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광장

자유게시판

상세
내 아내는 탈북자였다1
Korea, Republic o 강호 3 1646 2010-02-16 18:34:23
그녀를 만나다

내가 그녀를 만난 것은 북한의 대량 탈북이 시작 되였던 1997년 9월 중순 이였다.

하루는 밭일을 나갔다가 점심 식사하러 집에 들어와 보니 집에 미모의 처녀가 와 있었다. 집에 계시던 아버지께 물어보니 북한에서 중국 친척을 찾으려고 강을 건너온 사람이란다. 일반 탈북자에 비하여 그녀는 깔끔한 운동복 차림 이였고, 훤칠한 키에 얼굴도 너무나 예뻤다.

점심 식사를 하면서 그녀가 찾는 사람이 고모와 사촌 오빠들이란 것을 알게 되었고, 중국이 어려웠을 당시 북한을 방문한 친척들에게 부모님들이 많은 방조를 해줬었기에 찾기만 하면 얼마간의 도움이라도 받을 수 있단다. 나는 그녀가 들고 온 주소로 여기저기 수소문한 끝에 그녀의 사촌 오빠를 찾을 수 있게 되여 기쁜 심정으로 자동차에 그녀를 태우고 친척집 마을로 갔다. 마을에 도착하여 친척을 확인하려고 그녀를 차에 남겨둔 채 내가 먼저 오빠 집에 들어갔다. 그녀가 일러 준대로 찾아오게 된 경위를 상세히 설명하였더니 자기네 친척이 맞는단다. 연 며칠을 고생한 보람이 있구나 싶어서 {지금 밖의 자동차에 당신의 사촌동생이 타고 있다.} 고 말하며 그녀를 부르려고 몸을 일으켜 문을 열려는데 옆에 있던 사촌오빠의 안사람이 { 동생이 왔다고 해도 도무지 도와줄 형편도 못되니 나보고 적당히 둘러 대여 북한에 돌려보내 달란다. } 어이가 없었다. 혈육이라고 믿고 도움 좀 받으려고 사선을 헤치고 찾아온 친척인데 아무리 형편이 안 되더라도 집안에 불러들여 회포라도 나눠야 하는 것이 도리이거늘 적당히 둘려 대여 돌려보내 달라는 그들의 처사가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 밖으로 나와서 그녀에게 일의 자초지종을 말해줬더니 군에서 갓 제대했다는 그녀 또한 자존심이 만만치 않다, {중국이 어려울 때 부모님들이 많이도 도와 줬건만,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이제는 도와준다고 해도 자기가 안 받는다 } 면서 그냥 돌아가잔다.

그렇게 여러 날 고생 고생하여 찾았던 친척은 그녀가 집안에 들어가는 것 마저 거부하여 수고가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끝났고, 다시 그녀를 태우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우리가 집으로 돌아온 날 저녁 그녀가 나보고 인민폐 2 백 원 만 꾸어 달란다. 돈이 왜 필요한가고 묻는 말에 그녀는 북한에 돌아가 부모님에게 쌀을 비롯한 필요한 생필품들을 사드리고 다시 들어와 일해서 갚겠단다. 극심한 기근 속에서 가족을 살려보겠다는 일념으로 처녀 몸으로 사선을 헤치고 중국의 친척을 찾아 나선 그 기특한 용기에 감동 되여 나는 돈을 주었고, 밤에 두만강을 건네주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그녀는 약속대로 다시 강을 넘어서 왔고, 집에서 농사일을 돕고 있던 다른 탈북자들과 함께 가을걷이를 도왔다.

그러던 어느 날, 가을철에 필요한 농기구를 수리하고 있는데 옆에서 잔손질을 도와주던 그녀가 새물새물 웃으면서 {오빠는 애인이 있냐고 묻는다.} 아직은 결혼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나의 대답에 {부지런하고 손재간이 있는, 오빠 같은 사람과 결혼하는 여자는 행복하겠단다.} 그럼 순이 씨가 나랑 결혼하면 되겠네요? 라는 나의 농담에 그녀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힌다. 얼굴도 예쁘고, 더욱이 착한 마음씨에 이미 반해있던 나였지만 북한에서 왔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는데, 어찌 보면 그녀가 먼저 나한테 데시 하는 것 이였다. 하지만 부모님이나 형제들의 반대가 심할 것은 당연지사, 그리고 중국 정부에서 탈북자를 난민으로 인정해주지 않는 한 탈북자와 인생을 기약한다는 것은 참으로 많은 난관을 헤쳐가야 되는 일인 만큼 신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심해가는 공안단속

