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돌이. 그리고 통순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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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향은 노래에도 있듯이 해당화 붉게 피고 갈매기 끼룩 끼룩~~날아예는... 수평선 너머로 지는 붉은 노을이 아름다운 동해바닷가이다. 그러나... 두만강 국경과는 삼백리 정도 떨어져있어서 쉬쉬 하면서 들리는 한마을이 거의 텅텅 비었대...하는 국경 인근의 마을들과는 다소 탈북이 어느 정도 버겨운것이 사실이기도 하다... 북한과 달리 한국에선 계문화가 상당히 발달이 되어있다고나 할까... 초등학교 동창회. 고등학교 동창회. 대학교 동창회. 모교 총 동창회까지...다양하게 이루어지는 그러한 모임들을 보면서 동창회같은건 꿈조차 꾸어볼수 없을 자신의 처지가 자못 서글프기까지 했었다. 그랬는데... 운좋게도 나는 여기 한국에서 코흘리면서 함께 자랐던 친구들(학교동창들)을 그것도 네명이나 만나게 될줄이야...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나의 어릴적 모습을 친구들은 기억하고 있었고... 크고 작은 사건사고들을 추억하면서 함께 웃기도 하고... 나름 한국사회의 정착과정에서 겪게 되는 고충들을 서로 서로 털어내기도 하면서... 내일 일도 모르는게 사람이라지만... 우리가 이렇게 한국에서 만나게 될줄이야 어찌 알았을까? 하면서 행운의 여신이 감싸주어 다행히 이어지게 된 우리들의 우정에 감사해 하면서 살아간다. 그런데... 사는곳이 전부 대한민국 동서남북으로 나뉘어 있다보니... 그리고 각자 삶에 충실하다 보니 얼굴 한번 보는게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니다... 하지만...이렇게 그리운 목소리나마 듣는게 어디냐고...지금 더 열심히 살아서 보다 나은 자신들의 삶을 개척해놓은후 나이들며는 얼굴도 자주 보고 놀러도 다니자고 애써 서로를 위로하기도 한다. 작년에...대한민국의 항구도시 인천에서 한 친구가 하얀 순백의 드레스를 입고... 웨딩마치를 울렸다... 전라도에서. 경상도에서. 충청도에서... 정말 어렵게 한자리에 모였었다. 강호동이 왔다가 울고갈 거구의 신랑은 수줍은 미소로 우리들을 반겨주었고... 신랑의 친구들 또한 많지 않은 신부의 친구였던 우리들을 공주님 떠받들듯이 하면서 잘 대해주었다... 통돌이 통순이 얘기를 혹시 아시는지? 엘지 세탁기 얘기가 아니고... 남남북녀 커플에서 아들을 낳으면 통돌이(일명 통일돌이). 딸을 낳으면 통순이(통일순이)라는 신조어가 생겼단다. 물론 웃으며 얘길했지만...정작에 이미 수많은 남남북녀 커플들에서 태어난 통돌이 통순이들은 듣고 그냥 웃어만 넘어가줄지... 혹여 코시안이나 라이따이한처럼 오해와 편견의 그늘속에서 웃음을 잃지나 않을까 저어되는것은 단순히 어미의 지나친 기우에 불과한것일까? 나중에... 강산이 두번정도 변할때 즈음... 내 아들이 자라서 엄마에 대해서. 아빠에 대해서. 더 나아가 북한에 대해서...남한에 대해서... 그리고 단군을 시조로 한 유구한 문화를 깨달을 때 즈음은 내 손으로 자가용 몰고서 꿈에서조차 못잊는 고향산천을 가보리라 다짐한 그 맹세를 지킬 날이 과연 올것인지... 내 아들이 깨닫게 설명을 해주려면... 아마도 50년 육이오 전쟁부터 시작해서 구 소련과 미국으로 인하여 불행하게도 가로막힌 분단 반세기의 아픈 역사부터 풀어나가야 겠지... 그렇게 쭈욱~~3박4일이 걸릴지도 모를 한맺힌 역사를 풀어나가다가 결말은 넌 대한민국에서 태어났으니 두고 두고 부모님께 감사해야 한다는 말로 끝을 맺어야지... 그러면 내 아들은 과연 뭐라고 대답할까? 물론 이것은 아마도 십수년이나 지난 후에나 가능한 얘기일것이리라... 차라리 그때즈음은 남과 북이 자유롭게 왕래라도 가능해서 수줍게 피어난 해당화가 만발한 나의 고향으로 함께 가보았으면 하는것이 더 솔직한 나의 심정이리라... 친구가 백년가약을 맺던날 우리는 서로 웃으며 이렇게 말했었다... " 나중에 너 널 닮은 예쁘고 야무진 이쁜 통순이 낳아라. 그럼 내가 며느리 삼아주께~~" 물론 농담이었지만... 서로의 철없던 어릴적 모습들을 기억하고... 그리고 훌쩍 세월이 지나서 어른이 되어가는 모습들을. 삶의 희노애락을 함께 나누며 나이들어감을 지켜볼수 있는 친구들이 있다는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른다... 사십대에 들어서면 우리도 일년에 한번은 모여서 등산도 하고 바다에도 가야지... 물론 우리들의 (통돌이. 통순이)들도 대동하고서 말이지~~~ 친구들아! 다들 건강하고 하고자 하는일들 열심히 하면서 피눈물 뿌리면서 떠날수 밖에 없었던 고향이 자유대한의 품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그날을 위해서 씩씩하게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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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가 되면 저도 북한에 가서 살고싶네요...학습과 생활총화만 받지 않는다면...
