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 북한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nk.조선에서 퍼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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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북한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곽대중 Dailynk.com 논설위원 도올 김용옥이 만든 10부작 다큐멘터리 ‘한국독립운동사’가 지난 19일 막을 내렸다. EBS에서 해방 60주년 특집으로 방영한 이 다큐멘터리는 도올이 연출, 구성, 출연, 편집, 내래이션까지 1인 5역을 하며 만들었다 한다. 방영 전 기자간담회에서 도올은 “거짓말로 장면을 만들어낸 것은 단 한 커트도 없다”고 했는데,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다룬 제9부 ‘올기강은 흐른다’ 편을 보면 뚜렷한 거짓이 여러 군데 눈에 띈다. 그 결정판이 바로 ‘구호나무’다. 다큐멘터리의 후반부에 화면은 북한의 구호나무를 보여준다. 도올은 ‘김일성부대가 나무에 쓴 구호’라고 자막에 쓰면서 “후대인 1961년에, 19그루가 발견되었으므로 날조일수는 없다”라고 친절한 해설을 붙여놓았다. 도올이 북한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 ‘초강력 먹’으로 쓴 글씨? 북한에는 구호나무라는 것이 있다. 내용인즉, 김일성이 항일빨치산 활동을 하던 시기에 부대원들이 전국 방방곡곡에 항일투쟁을 선동하는 ‘구호문헌(口號文獻)’을 새겨놓았다는 것이다. 나무껍질을 벗기고 드러난 하얀 속살에 칼로 새기거나 붓으로 써넣는 방식이었다는데, 이렇게 구호문헌이 새겨진 나무를 구호나무라 한다. 북한은 이것을 김일성 항일투쟁의 물증(物證)으로 내세우고 있다. 그것이 처음 발견된 것은 도올이 말한 대로 1961년으로, 백두산 청봉지역에서 19그루가 발견되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해방 이후 15년 이상 발견되지 않던 것이 어떻게 해서 갑자기 발견된 것일까? 그리고 껍질을 벗겨낸 그 나무는 15년 동안 자라지 않았단 말인가? 더구나 백두산의 눈보라와 비바람을 맞으면서도 15년 동안 지워지지 않은 그 붓글씨는 대체 무슨 ‘초강력 먹’으로 썼단 말인가? 하여간 그 때는 구호나무가 별다른 조명을 받지 못했다. 그런데 황당한 일은 그로부터 거의 30년 후에 발생한다. 1987년 김정일의 45회 생일을 맞아 북한은 ‘구호나무 발굴사업’을 대대적으로 시작한다. 그렇게 해서 발견된 구호나무가 1만 2000여 점. 그 중 200점은 김정일을 찬양하는 글귀이다. 김정일을 ‘백두성’(白頭星) ‘광명성’(光明星)이라고 부르면서 그의 탄생을 축하하고, ‘김일성장군의 후계’라는 표현까지 등장하는데 이쯤 되면 분명한 냄새가 느껴지지 않나? ◆ 그 많은 구호나무가 왜 남한에는 없을까? 구호나무의 비(非)과학성은 굳이 말로 하기 귀찮을 정도이다. 앞서 말했듯 그렇게 오랜 시간, 40년이 넘도록 칼로 새긴 글씨는 그렇다 치더라도 붓으로 쓴 글씨가 지워지지 않았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을 모두 바보로 알고 저지르는 어처구니 없는 사기행각이다. 숙영(宿營)을 한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했다는 빨치산 전사들이 바쁜 항일투쟁의 와중에 몇 시간 동안 그런 글씨를 칼로 긁어대거나 붓과 벼루를 갖고 다니며 글씨를 썼다는 이야기는 코미디에 가깝다. 당시 김일성 부대원은 많아야 몇백 명인데, 그 중 국내에 파견된 인원은 한두 명 단위의 정찰조에 불과했다. 그들이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발견된 것만 1만 2천 개나 되는 구호나무를 썼다고? 정찰조가 아니라 조각가나 서예가를 보냈던 것일까? 게다가 북한 전역 여기저기, 심지어는 깊숙한 내륙 평양에서까지 발견되는 구호나무는 왜 남쪽에서는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던 것일까? 김일성의 항일빨치산들은 해방 후 조국이 분단될 것을 알고 미래의 38선 이북지역에서만 구호나무 작업을 했던 것일까? 한총련은 ‘민족공조’의 차원에서 ‘남한내 구호나무 찾기 운동’을 할 의향은 없는지 묻고 싶다. 북한에서 1만 2000여 점이나 나왔으니 남한에서 최소한 120점이라도 나와야 하지 않나? ◆ 구호나무 발상한 사람은 바보, 거기에 속는 사람은 더 바보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북한을 방문한 일본 식물학자에게 북한 당국이 50년 전에 새겨진 구호나무라고 보여주며 자랑한 적이 있는데, 나무의 수령이 40년 밖에 안 된다는 것을 식물학자가 지적해주었다고 한다. 이쯤 되면 더 이상 말해서 무엇 하겠나. ‘구호나무’라는 발상을 내놓고 그것을 조작해 만든 사람이 바보라면, 그런 말도 안 되는 조작에 속아주는 사람은 바보 중의 상(上)바보다. 