탈북자와의 혼인을 허락할 수 없다는 부모님과 형제들을 어렵사리 설복하고, 그녀와 일생을 함께할 것을 약속 하고나서 행복했던 시간도 잠시, 연선 마을들에서는 물건을 훔치고, 사람을 죽이고, 싸움을 하는 등 탈북자들이 관여된 여러 가지 형사안건 소식들이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는가 싶더니, 중국 공안의 본격적인 탈북자 단속이 시작 되였다.

97년 늦가을의 어느 날, 힘든 하루 일을 끝내고 막 잠자리에 들었는데 밖에서 개 짖는 소리와 함께 요란한 발자국 소리가 우리 집 쪽을 향하여 들려온다. 공안의 탈북자 단속을 직감한 나는 급한 대로 이불장에라도 들어가 몸을 피하라고 그녀에게 말하는데, 그러다 잡히면 탈북자임을 자인 하는 꼴이니 당당히 중국인인양 자는 척 하겠단다. 문이 열리더니 총을 꼬나든 변방부대 군인 대 여섯 명이 신발도 벗지 않은 채 구들에 올라와 집안의 여기저기를 수색한다. 물론 이불장도 예외일수가 없었다, 내 말대로 이불장에 숨었더라면 꼼짝없이 잡혔을 것이라는 생각 속에, 금방 잠에서 깨여난 듯 눈을 비비며 일어나 앉으며 무슨 일이냐고 묻자, 그들은 다짜고짜로 숨겨둔 탈북자를 내 놓으란다. 내가 우리 집엔 탈북자가 없다고 말하자, 군인은 옆에 누워있는 그녀를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유심히 살펴보더니 누군가고 묻는다, 얼마 안 있으면 결혼할 나의 애인이라는 대답에 앞으로 탈북자들이 건너오면 바로 변방부대에 신고하란다, 천만 다행이다. 그녀에게 중국말만 시켰어도 꼼짝없이 잡혔을 건데 다행이도 위기를 모면한 것이다. 당시 다른 탈북자들과는 달리 유달리 머리를 길게 길렀었고 키가 163cm 나 되는 그녀를 탈북자 일거라고 생각지 못한 그 병사가 그저 고마울 뿐이다. 군인들이 집에서 나가자 그녀는 참고 참았던 긴 한숨을 내 쉬며 십년감수란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단다. 그날 우리 마을에서는 탈북자 다섯 명이나 단속에 걸렸고, 결국 난핑 세관을 통하여 북송 되었다.

그 일이 있은 후부터 공안이나 변방대의 탈북자 단속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거의 집집마다 한두 명꼴로 있던 탈북자들은 태반이 북한으로 돌아가거나 단속이 덜한 내지로 들어가 버렸고, 남아있는 탈북자들은 밭에서 일을 하다가도 도로에 공안 차량이 보이기만 하여도 일손을 놓고 몸을 숨겼다가는 차가 지나가고 나서야 다시 나와서 일을 해야 했다. 탈북자들의 이런 심리를 알아차린 변방부대에서도 국경 순라를 도는 척, 몇 명씩 조를 무어 도보로 연선을 돌아다니다가도 불시에 농민들이 일하는 밭에 뛰 여 들어와서는 탈북자 단속을 하였다. 밤에도 도무지 집에서 발편잠을 잘 수가 없어 집 부근에 비밀 땅굴을 파거나 산속에 초막을 치고 낮에는 공안의 눈을 피해가며 밭일을 하고 저녁이 되면 밥만 먹고는 은신처에 숨어 있어야 했다. 참으로 힘들었다. 탈북자는 불법 도강을 했기에 피신을 한다지만 여자인 그녀를 긴긴밤 밖에서 혼자 있게 할 수가 없었던 나는 항시 그녀와 같이 피신을 했어야 했다. 늦은 가을밤 밖에서 잠을 잔다는 것이 그렇게 어렵고도 힘든 일이라는 것을 나는 그때 절실히 느꼈다. 가을 밤하늘의 별을 보며 간신히 잠이 들었다가 아침에 일어나 보면 머리에는 하얗게 서리가 내려있었다.

