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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젖 먹였던 집안교수 인터뷰
Korea, Republic of 민복 1 1207 2017-01-15 16:04:21
만경대는 김일성 생가로 알려져 있는데….
응답 :“내가 초등학교 5~6학년을 다닌 학교가 김일성도 다녔던 창덕소학교였습니다. 그런데 사실 만경대가 김일성 생가는 아니에요. 김일성 어머니가 거기서 3∼4㎞ 떨어진 칠골이라는 마을 분인데 만경대에 시집을 와서 김일성을 첫 아들로 낳게 되요. 옛날엔 애를 낳을 땐 처가에 가서 낳았잖아요. 그래서 만경대는 김일성 아버지 집이지 김일성이 거기서 낳지는 않았어요. 김일성 외가는 완전히 기독교 집안입니다. 김일성 외삼촌이 강랑욱 목사라고 유명했던 분입니다. 김일성도 15살 때까지는 교회도 다니고 기독교 분위기에서 자랐죠.”
질의 :김일성 일가와 얽힌 얘기가 있을 것 같은데요.
응답 :“큰외삼촌이 김일성과 같은 해 태어나 같은 마을에 살았습니다. 김일성 어머니가 우리 외가와 같은 강씨였어요. 김일성 어머니가 젖이 적어 우리 외할머니가 대신 먹여주기도 했답니다.”
질의 :그래요?
응답 :“그런데 그 큰외삼촌과 둘째 외삼촌 두 명이 공산당에 피살됐어요. 그리고 내 친사촌 동생이 반공운동 하다가 잡혀 들어간 일이 있는데 그때 우리 외할머니가 찾아가서 ‘내가 김일성을 석 달이나 젖 먹여 키웠는데 이래도 되는가’ 라고 말해서 풀려나기도 했답니다. 해방 직후 혼란스러울 때 얘깁니다.”
질의 :그런 비화도 다 있었군요.
응답 :“해방되고 9월쯤 김성주가, 김일성 본명이 김성주에요, 돌아왔다고 환영한다고 만경대에 간 일이 있어요. 내가 25살. 김일성은 32세였죠. 사람들이 김일성보고 우리나라가 어떻게 되나 물었더니, 친일파 숙청, 사유지 국유화 등 대여섯 가지를 얘기하더라고요. 그때 저건 자기 생각은 아니고 조직에서 나오는 얘기를 교과서 외우듯 하는구나, 하고 생각했었죠. 그리고 얼마 있다가 김성주가 김일성으로 바뀌어서 집권하게 되죠.”
 
질의 :1939년 평양 제3중학교를 졸업하신 걸로 되어 있는데 어떤 학교였나요.
응답 :“창덕소학교 졸업 후 처음에 숭실중학교를 갔습니다. 유명한 기독교 학교였죠. 내가 3학년 때 폐교가 됩니다. 신사참배를 안했다고 일제가 학교 문을 닫아버린 겁니다. 그 학생들을 흡수한 게 일본학교인 제3중학교였어요.”
질의 :숭실중학교는 윤동주 시인도 다녔었죠.
응답 :“윤동주는 숭실중학교 3학년을 같이 다니다 만주 용정으로 갔습니다. 같은 반에서 공부했는데 나이는 윤동주가 3년 위였습니다. 좀 늦게 공부했죠.”
질의 :숭실중학교 시절 윤동주는 어땠나요.
응답 :“두 가지를 기억합니다. 그때도 시를 썼는데 좋은 시인이 될 거라고 봤습니다. 또 성격이 착하고 양순하기 때문에 항일운동을 적극적으로 하진 않았더라도 마음은 항상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런(적극적인)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다 억울하게 당했다고 봅니다. 당시 일본에 한국 학생들이 많았고 그들이 모여 학생회를 만들었는데, 회장이나 간부는 일본 경찰이 늘 감시했습니다. 윤동주는 그런 친구들과 어울리다 이름이 올라 있어서 예비검속에 걸린 것이죠. 아주 성격이 깨끗하고 착했죠. 집안이 전부 기독교 집안이고, 신앙생활을 하니까 그 같은 시가 나왔다고 봅니다.”
질의 :이어 일본 조치(上智)대 철학과를 졸업하셨는데 주로 어떤 철학을 공부했습니까.
응답 :“일본 조치대 예과 1년, 학부 3년 마치고 1945년 졸업했어요. 철학 일반을 쭉 공부하고, 그 다음에 연세대에 와서 강의를 맡아 하면서 계속 공부했죠. 이론철학(논리학)과 실천철학(윤리학) 가운데 나는 윤리학과 역사철학을 전공했다고 할 수 있어요.”