김정일을 찬양하는 구호문헌은 맞춤법도 일제시대의 것이 아니어서 누가 봐도 조작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우상화 교육을 끊임없이 받아오는 북한 주민들마저도 “뭔가 이상하다”고 조용히 수군거리며 대부분 믿지 않는다고 하는데, 만능 엔터테이너를 자부하는 도올 선생이 “날조일 수는 없다”고 자막까지 새겨 넣으며 소개를 해주다니, 어처구니가 없다. 물론 도올은 ‘1961년에 최초 발견된 구호나무는 사실이지만 김정일 우상화 과정에서 과장된 것’이라고 변명을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도올이 이번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그만큼 준비를 안 했다는 말이다. 전 조선노동당 비서 황장엽은 이미 이에 대해 여러 차례 증언을 한 바 있다. 북한 주민들의 필독서로 ‘회상기’(回想記)라는 책이 있다. 김일성과 빨치산 투쟁을 함께했던 사람들이 과거를 회상하며 쓴 수기이다. 물론 기자들이 각색하여 써줬다고 한다. 그때 빨치산 투쟁 참가자들이 “나무껍질을 벗기고 ‘조선독립 만세!’라고 구호를 쓴 일이 있다”라고 언급했다는데, 그 후 발견된 것이 1961년의 구호나무라고 황장엽은 이야기한다. 도올은 자신의 다큐멘타리가 ‘단 1초도 거짓이 없다’는 이유로 “관련서적을 1,000권 이상 읽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런 초보적인 확인조차 안 해본 것이다. 남한에 있는 탈북자들에게만 물어봤어도 이러진 않았을 것이다. ▲ ‘김일성 회고록 읽어주기’인가? 구호나무 이외에도 확인절차 없이 북한의 주장을 그대로 옮겨놓은 대목들이 많다. 예컨대 도산 안창호 선생이 중국 지린(吉林)시에 강연회를 갔을 때 김일성이 전해준 쪽지를 읽고 놀라서 황급히 강연을 마무리했다는 일화를 도올은 그대로 전했다. 이 일화는 북한의 주장으로, 북한은 선전화까지 그려 주민들을 교육시키고 있다. 도올은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 실린 그 쪽지의 내용을 자막까지 실어 친절하게 전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 일화는 과장되었거나 말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 역사학자들과 북한문제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다. 당시 김일성은 도산 선생에게 ‘민족개조론’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질문을 하였는데, 질문내용을 보면 도산 선생이 강연을 갈 때마다 늘 듣던 것들이라 특별히 당황할 이유가 없었다. 그걸 갖고 김일성은 회고록에 “안창호는 조금 전까지 일사천리로 펼쳐나가던 강연을 성급하게 마무리 짓고 연탁 앞에서 황황히 물러섰다”고 써놓고 있다. 도산 선생의 뜻을 기리고 있는 ‘흥사단(興士團)’에서 도올이나 북한측에 항의를 해야 할 내용이 아닌가 싶다. 도올은 도산 선생과 김일성의 일화를 전하면서 김일성 회고록의 내용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채 그대로 읽고, 김일성과 기독교와의 인연을 강조하는 대목에서 김일성 회고록에 나온 강반석(김일성의 어머니)의 말을 또 한번 그대로 읊어댄다. 그리고 김일성 회고록에 나오는 김일성 출신 학교와 각종 회의, 전투지역 등을 돌아다니면서 그것을 상세히 설명해준다. 이쯤 되면 도올이 객관적 검증을 거치는 다큐멘터리를 만들려는 것인지 ‘김일성 회고록 읽어주기’를 하겠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 도올, 북한에 대한 무지에서 벗어나야 도올의 말대로 김일성의 항일투쟁 역사는 북한에서는 과장되었고 남한에서는 폄훼 되었다. 그러나 사실 김일성의 항일투쟁 역사를 온전하게 이야기할 수 없는 이유는 남한에서 너무 폄훼 해서가 아니라 북한에서 너무 과장한 탓이 크다. 지나치게 과장한 것을 바로 잡다 보니 그 역작용으로 깎아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김일성 항일투쟁이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해방 이후 김일성의 과오가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특히 북한의 역사에서 그렇다. 북한이 민주화된 이후에는 구(舊) 정권에 대한 북한 주민들이 감정적 분노가 극에 달해, 상당히 오랜 시간 김일성의 항일투쟁 이야기도 꺼내놓지 못할 것이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자업자득이다. 도올이 진정으로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재조명하고자 했으면 이런 점을 고려했어야 하지 않을까? 도올은 기자간담회에서 “이념적으로 좌우를 얘기하기 이전에 사실은 사실로써 알고 무지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바로 도올에게 던지고 싶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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