거의 매일이다시피 다니는 공안의 탈북자 단속을 계속하여 모면한다는 것은 참으로 무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나는 탈북자를 일군으로 둔 몇몇 마을 사람들과 함께 당시 변방부대에서 간사로 근무 하던 친구를 찾아가 단속이 있을 때면 정보를 제공 받기로 하고 얼마간의 돈을 건넸다. 그 후 당분간은 파출소나 변방부대에서 단속을 나와도 우리가 먼저 정보를 알고 탈북자들을 피신시킬 수가 있어서 그런대로 편안한 나날을 보낼 수가 있었고, 그렇게 97년은 별 탈 없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돈벌이에 혈안이 된 경찰들

1998년 봄, 그녀가 우리 집에 온지도 벌써 반년을 넘기고 있다. 5월의 어느 날 아침, 며칠 전 형님네가 새로 산 오토바이를 빌려 타고 시내에가 농약을 사가지고 돌아오던 중, 막, 마을 입구에 들어서고 있는데 멀리 하얀색 승용차가 길옆에 세워져 있는 것이 보인다. 전날 내린 비 때문에 포장이 되지 않은 도로는 아침까지만 하여도 다니기가 괜찮았지만 그사이 여러 대의 차량들이 지나다닌 듯 땅에 바퀴 자리가 패일정도로 길이 질퍽하다. 행여 새 오토바이에 흙탕물이라도 튕길라 조심스레 승용차 옆을 지나려는데 어느새 차에서 내린 건장한 사내 몇 명이 내 앞을 가로막는다. 엉거주춤 오토바이를 멈추고 웬일이냐는 눈으로 바라보는 나에게 그중의 한 사내가 형사경찰대 명찰을 내 보이며 { x xx 너는 체포 되였어, }란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내가 무엇 때문에 체포됐다는 건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원인을 물어보니 상세한 것은 형사경찰대에 가서 조사받으라며 한명이 내 오토바이를 뺏어 타고 앞에서 달리고, 하얀색 승용차에 강제로 나를 태운다. 차안에는 이미 이들에게 붙들린 마을의 한 친구가 타고 있었다. 어떻게 내 이름을 알았을까 궁금했는데 원인 제공자가 있었던 것 이였다. 나는 차가 달리는 동안 내가 체포될만한 어떤 일을 했던 지를 꼼꼼히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농 망기 때 강을 넘어온 그녀를 비롯한 몇 명의 탈북자한테 일당을 주며 일을 시킨 것을 빼고는 아무것도 떠오르는 것이 없다. 그리고 지금 집에는 그녀가 있지 않는가?

이러저런 생각 속에 차는 어느새 형사경찰 대대에 도착하였고, 나는 사람들에게 끌려서 비 여 있는 한 방에 들어갔다. 탕 하고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리더니 뚱뚱한 사람이 이제 네 인생은 끝났다며 노실하면 관대하게 형벌이라도 줄여줄 수도 있으니 지금부터 네가 지은 죄를 모두 자백하란다. 무엇을 어떻게 자백하라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아무 죄도 지은 것이 없다는 내 말에 뚱보는 옆에 있던 두툼한 진술서 책을 가리키며 이안에 네가 국경연선에서 지은 죄목들이 가득하단다. 어이가 없다. 연길에서 회사에 출근하다가 부모님이 농사일을 도와달라고 해서 시골에 나온 지가 채 2년도 안되는데 내가 국경연선에서 책 하나를 무을 정도로 이렇게 많은 죄를 지었다고 무작정 몰아 부치다니, 공안들이 흔히 사용한다는 수문띄우기 {넘겨짚기}임을 짐작한 나는 죽어도 지은 죄가 없다고 잡아뗐다. 순간, 뚱보의 곰 발통 같은 주먹이 내 얼굴을 향하여 날아온다. 무의식간에 고개를 돌리며 피했더니 이번엔 피했다고 몇 명이 모여들어서 발로차고 주먹으로 때린다. 한참을 정신없이 구타하면서 강제로 자백을 받아내려던 경찰들은 어느 정도 맥이 진했는지 이런 악종은 처음 본다며 이번엔 오토바이를 무슨 돈으로 샀는지 말하란다. 형님네가 농사수입으로 구입한 것이라는 나의 대답에 어처구니없게도 {지금까지 조사해보니 당신은 아무 죄가 없다는 것이 증명 되였단다. 하지만 형님이 오토바이를 어떤 돈으로 샀는지를 조사해야 하니깐 그때까지 오토바이는 몰수한다} 며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란다. 사람을 무작정 구타한 것이 조사였다며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뻔뻔스러운 경찰들이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농사일 때문에 북한 일군을 집에 두고 있는 나로서는 그들과 시시비비를 따질 수도 없는 노릇 이였으므로 형님네 오토바이만이라도 돌려달라고 했지만 그들은 형님이 내려와서 정당한 수입으로 구매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전에는 돌려줄 수 없다며 이번엔 오히려 내 존재가 귀찮다는 듯이 방에서 강제로 밀어낸다. 뭐라도 꼬투리를 잡아서 꼭 벌금을 받아내겠다는 속셈이다.