남한에서도 교회나 성당이라면 질색이었는데, 제 스스로 사이비 종교집단의 신도가 되는 것 같아서 무척 망설여지네요..
언론도 자유롭지 못했고 국민들도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때 우리들 의식있는 대학생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없이 독재정권과 맞서 싸웠습니다..
부모님들이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며 한사코 반대 하셨지만 결국 우리들의 단결된 힘으로 대한민국의 앞길을 막고 있던 독재라는 거대한 바위를 밀어낼 수 있었습니다..
남한은 이제 자유로운 나라가 됐습니다..
자유롭고 잘사는 나라가 되어서 외국에서도 돈벌러 오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북한은 남한처럼 자유롭지도 못하고 잘살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요즘 저의 모든 관심은 북한에 쏠려 있습니다...
북한도 남한처럼 자유롭고 잘살게 되기를 매일 매일 기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남한에서는 좌파가 우파같고 우파가 좌파같습니다..
왜냐하면 남한의 좌파는 북한의 인권과 민주적 권리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오히려 김정일의 독재를 옹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북한의 인권과 민주적 권리를 위해서 애쓰는 집단은 소위 우파들입니다..
그래서 저도 지난번 대통령 선거에서는 이명박을 찍었습니다..
저는 사회주의가 가장 이상적인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북한은 지금 사회주의가 아닙니다..
자본주의보다 발전된 것이 사회주의인데 북한의 사회주의는 봉건주의 보다 못합니다..
사상 자체가 봉건적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북유럽의 사회민주주의가 진정한 오늘날의 사회주의라 생각합니다..
덴마크나 노르웨이 스웨덴과 핀란드 같은 나라들은 어떤 자본주의 국가보다도 국민소득이 높고 거의 완벽한 사회보장이 되어 있습니다..
저는 남한의 자본주의에 대해서도 반대하지만 북한의 봉건적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더 더욱 반대합니다...
플로베르님은 저와 비슷한 경험을 가지시면서도 아직?좌파로 남아계시군요.
우리가 한때,손을 맞잡고 싸운때가 있었죠.
저는 서울에서의 대학생활때,저의 주변이 선배,동기들이 좌파(당시에는 운동권이라 불리웠죠)로 채워진것을 눈치챈 부모님에 의해,당시 교환교수로 이곳에 와계신던 삼촌댁에 보내짐으로서,지금 제가 여기 살게 됐읍니다.
여기서,대학1학년 부터 다시 공부를 시작했을때,제가 다녔던 학교는 교수님들이 모두 사회당계열의 '좌파'교수님들 이었습니다만,이곳에서 공부하면서 근대사상과 그 방법론에 대해서 또 언젠가는 돌아갈 내조국 대한민국에 대해서 고민하면서, 저는 정치적 정체성이 우파가 됐읍니다.
북유럽의 사민주의에 대해 지나친 환상,신비주의,교조주의에 빠져드시지 마시길...
그보단 플로베르님의 지금현재 딛고있는 현실과 그 주변에 대해, 깊이 고찰하시고,합리적인 판단에 따라, 님께서 가진 역량으로,그것을 조금씩 개조해 나가는것이 보다 이성적인 판단일것이라 생각됍니다.
루이 아라공, 롤랑 바르트, 미셀 푸코, 루이 알튀세르, 쟝 폴 사르트르와 시몬느 드 보봐르 전세계 좌파지성인들을 매혹시켰던 우리들의 우상들이었죠...
문학과 예술에 대한 토론으로 날밤을 세우던 그 시절이 그립습니다..
제가 지금 사용하는 필명도 마담 보바리를 썼던 프랑스의 소설가 귀스타브 플로베르에서 따왔습니다..
나에게는 대한민국보다 더 조국같았던 프랑스에서 살고 계시니 정말로 부럽습니다..
그래도 동창생을 네명씩이나 만나보셨다니 또 부러워 지네요.
사랑은 영원하지 못하지만 추억은 영원하다고 저는 생각해요
정말 추억은 영원한것 같아요, 머리속에서 맴도는 그리운 고향생각 학교친구들 생각, 동네 친구들 생각, 생각하면 참... 입가에 미소가 저절로 피여나네요,
비둘기로 님 부디 행복하세요, 그리고 이런 좋은글 많이 올려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