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 진영의 거두 몽양 여운영 선생님을 이렇게 잘 모시고 있는데 북괴에선 우파 진영의 애국인사를 이렇게 모시고 있는지 궁금하군요.
공산당 놈들이 그렇게 할 리가 없겠죠. 우리는 애국자로 그대로 인정하는데 이 자들은 오로지 이용해 먹는데만 써먹죠. 역사도 모조리 왜곡해먹고... 북괴는 국가기록부 기록마저 다 거짓말로 써 놓았을 겁니다.
통일돼도 북괴의 기록은 믿을 수 없어요. 북괴의 기록은 잃어버린 거나 마찬가질겁니다. 개정일이 언제 어디를 가는 지도 모조리 거짓말로 해놓고 공개도 하지 않으니... 역사에 꼭 필요한 사료가 현대세계에도 남아 있지 않는 북괴는 참 불쌍합니다. 고려, 조선시대에도 모른 것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북괴는 모조지 거짓뿌렁이로만 해 놓았을테니...
제 정신이 있는건가? 여운영 선생이 개정일 장군님 있는 곳으로 가라고 했다고? 공산당에서의 위상으로 볼 때 여운영은 그야말로 빛나는 별이었다. 박헌영이나 김일성 정도는 여운영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그런데 개일성 장군님 김정숙 어머님께 모든 걸 바치라고 했다고... 아버지 이름이 아깝다. 북괴의 세뇌가 무섭긴 무섭다. 어찌 몽양이 개일성에 비하리~~
딸이 아버지를 욕되게 하는군요...몽양 여운형 선생은 일제시대와 해방직후를 통털어 우리 민족의 가장 대표적인 지도자이셨습니다...박헌영, 김일성이가 감히 비교나 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민족 최초의 사회민주주의자이셨던 여운형 선생께서 대통령이 되셨다면 우리나라는 지금의 북유럽이 부럽지 않은 최고의 선진북지국가가 되어 있었을 겁니다...
첫 결혼은 성분때문에 실패하고 청진 대학교수와 재혼했었는데~
청진에서 살 때 참 가난했다 큰아들이 기범이지~
아버지때문에 버림받아 죽어라 고생하고~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잘 했었었어~
처음에 북한에 넘어왓을 때 이들 4형제는 김일성의 저택에서 살았고 전쟁 때에는 폴란드에 가서 살면서 거기서 유학까지 했다.
그러다가 귀국해서 웬일인지 김일성이한테서 버림받아 이 형제들이 20년 죽게 고생하다가 70년대 말에 다시 김일성이가 불러들여 한자리씩 주었다.
이 아줌마는 수수하고 사람좋았는데~
경공업위원회 신발총국 국장을 했다.
맏얻니와 둘째언니 셋째, 남동생 서로 이복형제들이라고 한다.
남한과 해외등지에서 이들에게 기부한 돈을 놓고 심하게 다투군 했다.
김일성이까지 나서 말릴 정도라고 했다.
청진에서 살 때는 말도 잘 안하는 착한 아줌마였는데 나중에 처지가 바뀌어 다시 보니 많이 변하긴 했던데~
그래도 그만하면 나름 어렵던 때를 잊지않고 기억하고~ 서글서글했던 모습이 선하다.
이 아줌마를 여기에서 다시 보다니~ 기범이 엄마!~
저 할매도 속으로는 김일성에 대한 원망이 엄청 많을 건데 그냥 쑈를 하는거다.
강제이혼까지 당하면서 십 수년을 개고생했었는데~
1948년 20일 저녁 김구(73) 선생이 평양에 도착하자마자 김일성(37), 김두봉(59)을 만났지요. 이 자리에서 작은 소란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북괴의 실질적 지배자 스티코프(41)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김구가 나에게 이 자리에서 나가라고 호통을 쳤다. 그래서 나는 할 수 없이 뒷문으로 빠져나왔다.」
민족 문제에 외국인이 간섭하는 것을 김구 선생은 용납지 않았습니다.
결국 세계적 냉전구도의 최전선인 한반도에서 김구의 현실 정치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숩니다. 물론 북괴에선 김구 선생이 방북한 것을 위대한 개정일에게 아부하기 위해 왔다고 선전했겠죠.
스탈린이 1945년 9월 20일에 이미 북한 단독 정권 수립을 지시하고 미국 또한 남한에 대한 후견을 포기할 의사가 없는 상황에서 ‘남북 상호의 수정과 양보로써 건설되는 통일체’의 꿈은 거의 무망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강대국 정치의 틀이 이미 결정되었다고 하더라고 우리민족으로부터 어떠한 통일노력도 없었다고 한다면 우리 역사가 얼마나 부끄러운 역사가 되었을까 생각해 본다면 아무리 어렵더라도 옳은 길을 가야 한다는 그의 비장함은 오늘도 우리의 심금을 울립니다.