당시 특별히 할 일이 없었던 공안기관들에서는 탈북자 단속을 자기들이 개인 주머니를 채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생각하고 연선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주민들을 귀찮게 굴었다. 그러다가 가끔, 당지 공안기관과 맞다 들려서 영역 다툼을 하는 일도 자주 생기곤 하였다.


인생에 은인을 만나다.

시골에 사는 주제에 새 오토바이를 탔다는 이유로 형사경찰들에게 끌려가 반 주검이 되도록 얻어맞고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다. 여기저기 매 맞은 상처들이 질근질근 아파나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숭선, 남평 으로 갈라지는 3거리를 지나 오르막을 향하여 올라가는데 이젠 다리까지 후들거려서 더 이상 걷기조차 힘들다. 한참을 주저앉아 쉬면서 가끔씩 지나가는 차들을 향하여 손을 흔들어 보아도 초라한 내 꼴을 보고는 세워주는 차량도 없다.

한참을 쉬다가 다시 걸으려고 일어서는데 멀리서 은빛색의 승용차가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시도해볼 심산으로 이번엔 아예 길 가운데 들어서서 두 팔을 벌려서 차를 막았다. 찌~익 하고 제동을 밟는 소리가 들리더니 {죽고 싶어서 환장했냐}는 기사의 고함소리가 내 귀청을 찢는다. 차만 탈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처음에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던 기사는 나의 딱한 사정이야기를 듣더니만 "숭선 쪽에 가려면 이 길로 가는 것이 맞 냐" 고 목소리를 낮추며 묻는다. 처음으로 숭선 쪽에 가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내가 웃으면서 나를 태워주면 길을 가르쳐 주겠다고 하니 타라고 한다. 정말이지 살 것만 같았다. 내가 차문을 열고 뒤 좌석에 올라타고 보니 차안에는 이미 50대의 신사가 타고 있었다. 길을 가르쳐 주면서 기사님과 나누는 이런저런 이야기 속에 가끔 한마디씩 던지는 신사분의 말투가 왠지 남달랐다. 본인은 연별말투를 쓰느라 무척이나 애쓰고 있었지만 나는 그가 한국인임을 대번에 알아보았다. 당시 탈북자들에 대한 한국인들이 관심이 남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나는 차에서 내리면서 {혹시 탈북자들을 만나고 싶다면 아무 때라도 찾아오라}고 말하며 도로에서 집을 가르쳐주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온 후 내가 공안에 잡혔던 어처구니없던 상황을 형님을 비롯한 가족들에게 말해주었고. 비록 시골에 살지만 정부나 공안부문에서 한자리하는 동창생들이 많았던 형님은 그 정도 일은 아무것도 아니니 걱정 말라며, 부랴부랴 옷을 챙겨 입고 오토바이 찾으러 형사경찰대에 간단다.

