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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특별기고 - 내가 만난 '깐수'떠나는 사람, 남는 사람 ―한 지식인의 운명에 대하여
북핵 0 416 2006-04-17 03:52:21
지식인에 대한 존재의 규명에서 사르트르는 지배계급에 의해 실용 지식 전문가가 된 사회적 노동자가 동일한 모순을 여러 수준에서 괴로워하기 시작하면서 진정한 지식인으로 태어난다고 말한다. 지식인이란 자기 내부와 사회 속에서 구체적 진실, 또는 그것이 지니고 있는 모든 규범에 대한 탐구와 지배하는 힘의 이데올로기 사이에 대립이 존재하고 있음을 깨달은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다.

“분열된 사회 속에서 만들어진 지식인은 그가 사회의 분열된 모습을 내면화한 까닭에 그 사회를 증거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역사적 산물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어떤 사회도 자기 자신을 비난하지 않고는 그 사회의 지식인들에 대해 비난할 수 없다. 왜냐 하면 지식인이란 결국 그 사회가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오늘 이렇듯 진지하게 지식인에 대한 서구식의 고전적인 질문을 되씹는 것은 다름아닌 어느 동시대 사람 한 분을 모두에게 소개하고 싶어서다.


그의 이름은 정수일, 1934년 만주 옌지(연길)에서 태어나고 성장했다.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이른바 `깐수 사건'의 주인공이다. 그는 일찍이 전 중국에서 수재만을 뽑는 베이징대학 동방학부를 수석으로 나온 사람이며 제3세계에서의 지도력을 행사하려던 중국 정부에 의하여 발탁된 사람으로서 중국 국비장학생 1호가 되었던 이였다.

중국 탕자쉬엔 외교부장은 그의 동기생이다. 정 선생은 이집트와 모로코에 유학했고 중동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그는 동서 교역사와 실크로드학의 권위자가 되었으며 우리말에 중국어 일본어 영어, 그리고 전공인 아랍어와 포르투갈어 위구르어 티베트어 몽골어 등등 거의 열두 개 나라의 고대 언어에 정통하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어느 중국 고위층은 그의 재주를 아껴서 인척 여성과 결혼을 시키려고 하였지만, 그는 귀국을 결심하게 된다. 당시 그의 조국은 분단된 한반도의 북쪽인 조선을 의미하였다

그는 중앙당으로 소환되고, 연구하는 학자가 아니라 공작원으로 변신하게 된다. 십이개 국의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고 박학다식하다는 것은 국가 권력의 다급한 총동원령에 따라서 그 효용 가치가 엉뚱한 방향으로 결정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그렇게 동원되었다. 중국 국적에서, 북조선 국적, 그리고 레바논 국적 등등 네 번의 `세탁'을 거쳐서 그가 취득한 최종 국적은 필리핀 체류 아랍인 2세가 되어 버렸다. 그의 아랍 이름이 동방 교역지의 하나였던 `깐수'가 된 것이 그 때문이다. 그는 여러 민족의 언어에 능통하고 박학한 실력 때문에 누구의 의심도 받지 않고 모 대학의 교환교수로 정착했다.

나는 남북 분단체제에서 벌어진 음습하고 피 냄새 나는 첩보전에 대하여 상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어느 정도 눈치는 채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십여 년의 우여곡절을 겪을 때에도 `곰팡이'가 끼어들지 않도록 철저하게 `햇볕 아래 공개'하는 원칙을 세웠었다.

발표에 의하면 그의 상부 선은 구체적인 활동을 요구했고 그는 하는 수 없이 어느 월간지에 나온 것들을 팩스로 중국에 보냈다. 그야말로 원시적인 행위였던 셈이다. 그래서 세상이 떠들썩하게 `깐수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그는 직업 공작원이었으므로 그가 겪은 외로움과 고초는 우리네 진보인사가 받은 것과는 달랐을 것이다.
이 다음부터 실로 감동적인 지식인의 자기 결단과 선택이 이루어진다. 그는 국적이 필리핀이었으므로 국제법상 국외추방을 요구할 수 있었고 그가 처음에 갇힌 곳은 출입국과 관세법 위반자들이 수감되는 곳이었다. 그러나 정 선생은 자기의 국적은 분명히 북조선임을 주장한다.