몽양 선생이 가족을 북괴에 보내려고 했던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위에 모니터에서 나오듯 위대한 대장군께서 계시는 곳으로 가라느니 이런 식으로 말했던 것은 절대 아닙니다. 당시 공산당계 위상은 몽양이 결코 밀리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나이로 보나 국제적 활동으로 보나.... 박헌영도 몽양에 비하면 애들 수준이었죠.
1947년에 암살당한 몽양 선생이 개일성에게 뭐가 아쉬워 개일성을 위대한 장군 어쩌고 했겠습니까? 1947년이면 당시 북괴와 대한민국도 만들어지지 않았을 때인데...
후에 개일성 일족이 북괴를 완전히 장악한 후 아무 것도 모르는 철없는 몽양 자식들에게 세뇌시켰겠지.
참고로 몽양은 박헌영이 23살, 개일성이 11살 때이던 1922년 이미 레닌과 트로츠키와 함께 놀던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좌파의 거두로서 몽양은 앞으로 만들어질 대한민국보다 북쪽에 만들어질 북괴를 자신의 뜻이 실현될 공간으로 본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당시 지식인들은 공산주의에 경도돼 있었거든요. 물론 결과는 지금의 북괴로 낙착될 예정이었지만....
몽양이 얼마나 좌파들에게 흠모의 대상인지 몰라도
수많은 어제 오늘의 몽양류들이 나름 출발의 뜻은 순수했을지 몰라도
다 부질없는 공상뿐인 이상적 공산주의자들일 뿐입니다.
똑똑한들 지식인이었던들 지금 21세기 오늘에 와서 내가 그들과 같이 있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모두 국가를 몰고 낭떠러지로 가려던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천안함 참여연대나 연평도 우리 훈련탓하는 송영길류나
여원구를 보며 뼈저리게 반성해야합니다.
북으로 자식들을 인도한 (가라고 했든지 말든지) ,
그래서 20년 가까이 청진에서 숙청 따돌림을 당하게 한
지금도 먹고 살만은 하겠지만 그 가문과 그 지식들의 배경을 입고
서울에서 거짓 연극 하지 않으며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편안하고
사회에 보람있는 큰일을 했을 자식들에게 지하에서 용서를 구하고 있을 겁니다.
서울의 아버지 묘앞에서 거짓 연극을 하며
속으로 울부짖었을 그녀의 마음속에서 반세기의 억장이 무너질 거짓세상이
얼마나 기가 막혔을지 ......
온통 사기와 거짓으로 얼룩진 김정일정치가 노약한 한 여자를 독립군의 후예라고 간판으로 삼고 김부자광고를 하고 있다니 참 어이없는 놀음 아닙니까.
김정이리가 만든 각본 맞습니다. 맞고요. 여할머니도 며칠동안 대본을 외우고 나와서 아버지묘앞에서 열시미 시를 읋고 있네요.
김정일 진짜 더러운 인간쓰레기네요. 북한주민이 할머니가 눈물 흘리고 있는거 보면 감동할거라고 생각하고 찍은 거 같은데 아니죠. 북한 주민 이제는 달라졌어요.
개보다 못한 정이리정치를 이제는 더 이상 보고만 있지 않을거라구요.
정으니를 후게자로 내세운다, 말도 안되는 소리죠. 정이리가 죽기전에 정이리가 망하는 세상 보여줘야죠.
저기 화면에 나오는 여성은 여원구 이군요.
2009년에 사망했지요.
저 여성은 무슨 십발총국장이 아니라..최고인민회의 부의장을 지내다가 죽기전에 조국전선 의장인가를 하였지요.
그리고 그의 언니 여연구가 원래 제일 똑독하여 죽기전까지 대남 사업부문에서 맹활약을했죠.
여연구는 1996년엔가 평양역앞에서 누군가를 마중인가 나갔다가 인민군 트럭에 치워서 사망했는데..
그 당시에도 대남기구인 조국전선 서기국장이었죠.
그리고 맏아들 여영구는 김일성과 출생연도가 같은 사람으로서 일본에 가서 대학 공부를 한 쟁쟁한 화학박사였지요.
그는 오래 전에 이승기가 연구한 비날론을 김일성은 국가의 상용생산지표로 핟자고
할때에 비날론은 염색이 안 되고 생산원가가 너무 들기 때문에 안된다고 반대 했다가 사상검토를 받던 중 자살 했다고 했죠.
