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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바다의 급소" 제주4.3사건(2)제주4.3폭동의 성공은 김일성에게 6.25남침전쟁
역사바로세우기 0 376 2016-01-28 09:06:31
[건국이야기]"세 바다의 급소" 제주4.3사건(2)제주4.3폭동의 성공은 김일성에게 6.25남침전쟁 준비의 자신감을 준 사건
레갑.Lee  |  kenken@newsnbibl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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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4.16  02: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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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 후 미국은 핵폭탄과 B-36 폭격기만 있으면 항공모함이 필요 없다며 해군감축을 추진하자 ‘제독의 반란’ 사건이 일어난다. 1945년 8월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떨어뜨려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내자, 당시 루이스 존슨 국방장관이 “B-36 폭격기만 있으면 항공모함은 더 이상 필요 없다”고 한 것이다. 항공모함 무용론에 맞서 엘리트 해군 제독 ‘알레이 버크’를 비롯한 해군 지휘관들이 반기를 들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항공모함 무용론에 맞서 ‘제독의 반란’ 항명사건으로 버크 제독이 한직에 밀려 있다가,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해군 5순양함대를 이끌고 6.25전에 참전하게된다. 1951년 당시 강원도의 1군단장으로 있던 백선엽 장군은 고지전에서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 동해상에 있던 버크제독(소장)에게 함포사격 지원을 요청하였다. 지상 야포와 달리 그 당시 함포 포탄 값이 1만달러로 비싸 미군은 함포 사격시 “캐딜락 한 대 날아간다(One more cadillac on the way)"라고 구령하였다.

값비싼 함포 사격을 아낌없이 지원해줘 국군이 거침없이 북상하여 금강산 앞까지 바짝 전선을 올려붙일 수 있었던 것은 버크 제독의 통 큰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버크 제독의 도움은 동해안 휴전선이 서해안보다 훨씬 더 북쪽으로 올라가게 만든 초석이 됐던 것이다. 이 후 ‘흥남철수작전’에 참가한 모든 선박을 지휘하였으며, 휴전 이후에는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 등 한국 재건을 위해 일해 주었다. 아이젠하워때 해군참모총장이 되어 세 번 중임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고, 퇴역해서도 대한민국 해군 현대화와 전력증강에 큰 기여를 하였다.

당시 1군단장으로 있던 백선엽 장군은 자신 보다 연배가 약 20년 높은 버크 제독을 자신의 "포병 사령관" 이라고 소개할 정도로, 한국군의 대한 버크 제독의 지원은 절대적이었다.

  ▲ 미해군 5순양함대를 이끌고 6.25전에 참전한 얼라이 버크 제독. 값비싼 함포 사격을 아낌없이 지원해줘 국군이 금강산 앞까지 전선을 올려붙일 수 있었다. 동해안 휴전선이 서해안보다 훨씬 더 북쪽으로 올라가게 만든 초석이 됐다. 해군참모총장 시절의 알레이버크 제독

미국이 6.25 한국전쟁때 소련과 중국 등 공산주의 국가들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던 통로는 바다에 있었다. 태평양과 대서양의 한 가운데 있던 미국은 바다를 통하지 않고서는 대한민국을 도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미군은 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쟁에서 일제(日帝)를 패망시키고 태평양 건너 일본을 거점삼아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대한민국을 지원할 수 있었던 것이다.