그리고 최고형을 받게 된다. 그는 안정된 학문 탐구의 짧지 않은 세월을 남한에서 보내는 동안 중요한 저서와 논문들을 남겼고, ―그가 검거되기까지 자신의 진짜 신분을 밝히지 못하여 지금도 미안해하는― 부인도 얻게 되었다. 그네는 사실은 정 선생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헤매이다 갖게 된 서재의 `지킴이'였다.

그는 방대한 자료와 주를 붙인 의 원고 마지막 부분을 손질하다가 잡혀왔고 검사는 취조 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검사는 그의 마지막 원고를 관계 기관에서 찾아다가 검사실에서 정리하도록 충분한 시간을 주었다.

이 원고의 중요한 가치를 검사도 알았던 것이다. 그는 정 선생에게 사형을 구형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변호인단은 물론이고 재판부도 그의 곡절 많은 삶과 오랫동안 단절될 수밖에 없는 연구의 성과를 안타까워하면서 과거에 비할 수 없는 7년형을 주었다. 그리고 그는 전향했다. 그는 자신의 다른 길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에게는 전민족에 봉사할 시간이 별로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내가 그랬던 것처럼 메모일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법무부 노트에 깨알 같은 글씨로 자료도 변변치 않고 조명도 좋지 않은 독방에서 아내가 들여주는 최소한의 책들과 기억을 더듬어 가며 저술을 시작했다. 노트로 거의 사백여 권에 이르는 집필을 그는 수감된 5년 동안에 해냈다. 예전 같으면 어림도 없었을 작업이었지만 그는 마지막 설득 과정에서 이들 노작들을 감옥 밖으로 고스란히 보존해 내올 수가 있었다.

마르코 폴로의 보다 더욱 전문적이고, 거의 박물적 지식을 겸비했던 중세 이슬람의 학자이며 여행가였던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 를 세계에서 처음으로 초역해 냈다. 이것은 책으로 네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이며, 중세시대 동방의 문화와 문명을 올바르게 자리매김할 귀중한 책이다.

알제리에서 바투타의 기록이 처음 발견되었고 프랑스가 이를 입수하여 식민지 경영에 필요한 만큼 요약하여 번역한 것이 유일하다고 한다. 이븐 바투타의 13만㎞에 이르는 30여 년의 여정은 동아시아의 근대와 문명에 대하여 깊이 성찰해야 할 이 시기에 절실히 필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그는 이 외에도 서구인의 눈으로 본 동방세계에 대한 명저인 과 당국의 양해로 간신히 보존한 , 그리고 , 북한에서부터 해왔던 을 보완 정리해 냈다. 나는 그의 노트와 그가 꼼꼼하게 그려낸 지도를 보면서 눈물이 나왔다.

그것은 구치소에서 휴지로 나누어 주던 손바닥만한 백지를 밥풀로 붙여서 만든 종이였는데 거기다 이븐 바투타가 여행한 육로 및 해로를 붉고 푸른 볼펜으로 정성스럽게 그려 놓았다. 이것을 어찌 그람시 선생의 에 비길 것인가.

그는 그를 아끼고 키워 주었던 큰 나라 중국의 엘리트로 편안한 학문 생활을 하면서 더 높은 업적을 쌓을 수도 있었다. 조국의 북과 남은 이 소중한 재보를 헌신짝 같이 다루다가 결국은 말살해 버릴 뻔하였다. 아아,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과거에 얼마나 수많은 아까운 자산들이 그렇게 이름없이 말살되었던 것일까. 우리는 반세기 만에 겨우 이러한 것들을 추스를 만큼의 아주 작은 여유를 남북의 변화를 통하여 확보할 수가 있었다.

그는 8·15 사면으로 풀려나와 다시 학문에 정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국적이 없어져 버렸다. 여기서 다시 그의 고뇌와 선택이 시작되었다. 그는 `대한민국 국적'을 신청한다. 그에게 이미 남이나 북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며, 그이 말처럼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민족 앞에 밥값이라도 하려면” 자신의 구상을 빠짐없이 집필해 내야 하는 것이다.

그는 나와 헤어지기 전에 젖은 눈으로 중얼거린다. “분단시대의 지식인은 수의환향(囚衣還鄕)이 자신의 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북으로 돌아가는 장기수 선생들에게도 인사를 드리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는 또한 그분들의 삼사십년에 걸친, 너무나도 길어서 추상적인 세월이 되어버린 어둡고 비좁은 독방의 삶을 다시 생각한다.