그리고 네번째가 또 아들인데... 좀 모자라서 국가의 중책의 자리에서 사업을 못하죠.
그다음 마지막 딸로 여순구가 있는데... 이 여자가 바로 여운형의 배다른 딸입니다.
형제들 중에서도 좀 밀렸던거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여성만은 전쟁당시 유학도 유럽의 다른 나라에 나갔었고 ...
바로 북한의 신발공업 총국 기사장과 총국장도 지냈고... 퇴직당시인 1990년대 말에는 신발무역회사 사장까지 지냈는데...
웃기는 것은 그의 친척들이 남쪽에 있다고 하여 외국 출장을 안 내보내는 것이었습니다.
2000년대초 당시에는 형제들 중에서 이 여순구 혼자 남다시피 했는데... 집은 모란봉구역.....
나이가 들어 공직에서 물러나니... 집에 끼니를 끓일 쌀이 없어서 작은 콩꼬투리만한 노친네가 친구들의 손을 부여 잡고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고 합니다.
묘앞에서 정치 선전을 해대는 모습
과연 공산주의는 얼마나 못됬는지 알수 있읍니다.
중요한 건 그 명망 높은 집안도 공산주의아래선 단 한마디의 진실도 말못한다는거....
또한 내용을 떠나 얼굴이 슬픔에 잠기기는 하나 말하는 표정은
우러나오는 표정과 목소리까지는 지어낼 수 없는게 인간의 한계군요.
감사합니다.
공산당 놈들이 그렇게 할 리가 없겠죠. 우리는 애국자로 그대로 인정하는데 이 자들은 오로지 이용해 먹는데만 써먹죠. 역사도 모조리 왜곡해먹고... 북괴는 국가기록부 기록마저 다 거짓말로 써 놓았을 겁니다.
통일돼도 북괴의 기록은 믿을 수 없어요. 북괴의 기록은 잃어버린 거나 마찬가질겁니다. 개정일이 언제 어디를 가는 지도 모조리 거짓말로 해놓고 공개도 하지 않으니... 역사에 꼭 필요한 사료가 현대세계에도 남아 있지 않는 북괴는 참 불쌍합니다. 고려, 조선시대에도 모른 것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북괴는 모조지 거짓뿌렁이로만 해 놓았을테니...
한심한 북개 개좃놈들~~
60년대에 북한에서 혁명화대상이 돼서 청진에 내려와지냈죠!~
첫 결혼은 성분때문에 실패하고 청진 대학교수와 재혼했었는데~
청진에서 살 때 참 가난했다 큰아들이 기범이지~
아버지때문에 버림받아 죽어라 고생하고~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잘 했었었어~
처음에 북한에 넘어왓을 때 이들 4형제는 김일성의 저택에서 살았고 전쟁 때에는 폴란드에 가서 살면서 거기서 유학까지 했다.
그러다가 귀국해서 웬일인지 김일성이한테서 버림받아 이 형제들이 20년 죽게 고생하다가 70년대 말에 다시 김일성이가 불러들여 한자리씩 주었다.
이 아줌마는 수수하고 사람좋았는데~
경공업위원회 신발총국 국장을 했다.
맏얻니와 둘째언니 셋째, 남동생 서로 이복형제들이라고 한다.
남한과 해외등지에서 이들에게 기부한 돈을 놓고 심하게 다투군 했다.
김일성이까지 나서 말릴 정도라고 했다.
청진에서 살 때는 말도 잘 안하는 착한 아줌마였는데 나중에 처지가 바뀌어 다시 보니 많이 변하긴 했던데~
그래도 그만하면 나름 어렵던 때를 잊지않고 기억하고~ 서글서글했던 모습이 선하다.
이 아줌마를 여기에서 다시 보다니~ 기범이 엄마!~
저 할매도 속으로는 김일성에 대한 원망이 엄청 많을 건데 그냥 쑈를 하는거다.
강제이혼까지 당하면서 십 수년을 개고생했었는데~
여운형의 동생은 남쪽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쪽에와 사촌들도 만났지요
여원구씨를 어떻게 아시고 또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군요!~~
자세한 집사정을 좀 알고 있죠.
근데 여기서 자초지종 다 밝힐 수는 없고 본인들에게도 안좋고~
더 말해드릴 수는 없겠네요. 제가 그 아줌마를 본게 이제는 15년도 훌 쩍 넘었구~
지금은 할매지만~ㅋㅋ
맏이 여영구가 죽은 건 아는데?
그래도 아직 그 혈점들이 북한에 남아있을거 아닙니까?
