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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바꾼 소련공산당 총비서 후르쇼브
Korea, Republic of 조갑제 0 619 2017-09-08 11:42:59
世界史를 바꾼 흐루시초프 연설의 內幕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연설이 끝났을 때 죽음과 같은 침묵이 흘렀다. 파리가 날아가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그리고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들렸다. 걱정과 기쁨이 교차했다. 흐루시초프가 어떻게 이런 연설을 이런 청중 앞에서 할 수 있는가 하는 경이로움이 퍼져갔다.'
  
  
   '흐루시초프 - 인간과 시대'(Khrushchev-the man and the era. William Taubman. Norton. 2002)는 넌 픽션 부문에서 퓰리처상을 받은 大作이다. 876 페이지에 달하는 이 傳記를 쓴 윌리언 타우브맨씨는 미국 앰허스트 대학 교수이다. 그는 흐루시초프의 가족들로부터 협조를 받고 舊소련의 비밀문서를 수집하는 한편 관련자들의 증언을 모아서 20세기의 매우 흥미로운 역사적 대인물을 생생하게 되살려내었다.
  
   기자는 1970년에 미국에서 출판된 흐루시초프의 회고록을 이 傳記와 비교해가면서 읽기도 했고, 고르바초포 회고록에서 흐루시초프 부분을 찾아내 대조했다.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최초 개혁자인 흐루시초프가 마지막 개혁자이자 냉전체제의 해체役을 맡았던 고르바초프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궁금했다.
  
   후세에 20세기 공산당의 피로 얼룩진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은 삼국지식으로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역사는 레닌,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 김정일을 내셨으나 또한 흐루시초프, 고르바초프, 그리고 周恩來, 鄧小平, 黃長燁을 내셨도다.'
  
   특히 흐루시초프와 고르바초프는 인류가 감사해야 할 인물이다. 작년에 도쿄에서 전 남로당 간부 朴甲東씨를 만났다. 하코네의 한 북한문제 세미나에 참석하러 가는 길에 내가 흐루시초프 이야기를 꺼냈더니 그는 한참 창너머로 펼쳐지는 일본의 교외 풍경을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흐루시초프 때문에 살았습니다. 1956년 제20차 소련공산당 전당대회에서 그가 한 그 유명한 연설로 해서 스탈린식의 개인숭배와 당내 숙청을 거부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공산권 안에 형성되었습니다. 나는 남로당 숙청선풍에 걸려 투옥되어 있었는데 김일성이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보스인 흐루시초프의 노선에 맞추어 정치범들을 일시적으로 석방할 때 출옥했습니다. 그런 뒤 중국으로 탈출할 수 있었고 지금 여기서 살아 있는 것이지요. 흐루시초프의 그 연설로 해서 세계 공산주의 운동사에서 피의 숙청이 사라졌습니다. 중국, 북한, 알바니아는 예외입니다만. 그는 수많은 인간의 목숨을 건진 인물입니다.'
  
   한 거대한 인물의 위대한 결단은 朴甲東이란 한국인의 운명에도 이렇게 영향을 끼치는구나 - 역사와 인간의 신기한 관계를 실감할 수 있었다.
  
   1956년2월14일에 소집된 제20차 소련 공산당 대회가 크렘린궁의 한 홀에서 열렸을 때 참석자들은 레닌의 조각상만 보이고 스탈린의 조각상은 물론이고 사진조차 붙어 있지 않는 것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했으나 마지막 날에 예정에 없이 소집된 비밀회의에서 제1서기 흐루시초프가 그런 연설을 할 줄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역사에서 한 권력자가 그 누구의 상상력도 뛰어넘는 개인적 결단을 내리고 이를 실천한다는 것이 역사의 전개 과정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를 살펴보자는 생각으로 타우버만 교수의 傳記를 읽어갔다.
  