그날 오후, 맞아서 아픈 몸 때문에 밭에 일도 못 나가고 집에 누워 쉬고 있는데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린다.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문을 열고 보니 오전에 나를 태워주셨던 기사님과 신사분이 문 앞에 서있다. 일을 보고 돌아가는 길에 들리셨다며 매 맞은 곳은 괜찮냐며 물어보는 신사분의 손에는 과일꾸러미가 들려있다. 신세는 내가졌는데, 정말이지 송구스러웠다. 구들에 올라오신 두 사람은 내 몸의 상처들을 두루 살펴보면서 죄 없는 사람을 어찌 이렇게 때릴 수가 있냐며 혀를 끌끌 찬다. 나는 나 때문에 일도 못나가고 옆에서 시중을 들고 있던 그녀를 그분들에게 소개시켜 드렸다. 신사 분은 한참을 그녀의 아래위를 훑어보더니 참으로 남남북녀란 말이 손색이 없을 정도로 미인이라며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고향을 떠나와 참으로 고생이 많다며 인민폐 8백 원을 그녀 손에 쥐여 준다. 하지만 난생 처음으로 한국 사람을 접하는 그녀는 극구 사양하며 내 눈치만 살핀다. 내가 받아도 괜찮다고 말해서야 고맙다며 겨우 돈을 받은 그녀는 한국 사람을 만났다는 사실을 북한에서 알면 처벌을 면할 수 없다며 그래도 불안함을 감추지 못한다, 이번에 신사 분은 매 맞은 데는 몸보신이 최고라며 닭이라도 사다가 영양 보충을 하라며 또 2백 원을 내놓으셨다. 그날 우리 마을 앞 두만강까지 구경하신 한국 신사 분은 몸 조리 잘하라는 말과 함께 기회가 되면 함께 찾아오라며 명함 장을 남기시고 떠나가셨다. 그분을 알게 된 것은 그 후 내 인생에서 잊을 수 없을 만큼 많은 도움이 되었다.


다음에 계속.
좋아하는 회원 : 3
이민복 관리자 미소천사

좋아요
신고 0  게시물신고
  • GNU 2010-02-16 18:46:36
    북한 여자들이 다른 남자한테 오빠라고 부르나요?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강호 2010-02-17 09:53:18
    아마도처음 탈북하는 여자들은 대처로 그런것 같아요. 경우에 따라서 나이차가 많이 나면 삼촌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더군요.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길손02 2010-02-16 18:49:22
    당시 상황들을 엿볼 수 있게 잘 정리된 글이 좋군요.
    '다음에 계속'이란 마지막 글에 아쉬움을 느끼며, 감사히 보고 갑니다.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와와와 2010-02-16 21:01:57
    역시 중국도 공산주의 맞군요. 죄없는 사람을 증거도 없이
    잡아다가 패다니... 여기선 있을수 없는일인데.....
    당장 고발하면 짤릴텐데. 혹시 중국은 지금도 그런가요?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김도사 2010-02-16 22:11:59
    한국은 자유주의 대나서 없지않아 있을 죄명으로 전직 대통령을 잡아 쳐드셨냐?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마에스트로 2010-02-16 22:24:34
    한국은 민주주의 국가입니다. 그러므로... 죄가 있으면 대통령이라도 잡아먹겠지요.....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 김도사 2010-02-16 22:30:59
    한국의 민주주의는 돈있는자들의 민주주의지 전 국민의 민주주의가 아니다 즉 형식상에는 민주 본질상에는 있는자들끼리 없는자들에 대한 독재 한국같은 미친개싸움 민주주의는 부럽지도 않다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왕서방 2010-02-16 22:33:42
    도사가 무슨 민주주의를 논하냐 도사가 있던 시절로 돌아가라.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ㅋㅋㅋ 2010-02-17 03:29:27
    중국보니 자유 민주주의의 나쁜점들은 한국과 비교도 안되게
    발달되었던데요? 뇌물은 기본이요. 사람도 몇푼이면 살수있고.
    중국이란 나라가 개념 자체가 없는건 세계인이 알아주자나요.
    하다못해 아기먹는 분유도 다 죽어도 돈만벌면 땡 아닌가?

    지금도 롯데리어, 삼선, 쏘나다, 파마(퓨마) , 카카콜라 , 써니(쏘니)
    등등 이런거 있나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세계 여행 다녀보셨나요? 세계 모든 나라들이 중국제품은 싸구려
    짝퉁으로 보눈거 알죠? 참 중국제품 인정해 주는 나라 있던데....
    우간다, 잠비아, 에디오피아. 이런나라들..... 중국이 짱 먹으셈 ㅠ.ㅠ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꽃미남1 2010-02-17 18:45:00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위태하긴 하지만.....................

    진짜 중국하고 비교할정도는 아니다.

