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내는 탈북자였다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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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에 가다 그녀는 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을까? 참으로 기막히고 답답할 뿐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탈북자임을 인정하지 말고 중국인이라고 우기라고 시켜준 내 말을 그녀가 따라준 것이다.} 그녀를 구출할 수 있는 방법이라도 찾아볼 시간을 벌수 있는 현실이 오히려 고마울 뿐이다. 나는 그녀의 신분증명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급할수록 침착해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누구의 신분을 빌려야지 공안들을 믿을 수 있게 할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이때 다시 울리는 핸드폰 벨소리는 내 사색을 중단시켰다. "승훈이 아빰까?" 그녀의 목소리다. 북경에 있을 때 돌아서라는 내 말만 들었더라도 오늘 같은 일은 생기지 않았을 거라며 잠시나마 그녀를 원망하던 내 마음과는 달리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는 그저 반갑기만 하다. "앓지는 않았씀까? . . . . 속 많이 태워드려서 정말 미안 함다." 휴~우, 미안한줄 알면 잡히지나 말던가. 그녀는 군인들한테 사정을 하여 통화를 하게 되었다면서 일의 자초지종을 설명한다. 영사관 진입을 결국 포기한 브로커가 몽고 국경을 넘는다며 길잡이를 해줄 조선족 노인네 한분을 데려오더니 인원을 두 조로 나누고 선발 조를 몽고에 보냈단다. 몽고 초원에 도착한 선발 조는 노인네가 이끄는 대로 초원에서 이리저리 헤매다가 결국 양이나 말들이 멀리 도망가지 못하도록 설치한 목장용 철조망 십여 개를 넘고는 국경을 넘어선 것으로 착각하고 쉬고 있다가 이를 수상히 여긴 초목 민에 의해 변방부대에 신고 되여 잡히게 되었고, 북경에서 선발조의 소식만 애타게 기다리던 그녀를 포함한 나머지 사람들은 몽고 변방대의 연락을 받은 북경 공안에 단속 되여 몽고까지 이송 되었단다. 그녀는 울먹이면서 승훈이 아빠가 시켜 준대로 임시거주 증에 있는 이름을 대고 중국인이라고 우기고 있다며 빨리 와서 구해달란다. 그렇지,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나는 부랴부랴 친구한테 전화를 했다. 고마운 친구와 그 동생의 도움으로 호적 등본과 신분증 등본을 손에 쥔 나는 부랴부랴 우체국에 달려가 팩스로 몽고공안에 부쳐주었고, 그로부터 두 시간 뒤, 다시 울리는 핸드폰을 받아보니, 당신 씨펄{와이프}의 신분이 증명 되였으니 벌금 1만 5천원을 가지고 와서 데려가란다.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뱉어진다. 구출에 실패했을 경우 아들애가 받을 상처 때문에 엄청난 고민을 했던 나에게 참 으로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아들애가 다니는 유치원에 전화하여 며칠 동안만 맡아달라고 부탁한 후 몽고에 들어갈 준비를 하였다. 먼저 친구들에게 부탁하여 부족한 돈을 마련하였고, 기차역에 가서 북경 행 기차표 두 장을 샀다. 그것은 이번 루트를 소개했던 자신이 미안하다며 함께 몽고까지 가주겠다고 선뜻이 나선 교회 전도사님의 부탁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다음날 북경에 도착한 우리는 몽고 우멍까지 가는 기차표를 마련해 놓고는 일의 상황을 좀 더 파악해볼 심산으로 중국공안에 체포된 브로커 남편을 구출한다며 한국에서 들어온 한 철호 씨의 와이프를 만나러 그녀가 묵고 있는 민박으로 갔다. 한 철호 씨의 와이프는 세 살 난 아들애를 데리고 있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공안 측에서 브로커인 남편은 한국적을 취득한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탈북자들과는 다른 지역에 감금하고 있으며 석방을 시키려면 많은 돈을 준비해야 한단다. 