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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내는 탈북자였다2
Korea, Republic o 강호 1 510 2010-02-16 18:37:08
도시로의 이주

99년 봄부터 북한의 식량난이 더욱더 심해지면서 또다시 연선 마을들엔 탈북자 수가 늘어났다. 이전에는 이삼십 대가 그 주류를 이루었다면 이젠 7곱살 먹은 애로부터 시작하여 늙은이에 이르기까지 식량 사정이 극도로 어려운 사람들은 다 넘어오는가 싶을 정도다. 그만큼 북한의 힘든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당시 탈북자들을 통하여 들은 바에 의하면 북에는 굶어죽는 사람이 부지기수란다. 일일이 관을 마련할 수가 없어서 가마니 같은 것에 시체를 싸서 매장할 정도라고 했으니.....

3월의 어느 날 아침, 아침상을 차려놓고 식사를 하려는데 불현듯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그때 마침 화장실에 나갔던 그녀는 군인들한테 쫓기는 마을의 탈북자들과 맜다들게 되었고, 쫓아오는 군인들을 보고 놀란 나머지 무의식중에 도망가는 다른 탈북자들과 함께 무작정 뛰었다. 결국 얼마를 못가서 논밭에서 포위망에 든 그녀를 비롯한 탈북자들은 전부 잡혔고, 그날 우리 마을에서만 십여 명이나 되는 탈북자들이 변방 대 차에 실려서 끌려갔다. 그녀가 잡혔다는 것을 뒤늦게야 알게 된 나는 자전거를 타고 향 소재지에 있는 변방부대에 가서 간사였던 친구를 찾아보았지만 그때 그는 이미 전근가고 없었다. 다른 간부들을 찾아서 사정을 해보아도 아무 소용이 없다. 일시 다발적으로 여러 마을들을 습격하다 보니 그날 오전에만 수십 명의 탈북자가 잡혔었고 변방 짬에는 그들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하여 벌써 현성에 있는 변방지대로 이송을 하였다고 한다. 변방지대에 이송 되였으니 어쩔 수없이 중조 세관을 통하여 북송될 것은 자명한 일이였다. 결국 그녀가 북한에서 하루빨리 풀려나서 돌아오기만 기다리는 수밖에는 별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도강으로 다니는 탈북자를 통하여 그녀가 잡혔다는 소식을 무산에 있는 그녀 가족에 알렸고, 그들은 내가 보내준 돈과 그녀가 몸에 지니고 있던 돈으로 해당기관과 사업하여 다행이도 쉽게 풀려났고, 얼마 후 또다시 강을 넘어서 중국에 들어왔다. 당시 그녀는 만약에 있을 상황에 대비한다며 한국 신사분이 주었던 8백 원을 미화로 바꾼 후 비닐에 작게 말아서 항시 몸에 간직하고 있었는데 북송전날 몰래 삼켰었다고 한다. 북한에 북송된 후 기회를 보아 배변으로 나온 돈을 면담을 왔던 언니에게 건넬 수가 있었고, 그녀가 빨리 풀려나는데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그 일이 있은 후에도 변방대나 공안 기관의 단속은 끝날 줄 모르고 점점 더 기세 사나왔다. 간혹 단속이 되었다가도 군관들에게 몇 천 원씩 현금을 주고 현장에서 구출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일 년 농사 수입이 인민폐 만원도 될 가 말 가 했던 당시 엄청난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가 아마 늦가을쯤으로 생각된다. 더는 이대로 연선에서 살수가 없다고 생각한 나는 그녀와 토의하고 가을걷이가 끝나자 집에 있던 경운기에 쌀 몇 자루와 필요한 물건들을 싣고 이른 새벽에 연길로 떠났다. 그날은 날씨도 엄청 매서웠다. 추운 날씨 때문인지 도로에 설치된 탈북자 단속초소들은 텅텅 비어 있었고, 다행이도 무사통과를 할 수가 있었다. 위험 구간들을 지나서 투도시내에 진입하여 길거리 식당 옆에 차를 멈추고 식사를 하고 나오니 웬걸 경운기가 시동이 안 걸린다. 다행이 식당 옆이라 잠깐씩이라도 들어가 몸을 녹일 수 있으니 망정이지 얼어 죽을 것만 같았다. 한 시간 정도를 애쓴 끝에 수리가 끝나서 다시 출발할 수가 있었고, 거의 10여 시간을 넘게 달려서야 저녁 늦게 연길에 도착 하여 누님 네 집에 행장을 풀었고, 우리 두 사람의 몸은 얼대로 얼어서 거의 동태가 되기 직전 이였다. 그 후 우리는 누님 네 집에서 며칠간 신세를 지다가 부근에 자그마한 세집을 얻어서 살림을 시작하였다.


