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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소 탈북박사 - 국회의원감 한명추가
코끼리발통 0 496 2016-01-10 17:49:05
[탈북정착스토리] 청년박사 주승현의 남한생활 이야기… 주승현 씨등록금을 낼 수만 있다면 피를 뽑는것도… 통일신문 기사입력 2014/12/01 [13:56]

주승현(33)은 DMZ 내 북측 심리전 제압 방송요원으로 군 생활을 하던 중 스물두 살 때 휴전선을 넘어 귀순했다.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에서 석·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국회와 동양·금호석유화학·롯데그룹에서 근무했다.
 
최연소 박사, 1호 통일학 박사 되다
 

입학 전 들떴던 마음과 달리 대학 생활은 최악이었다. 남북한의 서로 다른 교육과정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공부에 대한 취미는커녕 요령도 남아 있지 않았다. 게다가 혈혈단신이다 보니 얼마 안 되는 생계지원금으로 집세를 내고 나면 교통비나 밥값도 남지 않았다.
입학하자마자 경제적 어려움으로 호프집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는데 첫 학기 성적은 말이 아니었다. 탈북 대학생의 경우 사립대학 등록금을 국가와 대학에서 절반씩 장학금으로 지급하는데, 일정 수준 이상의 성적을 거둬야 수업료를 지원받을 수 있다.
성적이 나빠 장학금을 지원받지 못해 스스로 등록금을 해결해야 했다. 호프집 아르바이트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 일식당과 건설 현장으로 일을 다녔다. 수업 후 도서관으로 가는 친구들을 부럽게 바라보면서 일터로 가야 했던 대학 시절은 아직까지 가슴에 응어리로 남아 있다. 교재를 살 돈도 없었지만 그래도 공부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도서관이나 대형서점에서 선 채로 책을 읽으면서 배움의 끈을 놓지 않았다. 부교재를 빌려보려고 6개의 도서관을 다닌 적도 있다. 책을 찾아 돌아다니면서 닳고 닳은 신발 밑창 값이 교재 값보다 더 많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시험기간에는 일주일이나 열흘씩 아예 도서관 의자에서 자면서 공부했는데 군 시절에 체득한 인내심이 큰 도움이 됐다.
그렇게 두 학기 등록금을 직접 내고서야 성적이 올라 장학금을 받았고 그제야 마음의 여유도 생겼다. 친구를 사귀는 것만큼은 어려움이 없었다. 여러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캠퍼스의 낭만도 만끽했다. 대학 3학년 때는 산악동아리를 맡아 이끌었고 학교 친구들과 민속문화반을 결성해 방방곡곡 다녔다. 생활은 어려웠지만 휴학하지 않고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최근에는 대학을 졸업한 탈북 학생을 심심찮게 볼 수 있지만 당시에는 대학에 입학하고도 실제로 졸업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특히 한 번도 휴학하지 않고 졸업한 사례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학 졸업 후 나는 국회(국회의원 보좌관)와 두 곳의 대기업에 다니며 대학원에 진학했고 대학원에서도 한 번의 휴학 없이 석·박사 과정을 마쳤다. 22세 때 귀순해 10년 만에 탈북자 최초로 통일학 박사학위를 받은 것이다.
나는 한국 사회에 적응하기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었던 듯하다. 앞서 밝힌 것처럼 군인 가정에서 태어나 DMZ에서 군인으로 근무하다 온 나에게 한국은 머리나 가슴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냉정한 자본주의 경쟁사회였다. 나는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했다.
어떤 사람들은 군인 출신이어서 국가적 대우나 보상이 더 많았을 것이라고 하는데, 2000년 이후 군 귀순자에 대한 배려와 대우는 소멸됐고 오히려 군 출신 귀순자는 춥고 어두운 동면을 강요당했다.
 
경쟁사회의 아웃사이더 정체성 찾기
 
첨언하자면 가지고 온 무기의 보로금(報勞金·반국가 단체나 그 관련 구성원으로부터 금품을 취득해 수사기관이나 정보기관에 제공했을 경우 금품 가격에 따라 국가가 지급하는 돈)조차 제대로 지급받지 못했다. 관계자의 말을 빌리면 내가 가지고 온 무기(AK자동소총)는 동대문시장에서 25만 원이면 구입할 수 있을 만큼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또 언젠가 나는 탈북 학생들이 안보 강연이나 특정 재단의 지원으로 생활비와 등록금을 충당한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정작 군인 출신인 나에게는 그러한 기회조차 없었다. 게다가 어린 나이에 혼자 지내다보니 탈북자 사회에서도 상대적으로 열악한 위치에 있어 내적 모순과 외적 도전을 함께 이겨내야 했다.
그러나 나는 비록 아웃사이더의 위치일지라도 그 위치가 품은 다양한 면을 건전하게 고찰하고 정신적 인내를 배운다면 훨씬 더 많은 기회를 포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했다. 탈북자에 대한 고리타분한 편견이 사회적 주홍글씨로 존재하는 상황에서도 국회의 별정직 공무원과 대기업 사원으로 일한 것은 귀순자에 대한 푸대접에 낙담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대학 진학과 관련한 비웃음에도 개의치 않은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인내심을 갖고 위기를 기회로, 단점을 강점으로 바꾸려고 힘을 다했다. 나는 국회에 들어갈 때도 누구의 도움도 없이 정치외교학 전공자 모집에 지원해 채용됐고 두 곳의 대기업도 공채에 응시해 스스로의 힘으로 입사했다. 다만 서류 전형 때 탈북자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자기소개서, 이력서 등에서 탈북 사실을 밝히지 않더라도 채용 면접 과정에서는 진실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면접 때는 탈북자라는 사실이 합격에 오히려 도움을 준 것 같다. 밝히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털어놓으면서 탈북자만이 가질 수 있는 정신력과 포부가 회사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점을 호소해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이후 나는 입사 면접 상황을 즐겼고 예외 없이 합격통지를 받았다. 내가 여러 회사에서 일한 이유는 혼자서 감당하기 벅찬 ‘미친 등록금’과 생활비 등이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인내심 갖고 위기를 기회로 바꾸고
 