그녀는 급하게 돈이 필요 한만큼 자기가 직접 한국행을 바라는 탈북자를 모집한다며 나보고 몽고에서 와이프를 구출하면 이번엔 자기를 믿고 한국에 보내 보란다. 어이가 없다. 당신도 원래는 같은 탈북자로서 16명이나 되는 탈북자들이 당신 남편의 잘못된 판단으로 현재 북송될 위기에 처해있는 형편에서 남편을 구하겠다고 또다시 탈북자들을 상대로 승산도 없는 모험을 하겠다는 그녀가 왠지 원망스럽기까지 하다. 고마운 간수소장님 기차로 우멍에 도착한 우리는 또다시 택시를 잡아타고 그녀가 구금되어 있는 얼랜을 향하여 떠났다. 가없이 펼쳐진 몽고초원은 참으로 넓기도 했다. 포장이 안 된 도로여서인지 택시는 꽁무니에 시뿌연 먼지를 일구며 다섯 시간을 달려서야 밤늦게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다음날오전, 나는 가지고 간 돈 중에서 4천 2백 원만 꺼 내여 지갑에 넣고 나머지는 전도사님께 맡긴후 택시를 잡아타고 변방부대에 갔다. 변방부대에 도착하여 찾아온 이유를 말하자 한 군인이 간수소장 사무실로 나를 안내한다. 소장 사무실은 감방 바로 옆에 위치해 있었는데 마당에서는 열다섯 정도 돼 보이는 아이가 자기 동생인 듯한 대여섯 살짜리 아이와 함께 뛰 여 놀고 있었다. 생김으로 보아 당지 애들은 아닌 것 같았다. 군인에게 물으니 당신 씨펄이랑 같이 잡혀 들어온 애들인데 엄마는 감방 안에 있고 애들은 불쌍해서 밖에서 활동을 시킨다고 했다. 북송 후 발생할 무시무시한 일들에 대하여서는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애들은 그저 신나게만 놀고 있다. 그때, 감방 철창사이로 몇 명의 아주머니들이 얼굴을 드러내며 나를 부른다. "아저씨, 누구 데리러 왔슴까? " 내가 와이프의 이름을 대자 승훈이 엄마는 정말 좋겠다며 이곳에서 나가면 자기들 집에 소식 좀 전해달란다. 간수소장 사무실에는 통역하는 아가씨를 비롯하여 몇 명의 군인들이 있었다. 그중 몸집 좋은 사람에게 나를 데리고 간 경비병은 이분이 간수소장이라고 일러주고는 나가 버린다. 간단한 인사를 끝내고 어딘가 전화를 하던 소장은 특별히 배려하는 것이라며 먼저 와이프 얼굴이라도 보라고 사람을 시켜서 그녀를 데려왔다. 마음고생이 심했던지 그녀는 얼굴이 많이 수척해 있었다. 와이프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어깨에 몇 개의 별을 박은 변방부대 대대장이라는 사람이 들어왔다. 간수소장은 비교도 안될 만큼 뚱뚱한 사람이다. 와이프를 감방에 돌려보내고 나서 대대장은 가지고온 벌금을 내놓으란다. 내가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당신들이 요구하는 액수만큼 준비를 못했다며 지갑을 털어 4200원을 건네자 대대장은 자기들이 요구한 액수에서 단 한 푼이라도 골면 사람을 석방할 수 없다며 내가 메고 간 배낭에 돈을 쑤셔 넣더니 밖에다 홱 던져버리며 돌아가란다. 사정을 해봐도 아무 쓸모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여관에 있는 전도사님한테 가서 모자라는 부분을 가지고 와야겠다는 생각에 사무실을 나와서 한참을 걷고 있는데 뒤에서 간수소장이 급하게 쫓아오며 부른다. {아무리 돈이 부족하다고 해도 그냥 돌아가면 와이프는 어떻게 할 것이냐? 좀 더 사정이라도 해 봤어야지,} 하며 나를 나무라던 소장은 자기가 들어가 대대장과 말해보겠다며 돈을 달랜다. 한참을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놀랍게도 소장이 와이프를 데리고 내 앞에 나타났다. {당신 씨펄이 탈북자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당신이 능력이 좋아 신분을 증명할 수 있게 서류들을 보내온 만큼 나도 도와주고 싶다. 두 사람 사이에 귀여운 아이도 있다는데 돌아가면 다시는 이런 위험한 시도는 하지 말고 꼭 행복하게 잘 살아라 } 며 소장은 한족인 대대장과 달리 자기는 몽고족인데 조선족과 몽고족은 예로부터 우애가 깊은 사이라며 갈 때 차비에 보태라고 2백 원을 내손에 쥐여 준다. 앞뒤 집 사이도 서로 몰라라 하며 살아가는 지금 세월에 예전에 가까웠던 민족이라며 자기 일처럼 발 벗고 도움을 주는 이분이 나는 너무나 고마웠다. 고마움의 표시로 나는 그분에게 드릴 담배 몇 보루와 마당에서 뛰어놀던 북한 아이들에게 줄 식품을 샀다. 와이프만 구출하여 데리고 가기엔 썩 마음이 편치 않았던 나는 소장에게 담배를 건네며 부식품만은 꼭 내 손으로 북한 애들에게 전해주고 싶다고 사정을 했다. 한국 영사를 만나다. 그렇게 나는 인민폐 4천원으로 그녀를 구출하고 전도사님이랑 연길로 돌아왔다. 