북한에서 여운형의 자제들에 대한 대우가 나쁘지 않을 걸로 압니다.
모두 다 고위층에 있었고~
기분 나쁘겠지만 말이지
후일 그 자신도 북한에 들어올려구 했던것두 사실이구~
남한에서는 유명할지 몰라도 그 역시 김일성이한테 아부했던 한 사람이다.
김구도 역시 마찬가지구~
1948년 20일 저녁 김구(73) 선생이 평양에 도착하자마자 김일성(37), 김두봉(59)을 만났지요. 이 자리에서 작은 소란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북괴의 실질적 지배자 스티코프(41)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김구가 나에게 이 자리에서 나가라고 호통을 쳤다. 그래서 나는 할 수 없이 뒷문으로 빠져나왔다.」
민족 문제에 외국인이 간섭하는 것을 김구 선생은 용납지 않았습니다.
결국 세계적 냉전구도의 최전선인 한반도에서 김구의 현실 정치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숩니다. 물론 북괴에선 김구 선생이 방북한 것을 위대한 개정일에게 아부하기 위해 왔다고 선전했겠죠.
스탈린이 1945년 9월 20일에 이미 북한 단독 정권 수립을 지시하고 미국 또한 남한에 대한 후견을 포기할 의사가 없는 상황에서 ‘남북 상호의 수정과 양보로써 건설되는 통일체’의 꿈은 거의 무망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강대국 정치의 틀이 이미 결정되었다고 하더라고 우리민족으로부터 어떠한 통일노력도 없었다고 한다면 우리 역사가 얼마나 부끄러운 역사가 되었을까 생각해 본다면 아무리 어렵더라도 옳은 길을 가야 한다는 그의 비장함은 오늘도 우리의 심금을 울립니다.
몽양 선생이 가족을 북괴에 보내려고 했던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위에 모니터에서 나오듯 위대한 대장군께서 계시는 곳으로 가라느니 이런 식으로 말했던 것은 절대 아닙니다. 당시 공산당계 위상은 몽양이 결코 밀리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나이로 보나 국제적 활동으로 보나.... 박헌영도 몽양에 비하면 애들 수준이었죠.
1947년에 암살당한 몽양 선생이 개일성에게 뭐가 아쉬워 개일성을 위대한 장군 어쩌고 했겠습니까? 1947년이면 당시 북괴와 대한민국도 만들어지지 않았을 때인데...
후에 개일성 일족이 북괴를 완전히 장악한 후 아무 것도 모르는 철없는 몽양 자식들에게 세뇌시켰겠지.
참고로 몽양은 박헌영이 23살, 개일성이 11살 때이던 1922년 이미 레닌과 트로츠키와 함께 놀던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좌파의 거두로서 몽양은 앞으로 만들어질 대한민국보다 북쪽에 만들어질 북괴를 자신의 뜻이 실현될 공간으로 본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당시 지식인들은 공산주의에 경도돼 있었거든요. 물론 결과는 지금의 북괴로 낙착될 예정이었지만....
솔직히 허심탄백하게 얘기합시다.
48년도 당시 김일성은 북한의 실질적통치자였고 김구나 여운형은 남한의 권력쟁탈전에서
이승만에게 밀려나 있었습니다.
여운형이 공산계열에서 얼마나 권위가 있었는지는 저도 알수 없겠지만 당시 남북한 통털어 쏘련의 절대적보호를 받은 사람은 김일성뿐이였죠.
박헌영이조차 김일성이한테 숙청을 당해도 모르쇠를 하던 쏘련입니다.
아니~ 박헌영의 숙청을 김일성이한테 암시해주고 도와주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남한에서 영향력을 잃어가던 김구와 여운형이 김일성과 협력하려 했다는 것은 두말없는 진실이라고 봅니다.
그 당시 역사적배경을 살펴봐도 충분한 타당성이 있는 것이구요.
물론 김일성에게 장군님 하고 호칭을 써가며 아부했는지는 알수 없죠.
그러나 북한에서 김일성이 절대적권력을 행사하고 있고 경제군사적위상이 남한보다 높던 그 시절 김구나 여운형 김규식 같은 사람들과 협력의 주도권이 김일성에게 있었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자명한 일입니다.
북한의 교과서에도 그러한 내용을 자주 등장하는 바 다소 과장된 표현으로 씌이긴 했어도 다수 사실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김구나 여운형의 과거업적을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47년 이 후 그들의 실책까지 정당화하는 것은 좀 아니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들이 김일성과 야합하여 공산통일을 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도 없었겠죠.