    미친놈아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후리따부따 2010-02-18 01:13:43
    강호님이 북한여자랑 만났던 그 시절..즉 십년전하고 지금 많이 틀립니다.
    범죄자나 혐의분자에 대해 폭력을 휘두르면 그 폭력을 행사한 공안이나 집법일군을 상급부문에 고발하면 정황이 엄중하면 그 공안은 옷을 벗을수도 있습니다.지금 중국도 옛날과 많이 틀립니다.
    ...............................
    윗분들 타인이 올린 험난했던 북한여자와의 인생사에 웬 민주주의 토론?
    자유와 방종을 헷갈리지 맙시다.
    탈동회 회원들의 수준이 점점 실망스럽네요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세상사 2010-02-18 13:30:58
    중국에서 붙잡히면 우선 집안을 수색하여 돈 될만한것을 모조리 가져갑니다. 저 같은 경우는 우선 새로장만한 티비, 녹화기, 제가 돈벌이 하려고 ㄴ쓰던 재봉기, 오바르크를 전부 들어가고 변방대가면 묶은 머리를 헤쳐보고 어떤 중국 여자가 들어와 팬티까지 뒤집니다. 일해서 번돈 중국인들에게 모두 떼우고 알몸으로 지구 상에서 가장 무서운 감옥이 기다리는곳으로 보내집니다. 그런데 듣자니 한국에서는 불법체류로 붙잡히면 못받은 돈 다찾아서 보내준다네요. 중국인은 잡혀서 중국가서 죽을일은 없는데도 안가겠다고 떼쓰고 데모하고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고맙다 2010-02-22 12:29:05
    내 "아내는 탈북자였다"글을 실감있게 보았습니다.일부 나쁜 조선족도 있지만 그래도 탈북자들은 중국을 통하여 크나적으나 방조를 받고 죽음의 순간을 모면하고 한국으로 올수 있었다는 사실은 부정할수 없습니다.다음호가 기대되며 이글을 통하여 지금 이순간도 죽음의 사선을 헤메이는 우리 동포형제들을 생각하게되며 무지막지한 공산당의 정책에 대해 다시한번 경악을 금치못하고 있습니다.그래서 북한과 중국은 "차부둬""이양이모"이며 세계의 규탄을 받는것 같습니다.탈북여성을 도와준 강호님 감사합니다.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강호 2010-02-22 14:55:44
    제 아내를 지켰을 뿐인데, 많이 부족한 제글을 읽어주시고 소중한 댓글을 달아주신 고맙다님, 참으로 제가 고맙습니다. 세상에는 아직까지도 나쁜 사람보다는 좋은 사람이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족도예외일수가 없겠죠. 제가 이글을 쓰게 된 동기는,적지않은 탈북자들이 중국에서 겪으셨던 가슴아픈 사연들을 탈북자 전체의 일인양 떠드는것은 현재, 중국에 머물고 있거나, 앞으로 북한 이탈을 결심할 사람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되였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미 한국 입국에 성공했으니 다른사람이야 오던지 말던지, 이것이 한국에 입국한 일부 탈북자들의 심리 상태라고나 할까요?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purrm 2010-02-23 10:18:47
    Gnu 님에게 답

    북에서도 오빠라고 부릅니다
    남에서 오빠라고 부른 것은 최신 유행이지만

    북 여자들은 애교가 많아 그렇게 친밀감을 나타내는 말로 오빠라고 부릅니다
    전에 6.25에 참전하였던 우리 사촌형은 패잔병이 되어 남으로 탈출하다가
    북 여군들은 만났는데 권통을 들이대며

    " 오빠 손드시라요!"

    하더랍니다
    손들고 앞서 가다가 두 사람이 철길에서 양쪽으로 각각 뒹굴며 피했는데

    총을 쏘지 못하더랍니다.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 자양 2010-02-23 19:24:10
    진짜로 중국의 현실이 그렇게도 험악한가요?죄 없는사람을 함부로구타하고 물건도 증거없이뺏고 거긴 법도 없나요???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그게요 2010-02-23 20:55:17
    중국의 현실이 험악하다고 하기보다는 탈북자 사태가 생겨나면서 법에 대하여 거의 무식한 농촌 사람들이라고 업수이 보고 공안의 일부 사람들이 저질렀던 짓들이죠.아직 한국하고 비교는 안되겠지만 문화수준이 높은 도시 주민들한테는 아무짓이나 마음대로 못하더라구요.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사도 2010-02-24 14:28:38
    당시 상황들을 엿볼수 있게된 좋은 글이입니다.
    좋은 글에 아쉬음을 가지고 감사히 보고갑니다.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댓글입력
로그인   회원가입
이전글
개정일이횽~~생일빵 제대로 당하네..ㅋㅋ
다음글
내 아내는 탈북자였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