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있는 경쟁 - '노블리스 오블리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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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프랑스에서 빈민가를 중심으로 소요사태가 일어나 상가가 습격을 당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약탈에 가담하였다는 뉴스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하였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 것이 의아하였던 이유는 미국이나 영국에 비해 좀처럼 그 나라에서는 그런 소식이 들려 온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고 대체로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프랑스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나나?”였습니다. 프랑스 하면 자유에다가 평등과 박애의 정신을 덧 붙여줄 정도로 민주주의 요람으로 여겨왔으니 경제적 소요사태가 일어났다는 소식은 뉴스감이 될 만한 것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 제도와 자유시장경제 체제를 받아드리며 그동안 많은 국내외적으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웬만한 인근 나라들이 부러워 할 만큼 경제적 성장을 이루어 내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꾸준하게 그림자 같이 따라다니는 사회적 불안과 소요사태가 있어 왔으니, 그것은 다른 비슷한 사회나 경제 체제 국가에서는 볼 수 없는 빨갱이라 불리우는 사람들의 반감에 의한 충돌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초대 대통령 시절부터 반공을 국가 헌법의 제 일 국시로 정하여 놓을 정도로 공산주의를 배격하며 나라를 경영하였었습니다. 다른 자유국가에서는 공산당이라는 사상을 기치로 내어 걸고 국회의 한 정당으로 자유롭게 정치활동까지 하면서도 우리와 같은 소요사태가 없건만 반공을 국시로 걸어 놓고 그렇게도 반공법으로 사람들을 감옥에 넣고 억압을 가한 우리나라에서는 끊임없이 이념에 의한 충돌로 나라가 시끄러웠었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한 소요사태는 주로 대학가를 중심으로 젊은층이 대부분을 차지하며 생겼으니 그것은 아마도 가정을 꾸려가야 하는 가장이 될 나이 층 보다는 아무래도 학구적이고 열정을 그대로 표출할 수 있는 젊은 층이 그곳에 있기에 그랬을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거리에 뛰쳐나와 최루탄을 들이키며 그토록 울부짖어야 하였는가. 북한과 연계된 주사파니 독재항거니 무슨 사상이니 하는 문제는 좀 뒤로 하고 저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를 자유민주주의나 자본주의에 대한 국가 지도자나 국민들의 무지의 소치에서 찾고 싶습니다. 애초부터 우리가 배우고 알아서 우리 자신이 선택 하였다 기 보다는 타의에 의해 선택되어진 사상과 제도로서 어떤 연구나 경험도 없이 받아드린 결과로, 우리가 처한 상황으로 어쩔 수 없이 통과하여야 하는 모순과 시행착오였던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생긴 결과 중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현상은 국민들 간의 경제적 불균형이라 볼 수 있습니다. 경제적 불균형이 평등한 자유 경쟁속의 실력과 노력의 차이에 의한 불균형이었다면 모를까 그렇질 않고 국가 권력을 갖고 있는 자들과 경제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한 자 들 간에 의한 정경유착으로 생기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의 결과였기에 이는 한창 배움에 불타는 학도들을 비롯한 젊은층에게 정의감에 불타게 만들기에 충분하였던 것입니다. 자유와 민주주의 즉 국민이 주인인 나라와 사회에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반드시 지켜져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것은 법적인 조항으로 문서로 작성 되는 어떤 법측으로서는 아닙니다만 그 이상으로 지켜져야 할 사항으로서 경제적 평등에 대한 의무를 말하는 것입니다. 오래전부터 사상적으로 학문적으로 연구 되었고 그것이 정신적으로 국민들의 밑바탕이 되어서 세워 진 서양 선진국들의 자유 민주주의 국가들은 대체로 이런 경제적 평등 정신이 자연스럽게 표출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있는 회사들의 기부 문화라든지 장애인들을 위한 사회적 지위의 보장이나 시설의 설립이라든지 고아를 양아들 딸로 친자식 같이 키운다든지 하는 일을 들 수 있습니다. 