하지만 집에 와서도 몽골 변방부대 구류장 마당에서 뛰놀던 철부지 애들과 감방 창가에 매달려 부러운 듯 애처로운 눈길로 바라보던 탈북자들 모습이 도무지 머릿속에서 잊혀 지지가 않는다. 결국 나는 북경에 있는 한국 영사관에 전화를 하기로 했다. 오 영사라는 분과 통화를 하면서 내몽고 변방부대에 감금되어 있는 15명 탈북자들의 사연을 설명하며 구출해줄 것을 요청했고, 영사는 자기들도 이미 알고 있는 일로써 노력은 해 보았으나 외교문제가 걸린 사안이라서 북송을 면하기 어려울 것 같단다. 그러면서 그는 당신은 와이프를 구출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왜 참견을 하냐고 덧붙인다. 한국 기도로 북송되면 처형까지도 받을 수 있는 북한의 현실을 뻔히 알면서도 중국과의 외교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영사의 목소리가 얄밉기 그지없다. 그 후 나는 며칠 동안 하루에도 몇 번씩 영사관에 전화를 해서는 영사를 귀찮게 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의 전화를 받던 영사가 {선생님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한번 만나보고 싶단다.} 와이프 구출에 성공한 나였지만 몽골변방부대에서 초조하게 북송될 날만을 기다리고 있을 탈북자들에게 한줄기 도움이라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다음날 나는 북경으로 떠났다. 북경에 도착하여 택시를 탔을 때, 한국과 북한을 동일 국가로 생각했던 택시기사가 한국영사관으로 가달라는 나를 북한 영사관 앞에 내려놓아 당황했던 기억이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하다. 아무튼 한국 영사관 앞에 도착하여 영사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정문을 바라보니 참으로 가관이다. 영사관 정문을 지키는 중국 보안대에서는 골칫거리인 탈북자들의 영사관 진입을 막아볼 심산으로 정문에 십여 미터 정도의 갈지자 모양의 오불꼬불한 통로를 만들어서 영사관에 일보러 들어가는 사람들이 그곳을 통과 하면서 신분확인을 받게끔 만들었고, 영사관 담 벽 위에는 얼기설기 철조망이 설치 되여 있었다. 한참 후 사십대 중반의 건장한 사나이가 영사관 작은 철문을 열고 나한테로 왔다. 오영사라며 자기소개를 한 그는 나를 데리고 영사관 옆에 있는 인공 늪으로 간다. 그곳에서 거닐며 나는 와이프를 구출하게 된 경위와 몽고에 남아있는 탈북자들이 북송될 경우 일반 탈북자와는 비교도 안 될 엄벌을 받는다는 것 들을 루루이 설명하면서, 집을 떠나기 전 와이프가 영사님 앞으로 쓴 편지를 전했다. 처음에 영사님은 돈 봉투를 건네는 줄 알고 받기를 거부했다. 내가 봉투에서 속지를 꺼내 보이며 [이번에 구출된 나의 와이프가 몽고에 남아있는 탈북자들을 대신하여 쓴 영사님에게 도움을 청하는 편지입니다. ] 고 말해서야 영사는 편지를 받아서 읽어본다. 세장이나 되는 편지를 다 읽은 영사는 마치 감방에서 고생하고 있는 탈북자들을 눈앞에 보는 것만 같다며 가슴이 아프단다. 하지만 브로커는 한국국적 취득자인 만큼 영사관에서 나서서 북송되지 않게 해줄 수 있으나 탈북자들은 중국정부에서 난민으로 인정을 하지 않는 한 영사관에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부분이 아니란다. 그러면서 그는 나에게 탈북자들에게 집단난민촌을 만들어 주거나, 영주권을 부여하는 문제들을 중국정부와 협의 중에 있는데 늦어도 2년 안으로는 일이 성사될 것이라며 다시는 와이프를 한국에 보내지 말란다. 영사님의 말대로 탈북자들이 지금처럼 외국공관에 진입하지 않아도 되고, 중국 공안에 단속 받을 필요도 없이 중국 땅에서 활개 치며 살 수 있는 그런 날이 과연 올까? 몽고에 있는 탈북자들의 북송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도무지 없는 것일까? 등, 등. 기차를 타고 돌아오는 내내 머릿속은 온통 그런 생각뿐 이였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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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디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