6.25전을 계기로 항공모함의 가치가 오히려 높아졌다. 인천 상륙작전과 원산상륙작전, 흥남철수작전, 해양수송로 확보 등 제해권(制海權)을 통한 엄청난 군사적 경제적 자원이, "미국의 지원이 바다로부터 온다"는 정치적 메세지를 공산주의자들에게 강하게 심어주어, 전쟁억지력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일본이 제주도의 가마오름과 조천읍 북촌리 서우봉 해안가 등에 동굴 해군기지를 만든 이유는, 한·중·일 “세 바다의 급소”가 제주도이기 때문이다. “10척으로 100척을 제압할 군사 요충지”가 제주도다. 그래서 일본은 자신들의 본토 방어를 위해 제주도에 동굴 해군기지를 만든 것이다. 3층 구조의 지하 땅굴 진지는 총길이가 2km나 되는 미로로, 사령관실·회의실 등 방만 수십개다. 현재 복원된 게 15%에 불과할 정도로 치밀하다. 가마오름 동굴 기지는 지금 '전쟁역사평화박물관'으로 탈바꿈했다. 일제 유물 2800점이 포함된 태평양전쟁관(館)과 한국전쟁관, 해외참전관으로 구성돼있다. 박물관 곳곳엔 이런 문구가 있다. '자유와 평화는 공짜가 아니다!(Freedom and peace are not free)'
 

  ▲ 한국 해군 현대화, 전력증강에 큰 기여를 한 알레이 버크 제독의 청동 휴상 제막식.(2012.11.15. 진해 해군사관학교). 흉상 바로 왼쪽은 백선엽 장군, 당시 1군단장으로 있던 백선엽 장군은 자신 보다 연배가 약20년 높은 버크 제독을 자신의 "포병 사령관" 이라고 소개할 정도로, 한국군의 대한 버크 제독의 지원은 절대적이었다.

‘바다의 급소’ 제주도는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요충지로서 일본과 중국대륙의 어선, 상선의 기항지며, 특히 세계 전사(戰史)에서 전략상 결정적인 요충지대였던 것이다. 제 2차 세계대전 말기 일본군은 본토 수호를 위한 군사기지로 제주도에 10만에 달하는 대병력을 주둔시키고 있었다. 그래서 곳곳에 그들이 파놓은 참호와 그 외의 군사시설로 섬 전체가 진지화되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군은 패전 이후 1945년 8월 막대한 무기와 탄약을 땅에 파묻거나 바다에 수장한 후에 철수하였다. 일본군이 남기고간 무기로 훈련한 공산 좌익들은 제주4.3 폭동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제주4.3 사건 폭도들의 병력과 무기에 대하여 “이들은 일본군이 철수 시 산중에 매몰한 무기를 수집하여 무장하고 군사훈련은 팔로군 출신들이 담당하여 중국에서 사용한 유격전으로 그 기세는 당당하였다. 이들의 무장병력은 500명에 달하였고, 부화뇌동한 자도 1,000여명에 이르러 총 1,500명을 헤아리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한국전쟁사」(1967년) 437쪽).

그러나 실제로 제주4.3사건 초기에 동원된 무장병력은 이보다 훨씬 많은 3,000명이나 되었다. 유격대(Top부대) 320명 병력을 만들고, 무기로는 99식 소총 27정, 권총 3정, 수류탄 25발, 연막탄 7발, 죽창을 준비하여, 3월 20일경, 샛별오름 공동묘지에서 합숙훈련을 하였던 것이다(「제주도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 11-12쪽).

이렇게 독립된 섬에서 공산 좌익들을 무장시켜 민족최대의 비극을 일으킨 제주4.3폭동의 역사적 배경에는 ‘바다의 급소’ 제주도의 전략적 가치를 알아본 일본군의 제주도 무장력에 있었다. 결과적으로 제주4.3폭동의 성공은 김일성에게 6.25남침전쟁 준비의 자신감을 심어주게 되었다. 김일성과 공산당은 다 이길 수 있었던 6.25한국전쟁 패전 이유를 철저히 분석하였다. 첫 번째가 미군이고 “바다에서 오는 미국의 지원”을 가능하게 했던 ‘제해권(制海權)이 무서운 이유였다(계속).

참조 : [참혹했던 비극의 역사 1948년 제주4.3사건(박윤식/휘선출판사)], [잊을 수 없는 6.25전쟁(박윤식/휘선출판사)], [대한민국 근현대사 시리즈 완전정복(휘선출판사)], [백선엽 장군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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