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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남 지역감정은 당연하다
REPUBLIC OF KOREA 호프 1 316 2006-08-19 11:30:15
영호남 지역 감정의 뿌리에 대해 좀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서울 사람이지만 마누라는 전남/광주이고 저는 호남 쪽에 오히려 친인척이 많은 사람입니다.
제 글에 좀 기분나쁜 게 포함되어도, 행간을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통일 후 (통일이 느슨한 통일이 되든, 타이트한 통일이 되든) 남북한 간의 지역감정을 생각하면서 이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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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남의 차이점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 차이점의 뿌리는 "인문지리'에 속한다. 호남은 평야가 많다. 예를 들어 전북 고창의 평야지대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이 보이는 지대이다.
반면 영남, 특히 경북의 봉화, 안동은 비산비야 지역이다. 내가 봉화,안동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바로 그곳이 영호남 차이의 핵심 진원지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경북사람들 기분나빠 하지 마세요)
봉화는 안동을 "아랫것들"이라고 보았고, 안동은 대구를 "아랫것들"이라고 보았다. 처음 경부선 철로가 일제에 의해 설계되었을 때 봉화를 지나게 되어 있었는데, 봉화 유생들이 들고 일어나 안동으로 노선이 바뀌었을 정도라고 한다.

아무튼. 호남은 지주-소작이 발달하고 영남(특히 경북)은 자작/소지주/자소작이 발달했다.

이는 언어에서도 드러난다.
호남에서는 "하소"체가 많이 쓰였다. "할아범, 밥 먹었소?" '하소'체는 낮춤 높임말이다. 즉 신분상으로는 자기와 동급, 혹은 자기보다 아래인 사람을 존중해서 칭하는 말이다. 예를 들어 장모가 사위에 칭하는 말이다. (춘향전의 월매가 이몽룡에게 하는 말이 몽땅 '하소'체이다.) 즉 호남은 대지주-중간지주-자작농-소작농의 계급이 매우 광범위하게 분화된 사회였다. 그러니 이런 정교한 화법이 나왔던 것이다.

영남은 심플하다. "아부이, 밥 묵었나?" (물론 어린아이가 아직 존대말을 배우기 전에 하는 말이지만)

최제우는 대구 사람이지만, 농민봉기 동학은 호남에서 일어났다. 아까 언급한 고부가 소요의 시초였다. 농민은 조 군수를 습격했지만, 조군수는 도망가고 그 70 이상된 노모만 남아 있어서 노모를 잡아서 린치해서 죽였다고 한다. 나중에 전봉준이 자연발생적 소요를 동학농민봉기로 엮어세웠다. 그리고 정부에 개혁을 요구하고 일단 자진해산 했다.

(전세계 농민반란 중 가장 합리적이고 온건한 농민반란이었다. 반면 중국의 태평천국의 난은 광기 그 자체였다. 반군은 닥치는 대로 학살을 저질렀으며, 또한 진압도 잔인했다. 이홍장과 증국번의 진압군은 태평천국 최후 반도들이 몰려들어간 성을 밖에서 포위했고 반도들은 성에 불을 질러 스스로 몽땅 타죽었다. 그게 근 10만명이었다. 고기로 따지면 6.000,000 근이 완샷에 탄 것이다. 아마 고기 타는 냄새가 천지를 진동시켰을 것이다.)

걸레같은 미친년 민비 (이걸 우리는 요즘 "명성황후"라고 부르며 별 육갑을 떨고 있다. 배웠다고 하는 넘들이 역사를 모르면 개 헛 지x 하구 살기 십상이다) 가 청군과 일군을 끌여들였다.

농민은 다시 봉기했고, 청군과 일군은 농민을 몰았다. 충남 공주 부근 우금치에서 대포와 기관총으로 농민을 수십만명 학살했다. 그리고 전봉준을 잡아서 목을 쳤다. 전봉준은 개혁을 요구한 농민을 이처럼 무참하게 학살한 이씨 왕실을 저주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 목을 치면 남대문에 걸어라. 나라가 망하는 것을 보리라"라고.

자, 여기에 다시 호남이 등장한다. 당시 동학봉기의 주력은 호남 농민이었다. 약20 만이 죽었다고 가정하고 40만명이 유민(떠돌이 거지)이 되었다고 가정해보자. 당시 조선인구가 1천5백만 남짓할 텐데, 지금 남북한 합친 것의 1/5 정도 된다. 즉 지금 기준으로보면 1백만 가까이 죽고, 200만명이 떠돌이 거지가 된 것으로 추산할 수 있다. (이 수치는 조정될 수 있다. 아무튼 무지하게 많은 숫자이다)

원래 지주-소작이 지배적인 사회였던 데다가, 이러한 치명적 타격을 받으니까, 일제 때 보통학교진학율이 확 차이가 났다고 한다.

이조 때에도 호남에는 향교와 서원이 미약했다. 호남에서 가장 유학 학풍이 심오하다고 꼽히는 게 전남장성이다. 그래서 지금도 장성에 가면 "글이라고 하면 장성만한 곳이 없다 (文不如長城)'이라고 했는데, 이 장성의 유학의 깊이는 경북 지역 사대부들이 만든 어마어마한 향교/서원 체제에 비교하면 미미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호남 지배층은 공부하지 않고 풍류를 즐겼으며, 영남 지배층은
무조건 서울로 보냈다. 심지어 딸들마저 궁궐의 하다못해 궁녀라도 보냈다는 우스개소리가 있다.
영남이 서울다니기가 호남보다 편했다. 호남은 계속 산맥/고개를 넘어야 하지만, 영남은 배를 타고 낙동강을 거슬러서 문경새재를 넘은 후, 강경 남한강 상류에서 배를 타면 지금의 마포로 도착한다.