의무라는 것이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라면 아마 이런 일은 ‘자유스런 의무’라고나 할 까요, 그것이 지켜짐으로 사회는 보다 평등하여 지고 남보다 많은 경제적 부를 누리더라도 떳떳하고 타인의 존경을 받는 부자 소리를 듣게 되는 것입니다. 꼭 경제적인 것만을 두고 말 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바로 이 것이 ‘노블리스 오블리주’(상위층의 도덕적 의무 이행)라 할 것입니다. ‘노블리스오블리주’의 소홀은 반드시 반란과 충돌이 있기 마련이며 이런 소요사태는 국가경제의 발목을 잡는 원인이 되는 것으로 많은 나라들(남미나 필리핀)이 이런 원인으로 발목이 잡혀 한 때 부강하였다가 빈민층의 나라로 추락하는 것을 목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자유시장 경쟁’이라 하여 막무가내로 추진하며 달려오며 이런 선진국의 ‘노블리스오블리주’에 대하여 미처 생각 못하고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 결과는 너무나도 국민적 위화감을 안고 아픈 성장을 하게 되었고 그 후유증으로 오늘과 같은 위태위태하고 아슬아슬하게 보이는 정부까지 태동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어려움을 당할 때 누구를 원망하기 보다는 근본 원인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유시장 체제’는 무조건적 경쟁 사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경쟁 할 것이 있고 경쟁의 대상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경쟁의 대상이 안 되는 것에 경쟁을 하거나 경쟁을 시킨다는 것은 마치 장례식장에 가서 파 안대소 하며 웃는 것이나 결혼식장에 가서 꺼이꺼이 우는 모습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가게를 새로 차렸는데 잘 되는 것을 보고 바로 옆에 다른 사람이 꼭 같은 가게를 또 하나 차려 놓는다면 그것은 너 죽고 나 죽자식의 어리석은 경쟁이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결혼식이나 심지어 상을 당하였을 때 부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어떻게 처리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대형 화환을 줄줄이 세워 놓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경쟁이 되어 너도 나도 분에 넘게 따라 하며 과시적 경쟁에 동참합니다. 한 쪽에서는 산 꼭대기 판자집에 여러 세대가 함께 살며 힘든 삶을 살고 있는데 말입니다. 실재로 이 것이 사회 악이 된다 하여 '가정의례 준측'이라는 법을 제정하기도 하였는데 지금도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웃이 아파 할 때 아파하고 배고플 때 나누어 주고 어려울 때 동참해 주는 것 등은 바로 자유민주주의의와 자유 시장경제 체제의 성공적인 실현의 원동력이며 필수 사항인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우리는 그동안 이런 부분에서 많이 낙후되어 왔습니다. 그만큼 그동안 정신없이 살아왔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최근 발생한 황우석 교수의 사건을 두고 외신은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가 그 원인이라고 지적 하였는데 참으로 정확한 판단이라 생각하며 우리의 그런 문화화 되어버린 병폐는 하루속히 고쳐 나가야 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책임 있는 경쟁을 하여 쓸데없는 분배냐 성장이냐 라는 논쟁을 없애고 진정한 선진국형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사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혹 지금 당장은 못하더라도 통일 후의 한국이라는 나라는 그런 나라가 될 수 있도록 연구하고 연습하고 노력하게 되기를 두 손 모아 빕니다. '노블리스오블리주' - 참으로 멋있는 경쟁적 사회의 한 단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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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는 프랑스어로서 '가진 자의 도덕적 의무'를 의미하는 뜻으로 쓰이는 말이다. 이 말은 귀족의 역사가 긴 유럽 사회에서 유래되었으며 오늘날 유럽 사회 상류층의 의식과 행동을 지탱해 온 정신적인 뿌리라고 할 수 있다. 귀족으로 정당하게 대접받기 위해서는 '명예(노블리스)' 만큼 의무(오블리주)를 다해야 한다는 귀족 가문의 가훈(家訓)인 셈이다.
위 설명이 맞나요? 어려운 말뜻이였군요.
한국이 이념의 갈등은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저언덕넘어님의 글처럼 너무 바쁘게 살아왔고 국토분렬때문인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