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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대고조와 중국의 대약진운동
Korea, Republic of 민복 0 262 2015-03-05 00:12:45

대약진()의 야심은 일찍이 주은래가 '공업의 생산량은 매년 20% 정도 증가하거나 그 이상이면 소약진이고, 25% 이상이면 대약진이며, 30% 이상이면 대대약진'이라고 말한 것에서 그 의미를 살필 수 있다. 대약진이라는 말은 『인민일보()』의 1957년 11월 13일자 사설로 "전 인민을 발동하여 40조 강요를 토론하고 농업 생산의 새로운 고조를 일으키자."라고 한 것에서 비롯되었지만, '농업 발전 강요 40조'에 따르면 "15년 안에 영국을 따라잡는다."와 "고전() 3년만 하면 면모를 바꿀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구호 아래 농업과 공업 분야에서 선진 기술을 배워 선진국을 따라잡자는 경쟁적인 노동을 전개하였다. 왜냐 하면, 당시 중국은 축적된 자본도 없었으며, 긴축된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은 중국의 잉여 노동력뿐이고, 또 노동자들의 각성과 창조력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약진을 추진하기 위하여 모택동은 1958년 1월과 3월에 남령() 회의와 성도() 회의를 소집하여 당내에서 대약진을 반대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 대하여 엄한 비판을 하면서, 또 당내의 사상과 업무상의 다른 의견을 정치 문제로 보아 다른 의견을 제출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는 간접적으로 당의 민주 집정제에 영향을 끼치고, 또 개인의 독단을, 더 나아가 개인 숭배를 조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대약진에 회의를 가지고 있는 간부나 인민에 대하여 '관조파'니 '추수 후 계산하자는 파'니 하여 이들을 통틀어 백기()라 부르고, 각 분야에서 "백기를 뽑아 내고 홍기()를 꽂자."라고 호소하였다. 이에 따라 당 안에서 적지 않은 간부들이 백기로 취급되어 쫓겨났으며, 비판되어야 할 어떠한 비판도 용납하지 않았다.

이 운동은 중공 8전 대회 2차 회의 이후에 급속도로 확대되어 갔다. 그리하여 내부적으로 7년에 영국을, 다시 8년 또는 10년 안에 미국을 따라잡는다는 전제 아래 우선 공업 생산의 지표를 올려 잡았다. 중앙이 제출한 1958년의 지표는 원래 철강 생산량이 620만 톤이었는데, 이를 800만 톤에서 850만 톤으로 높여 잡았다. 그리고 1958년의 생산 목표를 1957년의 배 이상인 1,070만 톤으로 늘려 잡았다.

화동() 지구의 농업에서는 1958년에 1인당 생산량을 평균 1,000근에서 1959년에 1,500근, 1960년에 2,000근으로 늘려 잡았다. 동시에 각 지방의 신문마다 단위 면적당 생산량을 보도하면서 천문학적인 수치를 들고 있다. 때문에 "사람도 대담하지만 땅도 대담하다."라는 말이 유행하였으며, 다소 부정적인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양식 증산에는 한계가 있다."라는 말을 대대적으로 비판하였다. 그런데 이와 같은 대약진의 조치들은 경제적 논리를 전혀 무시한 것이며, 무모하기까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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