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점령 후 南 아닌 西로 진격... 인민군, 알 수 없는 'ㄷ자 행군'
** 적이 남진을 주춤거린 동해안 축선
백두대간 고루포기산에서 본 강릉일대. 해안선 가운데 쯤 비행장이 보인다.
인민군이 남진을 주춤거린 곳은 서울만이 아니었다. 거리상으로 부산이 제일 가까운 동해안 축선에서도 그랬다. 강릉점령 후 직진하지 않고 대관령 길로 접어든 것이다. 미리 상륙해 대기하던 특수부대를 앞세우고 남진하는 것이 상식일 텐데,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당시 강릉은 삼팔선에서 지척이었다. 강릉에서 가자면 유명 관광지 하조대(河趙臺) 못 미쳐 양양군 현북면 기사문 마을이 삼팔선으로 갈렸다. 강릉시 주문진읍에서 10여㎞거리다.
동해안 지역도 여느 전선과 다르지 않았다. 우선 병력면에서 1대 2.5 비율이었다. 인민군 제5사단과 제1경비여단의 맞상대는 국군 제8사단(사단장 이성가 대령)뿐이었다. 그나마 8사단은 편제상 2개 연대(제10연대, 제21연대) 밖에 없는 감편사단이었다.
21연대는 강릉 남쪽 삼척에 주둔해 있었는데, 25일 새벽 3시 강릉 정동진·옥계 해변에 인민군 특수부대 상륙으로 국도7호선이 차단되었다. 거기다 6월 초 오대산 지역에 침투한 공비토벌에 차출된 2개 대대가 복귀하기 전이어서 가용병력은 4개 대대뿐이었다.
8사단 방어정면은 26㎞나 되었다. 그 산악구간을 소수 병력으로 방어하려니, 소대 분대 단위로 경계진지를 구축할 수밖에 없었다. 25일 새벽 엄청난 적 포화에 압도당해 초소마다 대혼란이 벌어졌다. 적 주력은 동해안 국도7호선으로 밀고 내려왔다. 그리고 정동진 해변에 미리 상륙한 적이 밑에서 강릉으로 치받아 올라오고 있었다.
강릉 정동진 등명마을에 선 6.25 사적비. 25일 새벽 3시에 상륙한 사실이 적혀 있다. 문창재 제공
강릉비행장에 주둔했던 8사단은 오전 6시 긴급작전회의를 열었다. 10연대가 적의 남진을 최대한 지연시키고, 삼척주둔 21연대를 불러올리고, 육군본부에 1개 여단 지원을 요청하기로 결정되었다.
강릉으로 빨리 오라는 연락을 받은 21연대는 국도가 막혀 영서지역으로 우회할 수밖에 없었다. 육군본부에서는 “사단장 재량으로 최선을 다해 저지하라. 서울방어가 긴급하여 증원은 불가”라는 통보가 왔다. 그리고 곧 통신이 끊겨 더 이상 소통이 불가능했다.
절망적인 통보에 사단장 이성가 대령은 오전 10시 작전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모든 군수품을 대관령 너머 평창군 진부로 소개시키도록 지시했다. 장병들에게 6개월분 봉급과 식량을 지급하고, 주민의 피란도 돕도록 조치했다.
이런 절체절명의 순간, 사단포병대의 분전으로 많은 시간을 벌어 안전철수가 가능했다. 8사단 제1포병대장 장경석(張庚石·예비역 준장)소령 회고록 '100년을 살면서'에 따르면, 강릉북방 연곡천 저항선에서 포병이 만27시간을 벌어 안전철수가 가능했다.
정동진에서 북상하던 인민군 유격대도 포병대의 저항에 부딪쳐 주춤거렸다. 사단병력과 보급품, 그리고 시민들이 안전하게 철수할 수 있었던 것은 포병대가 남북 양쪽에서 적의 강릉접근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적 탱크가 없어 가능한 일이었다.
포병대의 결사항전에 놀란 적은 26일을 주문진에서 숙영하고, 27일 새벽 4시부터 일제히 포문을 열었다. 어렵게 확보한 121고지가 함락되자 사단장은 철수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1포병대는 결사항전을 결의, 목숨을 내놓고 공산도배들 응징에 나섰다. 전원이 서북청년단 출신인 대원들은 인식표를 모아 사천국민학교 운동장에 묻고 항전했다. 그러는 사이 인민군 기습조의 공격을 받아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다.
강릉 사천에 세워진 포병전적비에 화환이 바쳐져 있다. 문창재 제공
이 백병전에서 소대장 김용운 소위의 분전은 눈부셨다. 그는 신의주학생사건 때 주동그룹으로 활약한 경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소총은 물론이고, 맞싸우기에 좋은 야전삽 곡괭이 몽둥이 돌 등을 모두 동원한 싸움이었다. 김 소위가 머리에 부상을 입어가면서 소대원들을 지휘해 분전한 덕분에, 포를 한 문도 버리지 않고 철수할 수 있었다.
탄약관 이석권 상사의 활약도 컸다. 탄약이 떨어지자 그는 사단본부로 달려가 대뜸 사단장에게 탄약수송차 배정을 요구했다. 그 당돌한 태도에 사단참모들이 발끈했다. 그것을 사단장이 다독여 탄약수송이 가능했기에 포병대가 제몫을 할 수 있었다.
