고 독선적인 훈계로 상처를 주고 소리 없이 사라지는 사람도 보았고 한국에 와서 겪는 차별에 승리자적 제스처를 취하는 민낯들을 보면서 묘한 모멸감도 느꼈다. 차라리 무관심에서 희망을 볼지언정 차이와 다름을 고착화하려는 우월주의적 세계관에 더해, 통일 이후 타방의 사람들이 다른 일방의 사람들로부터 겪게 될 이등 국민적 차별을 생각하다보면 머릿속이 하얘질 때도 있었다. 사회의 성숙이 없으면 우리의 통일과 그 미래는 그만큼 어두워진다.
그럼에도 나는 통일만이 모두가 살길이라고 고집한다. 개인사를 넘어 잔인했던 민족상잔의 6.25전쟁과 고통스럽고 절망스러웠던 70여년의 분단이 우리 모두에게 말해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제 우리가 통일을 이루지 못한다면 후대들이 제2의 6.25전쟁과 더 길고 음침한 분단의 어둠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반도의 통일은 더는 누구를 위한 통일이 아닌 민족의 장래와 남북한 주민 모두의 안위가 걸려 있는 통일이며 그래서 우리 모두가 선택할 수밖에 없는 통일이다. 분단이 나와 상관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래서 통일이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면 분단의 다음 피해자는 결국 개별적 삶들의 차례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주위를 통해 얼마든지 교훈으로 삼을 수 있다.
제가 경험한 남한 사회에서 대부분 남한 사람들 조선족들별로 안좋아하고, 탈북자면 동정하고 같은 동포라 어느 정도 동질감을 느끼는 것 이 있죠.
그리고 외국인 유학생들 한국에서 장학금 받는 친구들 대부분 시험보고 실력을 인정받은 사람들이죠. 제가 남한에서 경험한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등등 유학생들은 실력이 괜찮은 친구들이었죠.
대신 탈북자들이 실제로 공부할 열의가 있다면 각종 교회들이나 북한이탈주민재단 등등 지원해주는 곳들 많습니다.
탈북자들의 교육이나 다른 지원정책에 있어서 남한만큼 잘 되어 있는 곳이 없습니다. 다만 언급한 것 처럼 사람들의 인식을 바꿀 필요는 있죠.
그러나 그게 쉽지 않죠. 한두사람의 노력이나 돈을 쳐붓는다고 되는것도 아니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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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박사가 통일의 주체가 남북한 주민이라고 언급했는데 백번 지당한 얘기다. 주권자인 남북한 주민들이 통일이 원해야 비로소 통일이 가능한데 우리의 남북 주민들이 통일을 원하고 있는지가 이제는 문제이다. 통일로 가기 위해서 할일도 많고 넘어야할 산도 많다.
단 조선족보다 탈북자...천대소리는 감정적 표현을 강조한 지나친 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