   흐루시초프와 소련 공산당 정치국 위원들이 단상에 착석했을 때 그들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흐루시초프는 한번의 짧은 휴식을 취하면서 네 시간 동안 연설했다. 그 내용은 3년 전에 죽은,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神을 파괴하려는 격하 연설이었다. 흐루시초프는 스탈린의 권력남용과 집단 체포, 그리고 재판도 거치지 않고 한 집단 처형을 고발했다. 스탈린이 이른바 反혁명분자들에게 덮어쒸운 죄목은 '애매하고, 황당하며, 상식에 반하는 것'이었다.
  
   '무고한 사람들이 고문으로 의식을 잃었고, 판단력을 상실당했으며, 인간으로서의 권위를 빼앗겼다'
   '이 모든 것에 대한 책임자가 바로 스탈린이다. 그는 사적으로 수사관을 불러 신문 방법까지 지시했다. 그 방법은 간단했다. 때려라, 때려라, 또 때려라!'
  
   물론 흐루시초프는 레닌을 공격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레닌을 변호하고 레닌의 정신으로 돌아가자고 역설했다. 그는 또 자신과 정치국위원들의 책임을 변명했다.
   '우리는 무엇이 일어나는지 몰랐고 알았을 때는 너무 늦었다.'
   흐루시초프는 불가닌(수상)이 자신에게 한 말을 소개했다.
  
   '스탈린의 별장에서 돌아가는 차중에서 불가닌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스탈린이 나를 별장으로 친구로서 초대하지만 그와 함께 앉아 있는 동안에 내가 이후에 어디로 끌려갈지 알 수가 없다'. 말년에 스탈린은 정치국 위원들 전부를 말살하려고 했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수치스러운 죄를 알고 있는 인물들을 없앰으로써 오늘 내가 보고하는 이런 죄상들을 숨기려 했었다.'
  
   그는 연설의 끝에 가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 내가 한 연설 내용은 언론은 물론이고 외국에 알려져서는 안된다. 우리의 적에게 무기를 줄 필요는 없고 우리의 상처를 저들에게 내보여서는 안된다. 대회 참석자들은 이 점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평가해주기를 바란다.'
  
   이 연설의 충격을 이해하려면 이 연설이 이뤄진 시점이 스탈린이 죽은 3년 뒤였다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1997년에 김정일이 북한노동당 비밀전당대회에서 김일성을 격하하는 연설을 했다는 상상을 해보라!
  
  
  
   흐루시초프는 비록 스탈린의 충실한 부하로 살아남기 위하여 굴종하였지만 스탈린의 숙청과 학살에 대해서 비판의식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의 회고록을 읽어보면 언제 스탈린에 의해 목숨이 달아나고말지 모르는 상황에서 전전긍긍하였으나, 무자비한 독재자 앞에서도 할 말을 하려고 했고, 언젠가는 이런 상황, 레닌의 공산주의 원칙에도 어긋나는 이런 전체주의를 반드시 개혁하고말겠다는 생각을 비수처럼 품고 있었음을 느낄 수 있다.
  
   흐루시초프를 역사적 인물로 만든 사건은 1956년2월 제20차 소련공산당 대회에서 그가 한 비밀 연설이다. 이 4시간의 연설에서 그는 스탈린의 숙청, 학살을 규탄하여 스탈린을 하느님처럼 믿고 있었던 당 대표들에게 잊을 수 없는 충격을 주었다. 흐루시초프의 표현에 따르면 당 대표들은 망치로 얻어맞은 듯 멍하니 침묵속에서 연설을 들었다고 한다. 그것은 세계사를 뒤흔든 침묵의 연설이었다. 이 비밀 연설문을 미국 CIA가 입수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는 CIA의 가장 큰 특종으로 꼽힌다.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연설이 어떻게 이뤄졌는가에 대해선 여러 가지 설명이 있다. 당시 서기장이었던 흐루시초프가 政敵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스탈린 격하를 하게 되었다는 주장이 강하지만 이것만으로써는 설명이 충분하지 않다. 스탈린이 죽은 지 불과 3년만에 스탈린을 격하한다는 것은 자신의 정치적, 육체적 생명을 내어놓는 일대 모험이었다. 그런 모험을 하지 않았으면 흐루시초프는 오히려 더 오래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흐루시초프가 한 인간의 마음으로 돌아가 자신의 신념과 감정에 충실하면서 이런 결단을 내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로서는 진실의 순간, 순수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의 회고록을 읽어보면 스탈린 격하 연설에 대해서 카가노비치 등 당 수뇌부 인사들이 극렬하게 반대했다는 것이 잘 나타나고 있다. 러시아 국민들 사이에서도 스탈린은 결코 부정만 당하고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북한의 김일성을 그가 죽은 지 3년만에 격하하는 것은 김정일로서도 불가능했을 것이란 점을 염두에 두면 흐루시초프의 이 결단이 얼마나 어려운 선택이었는지 잘 알 수 있다. 1964년에 그가 실각하는 가장 큰 이유도 스탈린 격하에 대한 수구파의 반격 때문이었다.
  