물론 통일 후 그들이 일당독재 공산주의를 지향하지는 않았겠지만 절대적권력을 틀어쥐고 있는 김일성이 칼날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북한에서 조만식 등의 숙청과정을 보시면 잘 아실건데~
수많은 어제 오늘의 몽양류들이 나름 출발의 뜻은 순수했을지 몰라도
다 부질없는 공상뿐인 이상적 공산주의자들일 뿐입니다.
똑똑한들 지식인이었던들 지금 21세기 오늘에 와서 내가 그들과 같이 있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모두 국가를 몰고 낭떠러지로 가려던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천안함 참여연대나 연평도 우리 훈련탓하는 송영길류나
여원구를 보며 뼈저리게 반성해야합니다.
북으로 자식들을 인도한 (가라고 했든지 말든지) ,
그래서 20년 가까이 청진에서 숙청 따돌림을 당하게 한
지금도 먹고 살만은 하겠지만 그 가문과 그 지식들의 배경을 입고
서울에서 거짓 연극 하지 않으며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편안하고
사회에 보람있는 큰일을 했을 자식들에게 지하에서 용서를 구하고 있을 겁니다.
서울의 아버지 묘앞에서 거짓 연극을 하며
속으로 울부짖었을 그녀의 마음속에서 반세기의 억장이 무너질 거짓세상이
얼마나 기가 막혔을지 ......
우리 사회를 돌아봅니다.
김정이리가 만든 각본 맞습니다. 맞고요. 여할머니도 며칠동안 대본을 외우고 나와서 아버지묘앞에서 열시미 시를 읋고 있네요.
김정일 진짜 더러운 인간쓰레기네요. 북한주민이 할머니가 눈물 흘리고 있는거 보면 감동할거라고 생각하고 찍은 거 같은데 아니죠. 북한 주민 이제는 달라졌어요.
개보다 못한 정이리정치를 이제는 더 이상 보고만 있지 않을거라구요.
정으니를 후게자로 내세운다, 말도 안되는 소리죠. 정이리가 죽기전에 정이리가 망하는 세상 보여줘야죠.
2009년에 사망했지요.
저 여성은 무슨 십발총국장이 아니라..최고인민회의 부의장을 지내다가 죽기전에 조국전선 의장인가를 하였지요.
그리고 그의 언니 여연구가 원래 제일 똑독하여 죽기전까지 대남 사업부문에서 맹활약을했죠.
여연구는 1996년엔가 평양역앞에서 누군가를 마중인가 나갔다가 인민군 트럭에 치워서 사망했는데..
그 당시에도 대남기구인 조국전선 서기국장이었죠.
그리고 맏아들 여영구는 김일성과 출생연도가 같은 사람으로서 일본에 가서 대학 공부를 한 쟁쟁한 화학박사였지요.
그는 오래 전에 이승기가 연구한 비날론을 김일성은 국가의 상용생산지표로 핟자고
할때에 비날론은 염색이 안 되고 생산원가가 너무 들기 때문에 안된다고 반대 했다가 사상검토를 받던 중 자살 했다고 했죠.
그리고 네번째가 또 아들인데... 좀 모자라서 국가의 중책의 자리에서 사업을 못하죠.
그다음 마지막 딸로 여순구가 있는데... 이 여자가 바로 여운형의 배다른 딸입니다.
형제들 중에서도 좀 밀렸던거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여성만은 전쟁당시 유학도 유럽의 다른 나라에 나갔었고 ...
바로 북한의 신발공업 총국 기사장과 총국장도 지냈고... 퇴직당시인 1990년대 말에는 신발무역회사 사장까지 지냈는데...
웃기는 것은 그의 친척들이 남쪽에 있다고 하여 외국 출장을 안 내보내는 것이었습니다.
2000년대초 당시에는 형제들 중에서 이 여순구 혼자 남다시피 했는데... 집은 모란봉구역.....
나이가 들어 공직에서 물러나니... 집에 끼니를 끓일 쌀이 없어서 작은 콩꼬투리만한 노친네가 친구들의 손을 부여 잡고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고 합니다.
아무튼 공산주의는 안돼~ 전부 이빨뿐이었어....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연운형 선생도 공산주의자들에 대하여서는 다는 ,,,
즉 깊이는 몰랐다는 것입니다.
몽양의 맡아들도 공산주의 자들만 따르지 않었더라면 아마도 민족을 위하여...
인류를 위하여 큰나큰 기여를 하였을 것은 명백합니다.
결론은 몽양의 자식들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두되가 참 좋은 분들이 었지만 김일성, 김정일의 정치적 농락물로서 이용만 당했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