북한에 있을 때 ‘남조선’ 대학생들이 학비 낼 돈이 없어 피를 뽑아 팔아 등록금을 낸다는 교육을 받았다. 한국에서 실제로 겪어보니 등록금을 낼 수만 있다면 피를 뽑는 것도 마다할 이유가 없겠다고 수백 번 생각했다. 문제는 내 몸 안의 피를 다 뽑아도 과연 등록금을 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어려운 형편이었어도 공부만은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학위 과정을 빨리 마치고 기업에 취업해 돈을 번 후 상위 과정으로 나아가자고 마음먹었다. 남보다 일찍 석사 과정을 마치고 남은 기간에 돈을 벌어 박사 과정에 입학했고 박사 과정 역시 빨리 끝내고 취직해 돈을 벌었다.
그리고 다시 학교로 돌아와 박사 논문을 준비했다. 물론 공부에만 집중하지 못했다는 게 아쉽지만 다른 선택이 없었다. 대기업 근무를 통해 사회를 배우고 경력을 쌓은 것 역시 유익했다.
또 다른 오기와 소망의 절박함과 간절함 앞에 서 있다. 그것은 통일이다. 다가오는 통일은 적대와 증오를 배태해온 70년 분단사(史)만큼이나 호락호락하지 않을 형태일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통일이 남북한 주민 모두의 행복한 삶을 약속하는 모습이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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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복 ip1 2016-01-10 18:00:50
    깊은 찬성표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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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탈 ip2 2016-01-10 21:15:41
    고위출신, 박사출신, 부자출신 탈북의원은 조명철로 끝이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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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ff ip3 2016-01-10 23:25:28
    위에 분( ip2) 글 보고....
    뭉뚱그려서 싸잡아서 불만표출 하는 건 아니라고 보기에...
    이를 좀 더 세밀하게 구분하여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임.

    탈북자들 중 고위출신이든, 박사출신이든, 부자출신이든, 용접공출신이든, 탄광출신이

    든,
    농장원출신이든... 누구를 물론하고 대한민국에서 각자가 정직하게 능력껏 재능을 발

    휘하여 잘먹고 사는 것은 현존하는 법제도, 보편적인 상식 틀안에서 지극히 정상적인

    현상임.

    그런데 남북 간 특수관계로 인해,,, 보편적 상식이 부분적으로 예외될수 밖에 없는 현

    실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특수성이 예전(1990년대~2000년대초)에

    는 사회적 공감대(사회 인식, 사회 기준)가 형성되었기에 가능하였는데,,, 지금은 이

    에 부흥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말하자면 지금은 왜곡변질되어 있다는 것

    임.

    국책연구기관에서 북한에서의 경력 하나만을 갖고 논문다운 글 한편없는 가십성 글들

    로,,, 언론플레이 등으로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엄밀하게 한국 내 연구분야의

    기준으로 보면 그들 대부분은 <연구보조원>이라고 할수 있음.

    지금은 하위계층 출신으로 굳이 언론플레이 하지 않고도 참신하게 박사공부를 하는

    탈북민들 꽤 있는 것으로 앎. 보편적인 자본주의 경쟁시

    스템에 안에서 말임...

    다시 말하면 <고?위?출?신?,? ?박?사?출?신?,? ?부?자?출?신> 내에서도 ,,
    단편적인 3가지 기준으로 ?일률적으로 구분할수 없을 정도로 너무 다양하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고 싶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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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탈 ip2 2016-01-11 00:01:07
    이보쇼 미국깃발 양반!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네요. 아리송~~~

    마지막부분 보니 내견해나 같은거 같기도 하구요.

    눈에 안보여서 그러지 영세민 탈북자중에도 분명 훌륭한 분이 있고도 남죠.

    그런분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희망을 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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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잰내비 ip4 2016-01-11 09:49:51
    북한서 개보다 못하게 살다 왔으면 우선 이땅의 자유와 혜택에 고마워 할줄 알고 성실히 살아 보답할 새각하는것이 아니고 뭔 국회으원 나발 치고들 있어 개머절 같은 소리 말고 아그덜아 박사고 대학 나왔고 간혹 대갈빡 좋다는 소리 들으면 국회으원되는줄아냐? 잰내비 같은 꼴깝이 그 잰내비 하나면 충분하지 않냐? 이게 탈북자들이 아직 먼 마인드다 이런거 보구 삶은 소대가리 웃는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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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애는 ip5 2016-01-11 10:37:10
    요 위에 잰내비//중국애는 중국사이트로 가라!!! 탈북자는 박사를 받았는데, 너는 중국에서 대학은 커녕 고중도 못가고 소학교도 겨우 졸업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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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미소 ip6 2016-01-11 10:46:56
    주승현씨 정치성향은 야당을 지지하는걸로 보이고 한국사회에 상당히 불만이 많은것 같습니다.귀순동기도 통일을 위해 뭔가 기여하려고 했던것 같은데 남한사회에 살면서 통일 가능성에 회의를 느끼고 좌절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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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곰산 ip7 2016-01-11 10:56:44
    앞으로 대한민국이 통일시대를 표방할것이 뻔하니 주박사의 통일학박사 타이틀을 한국사회에서 이용하려고 하겠군요. 그런데 그 본인은 정치쪽에 관심을 접은것 같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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