   흐루시초프의 傳記(흐루시초프: 인간과 시대)에 대한 뉴욕 타임스 서평에서 레온 아론(옐친 전기 작가)은 왜 흐루시초프 서기장이 스탈린 격하를 결심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아주 감동적인 묘사를 하고 있다.
  
   <그것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가장 고귀한 인간성의 수수께끼의 한 사례이기도 하다. 악을 누르고 선을 선택하고, 노예를 누르고 해방을 선택하며, 거짓을 누르고 진실을 선택하려는, 인간의 저지할 수 없는 性情이 꺼질 수 없는 불꽃으로 타오른 경우였다. 인간 영혼의 조종자로서 그토록 유능했던 스탈린이 수십년간 인간성을 잔혹하게 짓밟았지만 인간정신의 이 긴급명령 앞에서는 그도 무력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격하는 한 인간이 과오를 뉘우치고 순수성을 되찾는 위대한 자기고백이었다는 이야기이다.
  
   1956년 2월25일,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격하 연설에 가장 놀란 것은 제20차 소련 공산당 대회 참석자, 즉 공산당 간부들이었다. 스탈린에 충성하여 수많은 동지들의 시신을 밟고 승진했던 간부들은 이제 자신들의 목을 걱정하게 되었다. 속으로 스탈린을 증오했던 이들도 공산당의 최고책임자가 신격화된 전임자를 가차 없이 공격하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 소련 KGB(국가정보방첩기관) 수령이 되는 블라디밀 세미차스트니 등 참석자들은 이렇게 기억했다.
  
   '연설이 끝났을 때 처음에는 죽음과 같은 침묵이 흘렀다. 파리가 날아가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그리고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들렸다. 걱정과 기쁨이 교차했다. 흐루시초프가 어떻게 이런 연설을 이런 청중 앞에서 할 수 있는가 하는 경이로움이 퍼져갔다.'
  
   흐루시초프의 정신적 제자인 고르바초프의 보좌역으로서 소련의 해체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던 알렉산드 야코브레프는 당시 소련 공산당 선전국의 하급 간부였다.
  
   '우리는 대회장을 나오면서 서로 눈이 마주치는 것을 피했다. 부끄럼 때문이었는지, 충격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예측하지 못한 돌발사태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마주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흐루시초프는 연설중 스탈린의 숙청과 함께 2차 세계 대전 지도방식을 가차 없이 비판했다. 1941년의 키에프 패전, 다음해의 하르코프 패전에 스탈린이 책임이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 두 패전에는 흐루시초프가 정치위원으로 간여했기 때문에 자신의 과오를 스탈린에 넘기는 인상도 주었다. 흐루시초프는 '스탈린이야말로 비겁자였다. 그는 겁쟁이였다. 그는 전쟁중 한번도 전선에 가지 않았다'고 했다.
  