참모들은 이 상사가 계통을 밟지 않고 사단장을 만난 것을 문제 삼았다. 즉결처분 이야기까지 나왔다. 그는 사단장실을 나서자마자 헌병에게 체포됐다. 그러나 그는 태연하였다. “포탄이 바닥났습니다. 우리가 공격하는 장면만 본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사단장은 그 충직성을 높이 사 참모들을 설득한 것이다.
삼척에서 백두대간을 넘은 21연대가 영서지방으로 우회해 대관령에 도달할 즈음, 8사단과 춘천 6사단이 어렵게 통신에 성공했다. “8사단은 빨리 원주로 이동하라”는 육군본부의 엉뚱한 명령이 그렇게 전달되었다.
아마도 적의 중앙축선 남진속도를 늦추는 지연작전이 급하다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이성가 대령은 부대를 인솔하여 대관령 넘어 원주로 가다가, 적이 벌써 원주 교외 횡성에 들어온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더 남쪽인 충북 제천으로 방향을 틀었다.
텅 빈 강릉을 점령한 적은 이상한 기동을 시작했다. 진격방향을 서쪽으로 바꾸어 대관령 길로 들어섰다. 8사단 뒤를 추격하는 모양새였다. 8사단이 제천에서 열차 편으로 대구를 거쳐 중앙축선 지연전에 가담하는 사이, 대관령을 넘은 적은 평창 정선 영월 등 영서산악지방을 헤매다가, 경북 봉화를 거쳐 울진 해안선으로 다시 나왔다. 이해할 수 없는 ㄷ자 행군이었다. 6월 28일부터 7월 5일까지 일주일 넘게 무려 200㎞를 헛걸음친 것이다. 그 사이 간헐적인 전투와 미 공군기 공습으로 전력도 크게 소모되었다.
그러는 동안 동해안 7번 국도는 무주공산 상태였다. 이 사실에 대해 북한의 공간사(公刊史)에 아무 언급이 없어 까닭은 알 길이 없다. 다만 우리 측의 추측만 있을 뿐이다. 그것은 600여명으로 구성된 특수부대의 부산상륙을 전제로, 내륙전선 지원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정이다. 또 하나는 미군함정의 포격을 피해 산악으로 숨어들었을 가능성이다.
6.25 초기 동해안에서 활약한 미해군 순양함 주노. 한국일보 자료사진
인민군5사단 제945육전대(해병대)와 제766유격대가 강릉 정동진과 삼척 임원에 상륙해 강릉 남쪽지역을 점령한 날(25일) 저녁, 적 수송선 한 척이 부산상륙을 목표로 울산 앞바다를 항진하고 있었다. 강릉 삼척 상황을 보고 받은 해군전함 백두산호가 진해기지를 떠나 동해로 항진 중 이를 발견했다.
“우측 공해상에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남쪽으로 가는 이상한 배가 있습니다.” 견시(見視)수병의 보고를 받은 갑판장 최영섭(崔英燮·해사1기)소위는 즉시 배를 검문하자고 함장 최용남(崔勇男)중령에게 건의했다.
“저렇게 큰 어선은 있을 수 없고, 화물선도 아닙니다. 수상하니 검문해야 합니다.”
통쾌한 6·25 첫 승전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검문에 불응하는 배에 포격을 가하자 응전의 포탄이 날아왔다. 그러나 전함과 병력수송선의 싸움은 싱거웠다. 600여명의 특수부대원을 태운 적 수송선은 대한해협 깊은 바다에 수장되었다.
부산 가는 수송선은 이렇게 격침되었지만, 강릉 삼척에서는 적선이 들어와 상륙하도록 아무도 몰랐다. 25일 새벽 강릉시 정동진리 등명마을과 옥계면 금진리 해변에 상륙한 병력은 1,800명이었다. 해안에 선단을 댄 인민군들이 주민을 동원해 보급품을 양륙 이동시키느라고 시끌벅적하도록 군경은 까맣게 몰랐다.
새벽 3시 주민 한 사람이 옥계지서에 달려와 신고한 뒤에야 난리법석이 났다. 상륙을 끝낸 인민군 부대는 새벽 5시 옥계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여 인원파악을 끝내고, 시가행진에 들어갔다. 경찰의 연락을 받은 해군 묵호경비부가 취한 첫 조치는 사복차림의 정보원 13명을 파견해 적의 동정을 살핀 것뿐이었다. 삼팔선 상황이 급했던 강릉 8사단은 뒤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국도7호선을 비워둘 수 없었던 육군본부는 진주 주둔 3사단 23연대를 불러올려 영덕에 저항선을 쳤다. 적은 울진에 병력을 집결시켜 영덕-포항-부산 직진을 노렸지만 실기하고 말았다. 미 해군순양함 유노(Juneau)의 함포사격 지원에, 미 공군기 지원까지 받은 23연대의 분전으로 동해안 축선은 2주일 이상 저지되었다.
미군함정 포격을 피해 산악으로 숨었을 것이라는 설의 근거가 이것이다. 동해에 급파된 미군함대는 7월 1일부터 해안선을 견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동해안은 개활지 폭이 좁아 해상포격에 치명적인 지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