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물은 말한다. 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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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인신 매매 탈북자에대한 공안단속이 강화되면서 탈북자들은 연선보다는 내지정착에 열을 올렸다. 그것은 그때까지만 하여도 탈북자에 대한 편견도 연선보다는 적었고 인가가 많다보니 공안에서 일일이 탈북자 단속을 할수없는 우월점이 있었기때문이다. 그리고 내지 정착에는 남자들보다는 여자들이 더 쉽게 정착할수 있었는바, 원인은 중국에는 조선족이고 한족이고 간에 혼령기를 놓치고 장가를 못간 노 총각들이 많았기에 그들과 가정을 이루거나 동거하는 조건으로 여자들은 신변안전에 어느정도 보호를 받을수가 있었기 때문이였다. 그렇게 내지에서 어느정도 안정을 찾은 탈북여들은 주변의 노총각들의 부탁으로 북한에 있는 친구나 친척 여자들을 데려다 그들과 살도록 해 주었고, 그러는 과정에 받은 보수를 연선에서 탈북을 도운 주인집들과 나누게 되였으며, 그것이 점차 발달되여 인신매매로까지 치달은 것이였다. 처음에 연선에서 탈북여들의 부탁으로 탈북을 도와주던 주민들은 보수를 받는 재미에 위험을 무릅쓰고 탈북자들을 보호해주었고. 점점 자기 주도로 선을 세우고 북한에서 여자들을 데려다 일명 소개비를 받고 내지로 시집보내기에 이른것이였다. 여기서 내가 들었던 한가지 이야기가 떠오른다. 흙룡강 어느 농촌 마을에 시집을 갔던 한여자가 북한 가족에게 써보낸 편지내용의 일부이다, ( 아버지 어머니 안녕하세요? 고향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으세요.~ ~ ~ 나는 이곳에서 매일같이 새하얀 이밥만 먹으면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 ~ 남편과 나는 농사를 짓는데 땅만해도 조선의 웬만한 농장만큼 있고 우리집에서 일년에 수확하는 쌀은 몇십년을 먹어도 다 못먹을 만큼 이랍니다. ~ ~ ~ ) 사실 처음에 탈북여들은 의식주만 해결이 되고 북한에 있는가족을 어느정도 도와줄수만 있다면 거의 조건을 따지지 않고 시집을 갔었다. 차 차 그들은 당지 생활에 적응하면서 의식주 해결은 당연한것이고 , 점점 눈높이를 중국의 도시쪽으로 맟추기 시작한것이다. 한국에 정착한 적지않은 새터민 여성들은 중국에 있는동안 여러번의 인신매매로 인하여 심신에 많은 상처를 입었다고들 하는데 조선족의 한사람으로서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한다. 6, 내지의 탈북자 단속 인신매매로 인하여 내지에 들어가는 탈북 여자들의 수가 늘어가면서 적게는 5~6 명 많게는 수십명 정도의 탈북자들이 한 마을에서 어울려 살게 되였고 이들은 같은 북에서 왔다는 친근감으로 서로들 어룰리게 되였으며 서로의 정보를 공유하는 과정에서 도시가 시골보다는 돈벌이도 쉽고, 살기도 좋다는것을 알게되는 등 사회의 이러저런한 면모에 눈을 뜨기 시작한것이다. 처음에 내지의 공안에서도 웬간해서는 가족을 이루고 사는 탈북자들을 눈감아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같은 탈북자끼리 서로 신고하고, 아이를 내버리고 돈벌이 한다고 무작정 도시로 들어가는등, 이들이 연루된 사회적 문제들을 그냥 무시할수 없는 상황에서 탈북자 단속을 시작한 것이였다. 그래도 처음에는 단속이 되였다고 할지라도 아이가 있거나 얼마간의 벌금을 물수 있는 사람들은 뒤문으로 내보내 주었고 지어 어떤 마을들에서는 공안측과 정보를 공유하면서 탈북자 단속이 있는 날에는 미리 피할수 있도록 마을 간부들이 탈북자 단속을 미리 알려주는등 선행들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북한의 끈질긴 북송 요구와 공안의 단속강도는 점점 높아만져 갔고 북한에 북송되였다가 재 탈북하는 사람들이 늘어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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