   스탈린 격하 연설이 진행되는 동안 스탈린의 숙청에 협조했던 말렌코프, 몰로토프, 카가노비치 등 간부들은 얼굴이 흙빛이 된 채 침묵했다. 흐루시초프는 소련군의 원로인 보로시로프 전 국방장관을 가리키면서 말했다고 한다.
  
   '당신은 이미 늙어빠진 노인네야. 당신 눈으로 본 진실을 이 자리에서 털어놓을 용기도 없는가.'
  
   흐루시초프 전기를 쓴 윌리엄 타우버만 교수는 이렇게 평했다.
   '흐루치초프의 스탈린 격하 연설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용감한 행동이자 가장 무모한 행동이었다. 소련 체제는 그 일로 해서 영원히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었고 그 또한 그러하였다.'
  
   그의 용감성으로 인해 수백만 명이 목숨을 구했고 그의 무모함으로 인해 그는 결국 실각되었으며 소련 체제는 결국 붕괴의 길을 가게 되었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흐루시초프는 왜 용감하고 무모한, 영향력의 면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연설을 하기로 했던가.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이 의문에 대해 타우버만 교수는 이 책을 통해서 흐루시초프의 정의감, 특히 진실을 전하려고 하는 인간 본연의 善함이 광채를 발한 순간이라는 답을 내리고 있는 듯하다.
  
   역사적 연설이 있은 지 4년이 흘러 흐루시초프는 사석에서 이런 설명을 했다고 한다.
   '내가 학교에서 읽은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짜르 시대에 정치범 감옥이 있었다. 사회주의 혁명가들, 멘셰비키들, 볼셰비키들이 있었는데 그들중 핀야라는 늙은 구두 만드는 사람도 있었다. 20 차 전당대회에서 내가 한 일이 바로 그거야. 나는 제1서기로 뽑혔으니 내가 할 임무를 다해야 했다. 핀야처럼 말이야. 나에게 어떤 위험이 닥치더라도 나는 과거에 있었던 진실을 증언할 의무를 진 것이야.'
  
   나는 흐루시초프의 말을 믿고 싶다. 그의 생애는 스탈린에 대한 충성과 그에 대한 비판으로 양분된다. 흐루시초프 또한 스탈린에게 충성하면서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감옥이나 사형장으로 보냈다. 그러면서도 그는 스탈린에 대한 비판의식, 즉 분노와 정의감을 불씨처럼 간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며느리도 정치범 감옥생활을 수년간 했다. 그는 자신이 참여하고 목격했던 인간말살의 참혹상을 반드시 증언함으로써 수용소 群島를 없애야겠다는 결심을 했던 것이다. 그를 움직인 것은 진실과 양심이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 부분에서 黃長燁씨가 생각났다. 그 또한 흐루시초프처럼 소위 주체사상을 만들어 金日成 우상화에 가담했다. 그러면서도 그 또한 진실을 알리고 말겠다는 양심의 불을 꺼버리지 않았다. 1997년 탈출 이후 그가 한국에서 하고 있는 역할은 흐루시초프에 의한 스탈린 격하 연설과 비교된다. 전제 정권의 본질과 진실을 알리는 것! 수백만의 북한주민들이 굶어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수치를 통해 처음으로 알린 것도 그였다. 1980년 이후의 김일성 정권은 본질상 김정일 정권이었고 이 정권 안에는 온건파와 강경파가 존재하지도 않으며 오직 충성파만이 있을 뿐이란 사실을 알린 것도 그였다.
  
   黃長燁씨의 이러한 진실 토로에 대해서, 20차 전당대회 때의 청중들처럼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남한내 친북세력이었다. 그들은 김정일 정권에 대한 진실이 확산될 때 자신들의 정체와 위선이 폭로될 것임을 알았다. 그들은 그 뒤 黃長燁씨의 입을 막고 그의 증언이 믿을 수 없다고 선동하는 데 힘을 썼다.
  