해방이 되면서 고향으로 돌아온 후 그는 2년간 평양에 머물다 월남한다. 이어 중앙중학 교사를 7년간 지냈다 1954년(34세)부터 연세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30여 년간 후학을 양성하다 1985년 정년퇴임했다. 퇴임 이후에도 저술과 강연으로 현역 시절 못지않은 활동을 계속해왔다.
질의 :일본 조치대 졸업 후 고향으로 돌아와 한 일은 뭔가요.
응답 :“평양에서 해방을 맞이하고 2년 있다가 월남했습니다. 평양에 있는 2년 동안 중학교를 하나 만들어서 교장을 하며 농촌교육에 종사했죠. 일본에서 같이 있던 친구들을 교사로 오라고 해서 학교를 운영했습니다. 그 학교 이사장이 잡혀갔는데 나보고 어서 월남하라고 해서 월남하게 됐습니다.”
질의 :당시 평양에는 조만식 선생도 있었지요.
응답 :“조만식 선생도 숭실중학교 출신입니다. 김일성이 정권을 잡았어도 당시 평양을 포함해 북한 사람들은 조만식 선생을 더 존경하고 따랐습니다. 그러자 김일성이 평양의 고려호텔에 조만식 선생을 가둬놓았습니다. 사모님을 제외한 누구도 면회를 못했어요.”
질의 :책 얘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평생 몇 권의 책을 펴냈나요.
응답 :“좀 많을 거에요. 한 40권 되지 않을까요.”
질의 :1959년 동양출판사에서 간행한 수필집 『고독이라는 병』이 첫 책이죠. 전후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다는 평가를 받는데….
응답 :“61년 펴낸 『영원과 사랑의 대화』 와 함께 두 책이 다 베스트셀러였죠. 첫 책인 『고독이라는 병』은 문학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책입니다. 우리나라에 수필문학이 정립이 안 된 상태였는데 서울대 피천득 교수가 수필집 『인연』을 내면서 수필문학이 개척이 됐죠. 이어 저의 『고독이라는 병』이 나오면서 수필문학이 자리를 잡아가게 돼요. 그 다음부터 수필문학이 일반화됐다고 할 수 있어요.”
질의 :『영원과 사랑의 대화』는 어땠나요.
응답 :“원고를 삼중당에 넘기고 1년간 미국에 가 있는데 1년 후 돌아와 보니 『영원과 사랑의 대화』로 제가 유명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해 출판연감을 보니 그때까지 비소설이 소설보다 많이 나간 적이 없었는데 『영원과 사랑의 대화』로 기록을 세웠습니다. 박계주 소설 『순애보』가 6만부 나간 기록이 있는데, 『영원과 사랑의 대화』는 1년에 그보다 몇 배 더 나갔습니다. 비소설이 소설보다 더 많이 나가긴 처음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는 책이 되었습니다. 애들 6명 학교 보내고 있었는데 수입에도 도움이 됐습니다.”
질의 :인기의 비결이 뭐였다고 보나요.
응답 :“제가 중앙학교 학생들에게 정이 많이 들어 있었다가 연세대에 왔을 때였습니다. 그런 경험을 살려 『영원과 사랑의 대화』에서 고교 상급자가 후배에게 상담해주는 식으로 글을 썼는데 그것이 요즘 말로 히트를 쳤다고 그럴까요. 당시 대학생 중에 안 읽은 학생이 없었다고 할 정도입니다.”
질의 :가장 많이 호평을 받은 책은.
응답 :“『영원과 사랑의 대화』죠. 또 하나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많이 나간 책은 『철학입문』입니다. 삼중당이 ‘인문학 입문 시리즈’를 기획하며 나에게 철학분야를 쉽게 써달라고 해서 썼는데 무척 많이 나갔습니다. 서울대 교수들이 시험 답안 채점하다가 비슷한 답안이 많아 물어보니 김형석 교수의 『철학입문』 보고 썼다고 하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15판 정도 나갔습니다.”
질의 :본인이 가장 애착이 가는 책은.
응답 :“역시 『영원과 사랑의 대화』와 『고독이라는 병』 이죠. 아무래도 독자 호응이 많았으니까. 제가 펴낸 책이 세 가지로 나뉩니다. 첫째 철학분야에선 『철학의 세계』 『종교의 철학적 이해』 『역사철학』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수필분야가 있고, 세 번째 기독교분야에선 『예수』 『어떻게 믿을 것인가』 두 책이 베스트셀러였습니다. 세 분야에서 제일 많이 나간 것은 역시 수필이고, 그 다음이 기독교입니다. 철학은 전공자들이 주로 보고.”
질의 :철학자와 수필가 어느 쪽이 더 본인에게 맞는 호칭일까요.
응답 :“본업은 철학인데 밖에 나가면 수필가가 되고 말았어요. 고등학생들도 김형석 교수하면 수필가라고 하죠. 얼마 전 여고 3학년에 강의하러 갔는데 수필가로 소개했습니다.”


[출처: 중앙일보] [배영대의 지성과 산책 -『100년을 살아보니』 쓴 김형석 교수] 97세 교수님의 장수 키워드, 조심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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