남과 북의 정부에게 간곡히 당부한다. 통일로 가는 길 위에서 이제는 정말 좌경, 우경 하지 말자.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따뜻하게, 실사구시로 좌우와 바깥 사방을 살피면서 한 걸음씩 나아가자. 이제 우리에게 일시적인 헤어짐이라든가 만남이라든가 하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북에서 생존의 조건에 따라 선택하고 일가를 이루어 살고 있을 이른바 국군 포로나 납북자들이 있다면, 옛날 반공포로나 요즈음 탈북자들을 포함하여 새로운 선택을 묻거나 왕래할 길도 모색할 줄 알아야 한다. 제각기 서 있는 자리에서 우리는 이미 민족 앞에 하나다.

장기수 선생님들, 안녕히 가시고 또 오십시오. 우리는 이제 자루 속에 들어 있는 숨막힌 생명이 아니라 저 드넓은 유라시아 대륙을 향하여 숨통이 트인 통 크고 마음 큰 백성이 될 것입니다.

소설가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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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사람 2006-04-17 09:00:03
    황석영씨와 같은 좌파사상가들의 문제점은 그 인간적 깊이와 넓은 대의에도 불구하고 현실감각이 너무 떨어진다는데 있습니다.

    탈북자와 납북자를 동일선상에 놓고 생각하는 센스하며 민족앞에 모든 문제는 덮어주어야할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는 점이지요. 그가 늘 인용하는 사르트르 역시 남한이 먼저 북침했다고 주장하는 현실감각을 보여주었지요.

    황석영씨가 옥고를 통해 국가권력과 개인의 부조리를 느꼈다면, 북한정치범 수용소에서는 글을 쓸 기회도 재기하여 사회적 존경을 얻을 기회도 없다는 것을 미루어 생각해 볼 수는 없는건지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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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성계 2006-04-17 09:49:16
    대표적 좌익인 한홍구가 김일성 미화하면 그 한홍구를 황석영이가 미화해주고 그 황석영이의 글을 좌익 찌라시인 한걸레가 신문에 실어주는 방식이 그들의 오랜 좌익사상 전파방식입니다. 위 글도 한걸레의 기사이며 한홍구의 김일성 찬양 기사도 한걸레에 나오죠. 이른바 짜고치는 고스톱입니다.

    위 내용도 보니 마치 깐수의 일대기를 보는 듯 합니다. 거의 깐수 위인전 수준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만 깐수는 분명히 대한민국의 국법을 어기고 엄청난 국가기밀을 북으로 빼돌린 명백한 간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석영이는 깐수 미화에 앞장서고 있으며 심지어 본문 마지막에는 장기수 선생님이란 표현까지 사용하는 대담함을 보이고 있군요. 장기수란 다른 말로 남파간첩입니다. 남파간첩 중에서도 특히 악질적이고 끝까지 전향하지 않으며 공산주의를 믿고 찬양하는 자들이죠.

    이렇게 대놓고 간첩 미화의 글을 싣는 신문은 한걸레가 거의 유일합니다. 기실 이보다 훨씬 심각한 기사도 굉장히 많습니다. 막연히 같은 민족이란 감상적 논리로 간첩을 미화하는 이런 자들이 탈북자의 인권문제나 북에서 죽어가는 인민들의 문제를 공론화하는것은 외면합니다. 좌익들의 대표적 공통점 중 하나가 그런것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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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섭 2006-04-17 10:39:47
    부산님과 이성계님의 짤막한 평론은 정수를 찌르는 예리함이 있군요. 저는 깐수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본적이 없었고 황석영이란 분의 글도 읽어 본적이 없었는데 오늘 윗 분몬을 읽으면서 머리속에서 잡힐듯 잡힐듯 잡히지 않는 석연치 않는 것들을 부산사람님과 이 성계님이 말씀해주시는군요.

    어린 학생들은 넘어갈 만한 교묘한 감성적인 글이군요. "사회적 지식 전문가가 노동자이며 이런 부류의 노동자가 사회의 모순을 거치면서 새로 태어난다는 말" 한편으로 일리는 있는데 이런 분석을 사용하여 남과 북의 이념 갈등으로 이어가는 황석영씨와 오늘날의 어설픈 좌파들을 향해서 두분의 논평을 들으니 마음이 든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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