연길에서

연길은 30여만 명이 모여서 사는 조선족들의 수부 도시이다. 그만큼 우리가 살던 시골보다는 모든 면에서 활력이 넘쳤다. 여기저기 상가들이 즐비하고 특히 노래방이나 안마방은 골목마다 있을 정도다. 인구가 많은 만큼, 시골에서처럼 한밤중 개 짖는 소리와 공안 차량들에 더 이상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아도 되었고, 더욱이는 밖에서 잠을 자지 않아도 되었다. 그녀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서는 길을 가다가 경찰을 마주쳐도 두렵지가 않단다. 탈북자 단속 때문에 항시 신경을 곤두세우고 살아야 했던 시골 생활에 비하여 우리의 연길 생활은 정말로 천국이 따로 없을 정도였다. 우리는 활력이 넘치는 2000년의 새해를 연길에서 시작하였다.

하지만 공안의 단속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대신 시골보다 몇 갑절 들어가는 생계비는 가득이나 형편이 어려웠던 우리에게 치명적 이였다. 하루라도 빨리 돈을 벌어야만 했고, 급한 대로 얼마동안은 매형이 운전하는 여객버스에서 차장으로 일할 수 있었다. 아침이면 연길 서 시장에서 팔도 방향으로 가는 손님들을 목이 터져라 불러서 태우고 출발하면 종착역까지 가는데 1시간가량이 소요된다. 다시 돌아올 때도 같은 방법으로 연길방향으로 오는 사람을 태우고 서 시장까지 돌아온다. 꼭 같은 일을 하루에 5~6번 정도 반복 하고나면 목이 아프고 기운이 하나도 없지만 모든 것을 나만 믿고 따라주는 그녀를 생각하면 몸은 힘들어도 마음만은 기뻤다.

그러나, 그런 기쁨도 잠깐, 어느 날 이른 아침, 습관대로 자리에서 일어나서 집에서 20여m 떨어진 공중화장실에 갔다가 돌아와 세수를 하고 있는데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엉겁결에 문을 열고 보니 형사경찰이 서있다. 가슴이 섬뜩한 순간이다. 한쪽에선 탈북자인 그녀가 아직도 꿈속을 헤매고 있다, 침착해야 했다. { 무슨 일 때문에 그러냐고 } 중국어로 묻자 공작 증을 꺼내 보이던 경찰관이 이번엔 나의 신분증을 보여 달란다. 내가 옷걸이에 걸려있는 웃옷 주머니에서 신분증을 찾아서 보여주자 누워있는 저 여인은 누군가고 물으며 그녀의 신분증도 보여 달란다. 당황함을 보여서는 절대 안 된다. 내가 나의 아내라고 말하며, 한국 수속 때문에 호적부를 비롯한 그녀의 모든 증명서류들이 여행사에 가 있다고 그럴듯하게 꾸며대자 시골에서 왔으면 될수록 빨리 짠쭈쩡 ( 임시거주 증 ) 을 만들라며, 별다른 말이 없다. 그리고 요즘 사천 쪽에서 나온 한족들이 부근 민가에 들어가 도둑질 하는 일이 많은데 외출할 때 문 단속을 잘하란다. 오늘 우리 집에 온 것도 화장실이 급하여 세수도 못하고 나갔던 내 모습이 사천의 한족같이 수상히 보여서 신분 확인 차 따라온 것이라며 웃는다. 경찰이 나간 후에도 그녀는 집에서 어떤 일이 벌어진지도 모르고 잘만 자고 있다. 아침 식사를 하면서 새벽에 있었던 일을 말해주니 얼굴이 백지장같이 변하면서 {이젠 경찰의 단속 같은 것은 걱정 안 해도 될 것이라 기뻐했는데 그것도 아니구나,} 하면서 무척이나 놀랜다. 나는 내가 일을 나간 후에는 누군가 찾아와서 문을 두드려도 절대 열어주지 말라고 신신당부 하면서 오늘일은 나 때문에 생긴 일이니 앞으로 너무 걱정 말라고 그녀를 위안해 주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나는 시골에 있는 친구 동생의 신분증을 빌려 가지고 지역 파출소에 가서 그녀의 임시거주 증을 만들 수 가 있었다.

그렇게 3개월간 연길에서 생활을 해보니 수입보다는 지출이 많았다. 누님 네도 영업이 잘 안 되였던지 버스를 다른 사람한테 팔았다. 그나마 생기던 수입원마저도 끊긴 상황이다. 당분간은 시골에서 가지고 들어온 돈으로 생계를 해결할 수 있으나 장구지책은 아니다. 나는 체면불구하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찾아오라며 명함 장을 주셨던 한국 사장님을 찾아가서 도움을 청하기로 하였다.