   친북좌파가 아닌 사람들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들이 黃씨가 전한 진실을 직시하지 않으려고 했다. 진실을 직시하는 것은 북한정권을 악으로 규정해야 하며, 그렇게 한 뒤에는 행동해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를 지기 때문이었다. 양심이 부과하는 역사적, 인간적, 도덕적 짐을 질 용기가 없는 사람들은 지금도 북한의 진실을 외면하고 있다. 흐루시초프처럼 黃선생은 많은 위선자들에 진실의 증언자, 그리고 양심의 가책자로 존재한다.
  
   윌리엄 타우버만 교수가 쓴 흐루시초프 傳記를 읽으면 스탈린 시대에 감추어졌던 진실이 그의 死後에 모습을 드러내었고 이것이 흐루시초프의 양심을 움직여 그로 하여금 1956년2월의 소련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스탈린 격하 연설을 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진실의 힘이 역사를 움직인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이다. 물론 그 진실은 인간의 양심과 만나야 한다. 지금 북한의 숨어 있던 진실은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나 아직 흐루시초프 같은 양심을 만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의 흐루시초프는 누구일까.
  
   흐루시초프가 우크라이나의 당 책임자로 있을 때 동료였던 알렉세이 스네고프는 비밀경찰 두목 베리아의 약점을 많이 알고 있어던 죄로 체포된 뒤 북극권의 강제수용소에서 16년간 생활했다. 스탈린이 죽자 그는 편지를 써 흐루시초프에게 보냈다. 흐루시초프는 베리아 재판 때 스네고프를 증인으로 불러낸 뒤 강제 수용소로 되돌리지 않고 석방시켰다. 그는 스네고프를 강제수용소 관리부서의 고위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흐루시초프는 스네고프를 통해서 많은 정치범들을 풀어주었고 실태조사를 시키기도 했다.
  
   흐루시초프는 1955년에 스탈린의 전기를 쓴 충성분자 표토로 포스페로프를 책임자로 하는 스탈린 시대 조사 위원회를 발족시켰다. 그는 몰로토프 등 정치국위원들의 반발을 무시했다. 스탈린주의자 포스페로프를 위원장으로 임명한 것은 보고서의 신뢰성을 위해서였다.
  
   포스페로프가 작성한 70페이지짜리 보고서는 1935-40년 사이 192만여명이 국가반역 혐의로 체포되어 그 가운데 68만8천여명이 총살되었다고 보고했다. 그들에 대한 범죄 혐의는 전부 조작된 것이었고, 스탈린은 허위 자백을 끌어내기 위한 고문을 허가했다는 것이었다.
  
   포스페로프는 이 보고서를 읽는 동안 눈물을 감추지 못하더니 잠시 졸도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 보고서를 놓고 정치국 위원들은 격론을 벌였다. 흐루시초프는 '스탈린의 지도자로서의 파탄상이 드러난 이상 우리는 진실을 증언할 용기를 가져야 한다'라고 말했다. 몰로토프, 보로시로프, 카가노비치는 반대했으나 다른 위원들은 진실 공개에 찬성했다. 세필로프는 '우리가 당에 보고하지 않으면 그들은 우리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그 유명한 스탈린 격하 연설이 당의 공식 의사로 결정된 것이다.
  
   흐루시초프는 연설문을 작성할 때도 스탈린의 죄상을 낱낱이 폭로할 수 있도록 대필자들을 여러 명 부렸다. 소련 공산당 역사를 뒤집는 흐루시초프의 이런 연설이 개인적 용기로써만 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흐루시초프는 정치국 위원들 중에 자신의 편을 보강했고, 중앙위원들속에도 충성파를 많이 심었다. 사하로프 등 지식인 그룹도 흐루시초프를 지지했다. 이런 포석 뒤 스탈린 격하 연설이 이뤄졌는데도 그 1년 뒤 정치국 회의는 몰로토프 등 스탈린 충성분자들의 작당에 의해 흐루시초프를 몰아내기 직전까지 갔던 적이 있었다(이때 군대와 중앙위원회가 흐루시초프 지지를 결의하여 그를 구했다).
  
