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의 이름은 어떻게 신화가 됐을까(주성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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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가 숨기고 있는 역사의 진실을 이어서 말씀드리다가 김원홍 숙청과 김정남 암살 때문에 잠깐 2주 쉬었습니다. 오늘부터 또 계속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번시간에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김일성의 집안 배경과 아버지 김형직, 삼촌 김형권의 죽음을 말씀드렸습니다. 김형직이 죽기 전 그의 친구 오동진은 김일성, 즉 당시 김성주를 민족주의자들이 운영하던 화성의숙에 입학시킵니다. 김성주는 김형직에게서 의병대장 김일성의 전설을 수없이 듣고 자랐습니다. 당시 김일성이란 이름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모든 이들에겐 임꺽정이나 홍길동처럼 전설처럼 전해지는 숭배의 대상이었습니다. 항간에 알려진 최초의 김일성은 한일합병 전 함경북도 온성군수를 지낸 김두천의 아들 김창희로, 18세에 의병에 참가한 그는 별호로 김일성이란 이름을 썼습니다. 김창희는 의병활동을 하다가 마천령 오방산 기슭에서 일본군에게 포위됐었지만 끝내 잡히지 않았습니다. 이 김일성은 이후 활동이 거의 없지만 홍길동처럼 신출귀몰하는 인물로 전해졌습니다. 1920년 다시 중국엔 김일성의 전설이 퍼졌는데, 고려혁명군으로 알려진 김일성부대가 용감하게 싸웠습니다. 이 김일성은 본명이 김광서였는데, 나중에 의병대장 지청천과 함께 하며 이름을 김경천으로 고쳤습니다. 김광서는 1888년 6월 5일 출생으로 1911년 일본 제23기 육군사관학교 최우등 졸업생입니다. 그가 나중에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까지 불러서 일본군 기병소위를 하라고 했지만 끝내 거부한 일화는 유명합니다. 김광서는 1919년 3.1운동이후 친구 지청천과 함께 일본군을 탈출해 만주로 왔고, 오늘날 한국 경희대학교의 전신인 서간도 신흥무관학교에서 교관으로 있었습니다. 일제가 1920년대 초반 시베리아를 침공했을 때 조선인 기병장교 김경천은 연해주 조선인들로 무은 200여명의 독립군 기병대를 이끌고 활동했습니다. 시베리아전쟁의 승패를 갈랐던 블로차예프카 전투 때 김경천은 쏘련 붉은군대 편에 서서 맹활약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김일성의 기병대’로 알려진 김경천의 독립군이 얼마나 용감하게 싸웠고, 일본군이 얼마나 무서워했던지, 쏘련 붉은 군대조차 모두 조선말로 ‘돌격, 후퇴, 하나둘’하고 외쳐대며 김일성의 독립군인척 했습니다. 시베리아에 출병한 일본군 사령부는 부하들에게 ‘김일성부대와 만나면 가능한 싸우지 말고 피하라는 지시까지 내렸을 정도였습니다. 김경천은 일본 최고 군사대학의 최우등 졸업생이니 일본군 싸움법을 훤히 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김일성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 둘 조선 사람들 속에서 전해지면서 전설은 더욱 확대됐습니다. 그런데 김성주가 화성의숙에 입학했던 1926년엔 러시아에서 독립운동이 시들해지고 대신 만주에서 김일성이라고 사칭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동시에 여러 마을에서 김일성이라 주장하는 사람이 나타날 정도니 “김일성이 축지법을 쓴다”는 말도 이때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또 세월이 흘러 1930년대 초반 동만의 공산주의자들이 김일성 장군이라고 불렀던 인물이 나타났습니다. 그의 본명은 양림입니다. 그는 평안북도 출신으로 평양에서 공부하던 중 3.1운동을 맞았습니다. 그해 가을 만주로 와서 신흥무관학교에 다녔고, 1920년 북로군정서에 입대해 항일대첩으로 유명한 청산리대첩 때 중대장을 했습니다. 양림은 1921년 곤명으로 가서 당시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군사학교인 운남강무학교를 졸업한 뒤 1924년부터 황포군관학교 교관으로 활동했습니다. 주은래 주보중과 함께 교관생활을 했고, 같이 교관으로 지냈던 최용건, 전광과도 친했습니다. 양림은 1927년 모스크바에 가서 손문대학까지 나왔습니다. 그리고 1930년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만주성위원회에 파견 나왔고, 중국 공산당 동만 특위 위원 겸 군사위 주석을 지냈습니다. 그의 지시로 만주에는 반석노동의용군 등 유격대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게 되는데, 사람들은 그를 김일성 장군이라고 불렀습니다. 양림은 공산당 만주성위 군사위 주석을 지냈으니 동북에선 조선사람 중에선 최고위급을 지낸 셈입니다. 이후 공산당이 어려울 때 양림은 모택동 옆으로 돌아가 대장정 때 중앙군사위 간부단 참모장으로 참가했습니다. 그러던 중 1936년 2월 중국 홍군 한개 대대를 인솔하고 도하작전에 선두로 돌격하다가 전사했습니다. 또 하나의 조명해야 할 인물이 있습니다. 북한에선 김성주가 한별이란 이름을 가졌다가 김일성으로 바꾸었다고 했는데, 이때 만주에선 김인묵이란 사람이 한별이란 이름을 쓰고 활동했습니다. 김인묵은 평안도 사람으로 3.1운동 이후 러시아 이르쿠츠쿠에서 조선공산당에 가입했고 화요파 동만주 선전부장이었습니다. 그는 김일성을 아들처럼 수하에 데리고 다니며 반제반봉건투쟁 등 공산당 이론을 가르쳤고, 나중에 김일성의 공산당 입당보증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1930년 말 일제에게 체포돼 서대문감옥에서 1932년 사망했고 가족도 모두 혁명의 길에서 죽었습니다. 이처럼 김성주가 김일성으로 이름을 고치기 전 이미 만주에는 김일성 전설이 퍼져 있었고, 김성주는 그 전설을 본 따 나중에 자기 이름을 김일성으로 고친 것입니다. 그리곤 북에 돌아가 김일성이란 이름을 자신을 우러러 본 청년공산주의자들이 고쳐준 것처럼 만들었고, 김일성이란 이름이 자기 밖에 없었던 것처럼 조작했습니다. 심지어 자기의 입당보증인이기도 한 스승의 한별이란 이름까지 빼앗아다 자기 이름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이런 진짜 기록은 중국에 다 있습니다. 여러분이 배우는 김일성의 혁명역사는 첫 단추부터 배신과 조작으로 얼룩져 있는 거짓말투성이입니다. 다음 시간엔 이종락 밑에서 세금징수 분대장으로 있었던 김일성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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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김일성이라는 사람들의 본명도 김일성은 아니었네요 ㅎ
그나마 그래도 전설적인(?) 인물의 김일성은 김창희가 조금 더 맞는것 같습니다.
민복님 반갑습니다 인사가 늦었네요.
진짜 인사는 글을 쓴 주성하 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