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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사건은 폭동인가 항쟁인가?
역사바로살리기 0 474 2016-01-28 08:48:14
[건국이야기]제주 4.3사건은 폭동인가 항쟁인가? (1)국가관과 역사관, 국가 정체성이 달라진다
레갑.Lee  |  kenken@newsnbibl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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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3.19  06: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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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사건은 2014년 6월 12일 대법원으로부터 '폭동'으로 판결받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 역시 “제주4.3은 공산폭동“ 이었다고 1998년 11월 23일 CNN과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그런데 문제는 일각에서 '제주4.3'은 관점에 따라 항쟁이 될 수도 있고 폭동이 될 수도 있다고 주장하며 사건의 본질을 흐리고 있다는 점이다. '폭동'과 '항쟁'이 갖는 의미는 천지 차이다. 폭동에서 항쟁으로 바뀌면 국가관과 역사관이 바뀌고 국가 정체성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관점(觀點)이란 사건이나 사실을 ‘바라보는 점(위치)’이다. 사실에 근거하지 못한 관점은 사상누각(沙上樓閣)처럼 위험하다. 우리가 어떠한 "사실"을 동서남북 어디곳에서든지 바라보더라도 그 사건의 진실과 본질을 먼저 파악하지 않는다면 거짓 선동에 이용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대마다 큰 흐름의 물줄기가 있어 왔다. 제주 4.3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시대에 어떠한 일들이 맞물려 돌아갔는지 직시해야한다. 전세계적으로 산업혁명이 봉건제를 무너뜨리고 자유민주주의의 맥으로 이어져 왔듯이, 반대로 공산화에 성공한 소련의 영향력으로 한반도에는 1945년부터 공산주의라는 물결이 소용돌이 치기 시작하였다. 그 공산화의 물결은 1945년 8월 15일 해방 후부터 1946년 초까지, 조선공산당의 박헌영이 조선정판사에서 위조지폐를 발행하여 남한의 경제를 혼란에 빠뜨림으로써 드러나기 시작했다. 조선공산당 재정부장 이관술(46세)의 주도하에 일본이 철수하면서 파괴하지 않은 100원권 지폐 원판으로 여섯 차례에 걸쳐 100만원권 지폐를 총 1,200만원을 위조 인쇄하였다. 1200만원은 당시 신문기자 월급(600원)으로 약 1,700년치의 엄청난 액수이다.

"인민 근로대중을 위한다는 공산당의 간부와 당원들이 위조지폐 난발로 인민을 도탄에 빠지게 한 사건"  당시 동아일보 기사(1946.5.7)

  ▲ 당시 "백일하에 폭로된 공산당원 지폐위조 사건"을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1946.5.7) / 기사내용 텍스트제공(네이버)

 당시 신문들 조차 "인민 근로대중을 위한다는 공산당의 간부와 당원들이 위조지폐 난발로 인민을 도탄에 빠지게 한 사건"(1946.5.7.동아일보)이며, "구두 한번 닦고 10원 주면 될것을 100원씩 척척 집어준 것도 위조지폐, 공산당의 지령으로 위폐를 대량으로 산포 시킴으로써 남한의 경제를 혼란과 국내질서를 문란케한 목적. 공산당을 추종하던 자들마저 달라졌다"(1955.8.6.경향신문)고 보도하였다.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당시 공산주의에 호감을 가지고 있던 대다수의 남한 사람들은 충격을 받고 조선공산당에 등을 돌리게 되었다. 당시 급속도로 번져가던 조선공산당의 발목을 휘어잡은 사건이 된 것이다. 위조지폐 주범으로 체포령이 발부된 조선공산당의 박헌영은 1948년 9월경 북한으로 탈출하였고, 이후 남한에서는 좌익 진영이 박헌영의 공백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반대급부로 북한에서는 조선공산당의 분국이었던 김일성의 북조선공산당이 한반도의 유일한 공산집권당이 될 수 있었다.

"구두 한번 닦고 10원 주면 될것을 100원씩 척척 집어준 것도 위조지폐,  공산당의 지령으로 위폐를 대량으로 산포 시킴으로써 남한의 경제를 혼란과 국내질서를 문란케한 목적. 공산당을 추종하던 자들마저 달라졌다" 당시 경향일보 기사(1955.8.6)

  ▲ "공산당의 인식과 공산당을 추종하던 자들마저도 등을 돌리게 되었다"는 공산당의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경향일보 기사(1955.8.6) / 기사내용 텍스트제공(네이버)

월북한 박헌영은 평양에 그 거처가 마련되어 있었으나, 남로당을 지휘하기에 용이한 북위 38도선 부근 황해도 해주에 머물면서, 남한에 있는 조선공산당원들과 프락치를 조종, 요인 암살 및 대대적인 폭동을 계속해서 일으켰다. 박헌영의 지령 하에 1946년 9월 철도종업원 4만명의 파업을 시작으로 40여개의 노조단체 25만 1천명이 파업농성에 가담하였다. 이후 조선공산당은 이 9월 총파업을 전초전으로 전국 각지에서 크고 작은 폭동과 파업을 잇따라 일으키게 된다.

위조지폐 사건으로 치명적 타격을 입은 조선공산당은 지하로 잠입하여 요인 암살전을 벌였다. 1946년 9월 12일 공산당원 김광명(22세)과 김영수는 이승만을 저격하였으나 미수에 그쳤다. 1946년 10월16일 조선공산당 민주청년 동맹원 유주열은 조경옥 경무부장에게 수류탄을 던졌고, 1946년 11월 13일 조선공산당 민청요원 김용암(21세)은 수도관구 경찰청장 겸 제 1경무총감 장택상에게 수류탄을 던졌다. 이 외에도 공산당원에 의해 부산경찰서장 권위상(33세)이 순직한 사건을 위시하여 위조지폐사건 이후 각종 폭력사건이 빈번히 발생하였다.

위조지폐범으로 궁지에 몰린 박헌영은 곧바로 1946년 9월 전국 파업과 더불어 대구 10.1폭동을 일으켰다. 대구 10.1폭동 사건으로 경찰 80명 사망, 공무원 163명, 민간인 73명이 사망하였고, 부상 1천명, 행방불명(납치) 145명, 776동의 건물이 파괴되었다. 계속하여 조선공산당은 10월 폭동에 대한 ‘호응 투쟁’ 전개 지령을 내려 경북, 경남, 전남 지역 등 전국으로 폭동을 확산시켰다. 이 폭동으로 탈옥한 죄수들이 1000여명에 이른다.

제주도는 육지와 멀리 떨어져 있어 폭동을 진압하기 어렵다는 지리적 특수성 때문에, 조선공산당이 대대적인 폭동 장소로 택한 곳이 제주도이다. 제주도 내에서만 6만여 명이 남로당에 가입하여 극렬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제주도의 우익세력은 아예 좌익과 다툴 힘이 없는 지역이었으므로, 제주도의 모든 행사는 좌익들이 주도하였다. 제주 4.3폭동의 배경인 된 1947.3.1.절 기념투쟁도 제주도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주최 하에 좌익진영의 기념식만이 거행되었다. (계속)

참조 :  [참혹했던 비극의 역사 1948년 제주 4.3사건(박윤식/휘선출판사)], [대한민국 근현대사 시리즈 완전정복/휘선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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