   흐루시초프는 전당대회에서는 이 연설문을 비밀로 붙이자고 했으나 속으로는 연설문이 알려지기를 원했다. 그래야 역사가 달라질 것이 아닌가. 그는 연설문을 전국의 당조직과 청년당 조직에 보내 당원들에게 교육하도록 했다. 이렇게 하여 수주안에 수천만 명의 당원들이 천지개벽의 연설문에 접하게 되었다. 동구 등 세계 도처의 공산당들도 이 연설문을 받았다. 그들의 충격도 컸다. 세계 공산주의 운동의 유일한 영도자였던 스탈린이 범죄자 수준으로 격하되었으니 말이다.
  
   이스라엘 정보기관이 맨처음으로 흐루시초프 연설문을 폴란드에서 입수하여 미국의 CIA에 전했다. 미 국무성은 이 연설문을 뉴욕타임스에 제공했다. 타임스는 1956년 6월4일 연설문 내용을 특종으로 보도했다.
  
   스탈린 격하 연설에 대한 소련 사람들의 반응은 여러 갈래였다. 고르바초프는 그때 黑海 연안 세바스토플市 콤소몰(청년공산당조직)의 젊은 간부였다. 그는 흐루시초프의 연설문을 읽고 흥분했다. 개혁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흐루시초프의 조치를 절대적으로 지지했다. 나는 내 생각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했다. 그러나 당의 조직간부들은 흐루시초프의 연설에 대해서 복잡한 생각을 갖고 있었고, 혼란에 빠지기도 했다. 한 지구당 책임자는 나에게 '인민들은 개인숭배를 규탄한 연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고 말했다. 나는 당에서 말하는 '인민들'은 보통 당 조직간부들을 의미한다고 생각했으므로 직접 부딪쳐보기로 했다. 나는 공산당원들 및 청년당원들과 매일 만나 대화를 나눠보았다. 젊고 교육을 잘 받은 그룹은 흐루시초프 연설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다른 사람들은 흐루시초프가 인용한 사실들을 믿지 않으려 했다. 제3의 그룹은 사실들을 의심하지 않으면서도 왜 하필 이때 그런 사실들을 공개하여 당을 곤란하게 만드는지 모르겠다는 태도였다. 보통사람들 사이에서는 스탈린이 자신들을 탄압한 간부들을 숙청했었다고 믿고 있는 이들이 많았다. 이들은 스탈린에 의한 숙청이 자신들을 쥐어짠 악덕간부들에 대한 응징이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흐루시초포의 보고연설이 너무 개인적이고 감정적이었다고 생각했다. 복잡한 정치 사회 경제적인 현상을 지도자의 개인 성격에만 너무 결부시킨 점도 있었다. 더 깊은 분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스탈린의 고향인 그루지아의 트빌리시에서는 6만 명의 시위대가 反흐루시초프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다가 군대와 충돌하여 20명이 죽었다. 그해 가을 헝가리에선 스탈린 격하 움직임을 타고 反蘇 봉기가 일어나 한때는 공산당 정부가 실각하기도 했다. 소련군이 개입하여 유혈로 이 사태를 진압함으로써 20세기 최대의 巨惡을 격하시킨 흐루시초프는 또 다른 악당으로 찍혀버렸다. 역사는 직선으로 진행하지 않고 Z자를 그리면서 발전하는 것이다.
   흐루시초프는 1964년에 브레즈네프가 주동한 정치국 위원들의 쿠데타에 의해서 권좌에서 물러났다. 그는 10년간 소련을 이끌면서 대외적으로는 모험적인 정책을 많이 폈다. 베를린 장벽을 쌓아올린 것도 그였고, 미국의 목 밑인 쿠바에 핵 미사일을 배치했다가 케네디 대통령의 반격을 받고서는 핵전쟁 일보 직전에 미사일을 철수하는 치명적인 양보를 했다. 흐루시초프는 예측이 불가능한 짓을 하는 사람처럼 비쳐지기도 했다. 흐루시초프를 몰아낸 브레즈네프는 그 뒤 약20년간 공산당의 기득권 세력을 보호하는 수구적인 정책만 펴다가 소련을 내부로부터 병들게 했다. 브레즈네프는 스탈린 시대로 돌아가지는 못했으나 개혁도 하지 않았다. 소련의 붕괴를 가져온 것은, 브레즈네프의 反흐루시초프 노선이었다.
  