첫 번째 시도

참으로 고마우신 신사분의 배려로 나는 그분이 경영하는 회사에 취직할 수가 있었다. 한중 합자 침직 회사를 운영하시는 사장님은 혈육들이 모두 북한에 있는 관계로 탈북자 아내와 살고 있는 나를 특별히 배려해 주셨고, 나는 그곳에서 기계를 다루는 요령을 습득하여 기술자가 되었다, 손바느질 일감이 많은 침직 회사라 사장님은 직원들한테 말하여 아내한테도 일감을 주셨다. 덕분에 집에서 그녀가 바느질로 버는 수입은 거의 매달 오백 원 정도, 나의 노임 1500원을 합치면 우리 두 사람이 연길에서 살아가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렇게 우리는 우연으로 만난 사장님의 배려 속에서 몇 년 동안은 돈 걱정 없이 행복하게 지낼 수가 있었고, 2001년 초여름, 우리한테는 사랑하는 아들도 태여 났다.

무럭무럭 자라나는 아들을 볼 때면 가정의 소중함과 함께 행복을 느끼면서도 가끔가다 들려오는 탈북자들의 북송 소식은 항상 내 마음속 한구석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것은 탈북자인 아내가 혹시라도 경찰에 단속 되여 북송되는 경우 아들한테 상처로 돌아올 여러 가지 가능성들이 환상이 되어 머릿속을 복잡하게 하군 했기 때문 이였다. 많은 고심 끝에 나는 아내를 한국에 보내기로 결심했다. 대한민국에 가서 국적을 취득하여 탈북자가 아닌 합법적인 사람으로 당당히 아들 곁을 지켜줄 수 있는 그런 엄마가 되게 하고 싶어서였다.

2003년 7월 나는 알고 지내던 교회 전도사님의 소개로 한국 입국에 성공하고 브로커 일을 하다는 한 철호 라는 사람을 만났고, 북경주재 한국 영사관에 안전하게 진입 시켜준다는 그를 믿고 아내를 북경에 들여보냈다. 하지만 10여일이 지나도록 들려오는 소식은 몇 번 정도 진입을 시도하려고 영사관 주변까지 갔지만 경비가 삼엄하여 돌아서 군 했다는 말뿐이다. 느낌이 썩 좋지 않음을 직감한 나는 아내한테 {돌아와 다른 방법을 찾자.}고 권유했다. 하지만 아내는 이미 떠난 걸음이니 좀만 더 기다려 보잔다. 며칠 뒤, 아내와의 전화연계가 안 된다. 혹여 진입에 성공하여 연계가 끊긴 것이라면 얼마나 좋으랴. 전도사님한테 물어보니 자기도 연계가 안 된다며, 걱정 되여 죽을 지경이란다. 좋은 소식이 오기를 고대하며 기다리는 수밖에는 어쩔 도리가 없다. 그로부터 며칠 뒤, 오전 일을 마치고 피곤하여 잠깐 누웠는데 소르르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북한으로 가는 그녀를 바래준다며 택시를 타고 연선으로 나가고 있는데 소변이 마려워 차를 세웠다, 택시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리던 순간 나는 눈에 들어온 광경에 놀라 소리를 질렀다. "승훈이 엄마야~ ~, 빨리 내려서 저기 좀 봐, 하늘에 용들이 있어," 남쪽하늘 뭉게구름들 속에서 형태가 분명한 예닐곱 마리의 청용들이 서로 뒤엉켜서 타래 치며 싸우고 있었다. 그처럼 선명하게 용들이 싸우는 모습을 본다는 것이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구경을 마치고 다시 출발하려는데 이번엔 용들이 택시 바로 앞까지 내려와 우리의 갈 길을 막아선다, 택시는 아무리 가려고 해도 제자리에서 뱅뱅 맴돌 뿐 도저히 앞으로 나갈 줄 모른다.

한참을 꿈속에서 헤매던 나는 요란하게 울리는 핸드폰 벨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여났다. 나의 온몸은 땀에 흥건히 젖어있었다. 전화기를 열어보니 모를 번호다. "여보세요?" 하는 나의 첫마디에 "쌘성, 칭원? "으로 시작된 그쪽 전화 내용은 대략 이렇다. x x x 가 네 씨펄이{와이프} 맞냐? 네 와이프를 비롯한 탈북자 16명이 중-몽 국경을 넘다가 내몽고 알 랜 이란 곳에서 전원이 변방부대에 잡혔고 지금 변방 대 구치소에 감금 되었다, 그런데 네 씨펄이 탈북자임을 극구 부인하고 있다. 만약 네 와이프가 중국 사람이 틀림없다면 신분을 증명할 수 있게 호적등본과 신분증 등본을 팩스로 넣어 달란다, 중국국적 소유자임이 증명된다면 어느 정도 벌금만 내면 구출할 수 있다며 팩스 번호를 알려주고는 전화를 끊는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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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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