   모스크바 교외의 저택에서 사실상 연금생활을 보낸 흐루시초프는 1964년에서 그가 사망한 71년까지 생애 최후의 투쟁을 계속했다. 이 점이 그의 인간적 위대성이란 느낌이 든다. 독재자는 권력을 놓치면 죽임을 당하든지 입을 닫고 죽은 듯이 살아야 하는데 그는 비밀리에 회고록을 써 敵國인 미국으로 밀반출시켜 그곳에서 출판하도록 했던 것이다. 70대의 이 사람을 在野투사로 만든 동력은 '진실을 증언하고자 함'이었다.
  
   소련 공산당은 그가 녹음기를 앞에 두고 회고록을 구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여러번 협박, 도청, 수색하였으나 그는 굴하지 않았다.
  
   한때 흐루시초프의 부하였던 정치국 위원 키리렌코와 당의 규율위원회 위원장 펠세는 그를 불러 따졌다.
   '당과 국가의 역사를 해석하는 것은 중앙위원회의 일이지 개인이 할 일이 아니다. 작업을 중단하고 원고를 넘겨라.'
   '회고록은 역사가 아니다. 개인의 관점일 뿐이다. 당신들의 요구는 헌법이 규정한 시민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 마음대로 해봐라. 내 연금, 아파트, 별장을 뺏아가려면 그렇게 해봐라. 나는 그래도 먹고 살 수 있다. 나는 금속기술자로 돌아가 일할 수도 있다. 아직도 내 기술을 잊어버리지 않았다. 나는 배낭을 지고 구걸하면서 먹고살 자신도 있다. 사람들은 내가 필요한 것을 줄 것이지만 당신들은 굶어죽을 것이다.'
  
   인생의 밑바닥에서 自手成家해서 출세한 흐루시초프는 인민들이 자신의 편임을 알고 있었다. 다시 그 바닥으로 돌아갈 각오가 되어 있다는 70대 노인의 오기에서 우리는 1956년의 스탈린 격하 연설이 그의 인감됨을 반영한 것임을 알게 된다. 그의 용기는 바닥체험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흐루시초프는 회고록 원고가 압수될 것을 두려워하던 중 정치범 출신인 빅토로 루이스(그는 영국 런던 이브닝 스탠다드의 모스크바 특파원으로 일하고 있었다)를 통해서 미국의 주간지 타임誌와 연결되었다. 흐루시초프는 이 원고를 타임지로 밀반출하기 시작했다. 이 원고를 편집하고 확인하는 일을 했던 사람이 클린턴 정부 시절 미 국무부 차관도 지냈던 당시 타임지 기자 스트로브 탈보트였다.
  
   미국의 출판사측에선 자신들에게 넘겨진 원고가 흐루시초프 것이며 출판을 허가했다는 증거를 만들기 위해서 중계자를 통해 흐루시초프에게 모자를 선물했다. 흐루시초프는 그 모자를 쓰고 사진을 찍어 보내주었다. 1970년 가을 흐루시초프의 회고록이 서양에서 출판될 것이란 사실이 공개되었다. 소련 공산당은 그를 호출하여 신문했다. 흐루시초프는 자신이 원고를 밀반출시키거나 출판을 허가해주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소련 공산당도 그 책이 조작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든 데 만족하고 더 이상의 제재는 가하지 않았다
   .
  
   이 자리에서 소련 공산당 당규위원회 위원장 펠페는 흐루시초프의 행태를 스탈린식이라고 몰아붙였다. 이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반박했다고 한다.
   '그렇다. 우리는 모두 스탈린이란 전염병에 걸렸었다. 나는 스스로의 힘으로 치유했으나 당신은 아직 그대로야.'
  
   '나를 잡아 가두어, 나를 쏴버려. 드골이 죽었다는 뉴스를 오늘 라디오로 들었는데 그가 부럽다. 나는 정직한 사람으로 죽고싶다. 나는 십자가에 매달려 죽고싶다. 망치와 못을 가져오라!'
  
   이 무렵 흐루시초프는, 한 극작가가 일생에서 무엇이 가장 후회스러운가라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많은 피를 흘리게 한 것이지! 나의 팔꿈치까지 피가 묻어 있단다. 이것이 나의 영혼에 남아 있는 가장 끔직한 기억이야.'
   -
  
  
   참고자료/왜 모택동은 히틀러만큼 비판받지 않나?
  
   프랑스의 지식인들이 만든 [공산주의 黑書]란 책에 따르면 공산당은 20세기에 약1억명을 학살했다. 나치 히틀러는 유태인 약600만 명을 학살했다. 스탈린은 약2천만 명, 모택동은 약6천만 명을 학살하거나 사실상 굶겨죽였다. 그럼에도 왜 사람들은 스틀린이나 레닌, 모택동을 히틀러처럼 미워하지 않는가. 인명살상의 규모로 볼 때는 스탈린 모택동 등이 더 악독한데도. 최근 盧武鉉 대통령이 모택동을 존경한다고까지 발언한 걸 보면 공산당에 의한 학살에 대해서는 그 피해국가에서도 상당히 너그럽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이렇다. 나치 히틀러는 2차 대전의 패전국이었다. 그 죄상이 패전과 함께 모조리 드러나 전범들은 재판을 거쳐 단죄되었다. 공산권의 붕괴는 패전하듯이 진행된 것이 아니라 상당히 오랜 기간 서서히 변화하면서 망해갔다. 분명한 단죄가 이뤄지지 않았으며 전범재판도 없었다. 공산당이 붕괴된 이후에 집권한 사람들도 공산당 출신들이 많아 공산당에 대한 단죄가 이뤄지기 힘들었다.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공산주의자들의 학살을 고발하고 규탄해야 할 지식인 사회에 오랫동안 사회주의적인 영향이 강하게 침투하여 그런 자기 반성이 어려워졌다는 점이다. 공산주의가 내세우는 평등, 정의, 평화 같은 좋은 말에 넘어간 것은 생활인이 아니라 백면서생 같은 철부지 지식인들이었다. 공산당이 망하고도 이들 철부지들은 자기 부정으로 이어지는 공산당 비판을 애써 피하고 있다. 마르쿠제 같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좌파 학자들은 모택동을 영웅으로 추앙하고 미국을 파쇼로 몰았다. 이런 자들이 한때나마 세계 지식인 사회의 스타가 되었다. 識者憂患이란 말 그대로다. 지식인이란 존재가 얼마나 세상과 역사가 돌아가는 것을 모르는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인류역사상 최악의 인간인 김정일을 아직도 위원장이라고 부르면서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수구니 전쟁광이나 하고 비난하는 자들이 진보니 개혁이니 자칭하고 이런 자들을 대우해주는 정신병적인 한국의 상황도 세계적으로 보면 예외는 아닌 것 같다. 지식이 반드시 인간을 현명하게 만들어주지는 않는 모양이다. 그 지식이 변태적으로 쓰일 때는 흉기나 독약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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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삥이 ip1 2017-09-08 11:51:33
    니 글은 세단락으로 좀 나나서 썼으면 한다
    너무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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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맹자 ip2 2017-09-10 15:12:34

    - 문맹자님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2017-09-10 15: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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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놈아 ip2 2017-09-10 15:15:31
    얄마 니보라고 쓴글이 아니잔어..왠 훈계질이야
    산에서 부족생활하던눔이 한글은 어떻케 알아가지고..ㅉ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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