다시,동학봉기 이후 일제때 보면, 호남의 보통학교 진학율을 영남에 비해 무척 낮았다고 한다. (내게 지금 통계가 없다).

일제는 한반도를 X자로 관통하는 두 개의 주요 국도를 놓았다. 하나는 부산-서울-신의주 노선이고 다른 하나는 목포-서울-원산 노선이었다. 그 중 부산이 최대 항구였고 또 그 노선을 따라 경공업이 발달했다.

호남의 수난은 동학, 피폐화, 일제하 교육수준이 뒤떨이진 것, 일제하 Main 개발 노선에서 비켜나 있었던 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결정적 타격은 김일성이가 저질렀다.

경상도는 영주 선에서 방어가 이루어져서 대구는 다치지도 않았다. 부산은 6.25가 터지구 2달만에 인구 20 만인가의 도시에서 400 만의 도시로 급팽창했다. 그래서 도시공학자, 도시경제학자 사이에서 부산은 아주 특이한 케이스로 꼽힌다. "도시계획의 "ㄷ'자도 말할 틈이 없이 폭발한 도시"로 꼽힌다. 나 어렷을 때만 해도 부산부자라고 하면 무지막지한 부자들이었다. 70년대 중반에 집안에, 보르네오 원목으로 깐 싱글레인 볼링장이 있는 집도 있었다고 한다. 70년대 초에 집안의 날라리 젊은 형제들이 나란히 벤츠를 몰고다닌 유명한 난봉꾼 집안도 있었다. 내가 70년대 중반 집안 형님을 따라 부산에 갔을 때, 택시기사는 서울에서 왔다고 하니까 "아, 지방에서 왔서예?"라고 물었다.

반면 호남은 김일성의 6.25에 의해 아작이 났다. 지리산 빨치산은 50년대 말까지도 횡행했다. 월출산, 백악산, 백운산. 아무튼 좀 깊다 싶은 산마다 전부 빨치산이었다. 사람들은 서로 잡아 죽였다.
바닥빨갱이는 죽창으로 쑤셨고, 우파는 군경을 앞세워 총으로 갈겼다. 심지어, 나중에 빨갱이에 한이 맺힌 어떤 우파 청년은 빨갱이 (실은 자기 이웃)를 잡아 드럼통에 넣고 산 채로 삶아 죽였다고 한다.

여기에서 호남의 인맥은 결정적 타격을 받았다. 먹물 든 놈이거나, 대가 센 놈은 다 죽었다. 좌든 우든. 6.25 후 우리나라 좌파 지하 정당 역사를 보면 이걸 알 수 있다. 김일성이 눈물을 흘리며 훈장을 추서 (죽은후에 훈장을 주는 것)했다는 통일혁명당 김종태 및 그 일당은 몽땅 대구인맥이다.
인혁당 역시 몽땅 대구 경북인맥이다. 그후 남민전 역시 이재문부터 시작해서 몽땅 대구인맥이다.
남민전의 하부 행동 조직 민투 (그 민투의 짱이 이재오이다. 짱인 이재오는 호남 사람이 당연히 아니다. 당연히 경북 사람이다. 경북 영양 사람이다)에서 빨빨거리면서 삐라뿌리고 재벌 집 습격한 것 (봉화작전, 땅벌작전이라고 불렀다고 기억한다)은 몽땅 호남인백이다 (김부식, 김남주 등). 역설적이게도 영호남 "차별"의 가장 극단적인 경우는 60년대, 70년대 남한 좌파 운동에서 드러난다. 하하하. 그리고 그러한 영호남 차별을 만든 가장 커다란 공로자는 김일성이다.

박정희 초기, 3선개헌 이전에는 영호남이 별로 갈라서지 않았다. 갈라서게 된 것은 3선개헌 이후, 특히 DJ의 등장이후에 극심해졌다. 즉 박정희 후기 영호남 차별의 뿌리는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1) 원래부터 영호남 간의 인적자원 Pool의 격차는 극심했다
2) 원래부터 영호남 사이의 경제력의 차이도 어마어마 했다. (경제개발 단계에서 이 차이가 증폭되었던 것이다)
3) 박정희 초기에는 그래도 영호남 간격이 비교적 덜 했다.
4) 후기에 들어서면서 박정희 권력은 TK를 중심으로 매우 배타적 구조를 가지게 되었다.
5) 그리고 또한 (원인 중 하나인지, 반작용인지) 70년대 중반이후에는 호남인은 '선상님'(DJ)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면서 정치적 반발심이 거세졌다.
6) 그후 전두환, 노태우 때 이르면서 이 같은 원인들이 상호작용을 하면서 점점 더 악화된 것이다.

내 주장의 요체는 영호남의 차이/차별의 뿌리는 매우 깊다는 것이다. 특히 김일성의 6.25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단순히 "박정희"라는 세글자로 축소되지 않는다. 내 말이 믿기지 않으면 남한의 60년대, 70년대 좌파 지학 혁명당 사건들 (혹은 4.19 이후 좌파 준동 사건들)을 잘 공부해 보라. 남한 좌파 역사야 말로 극악한 영호남차별의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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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성룡 2006-08-19 18:22:17
    당연하긴 뭘 당연합니까.내 군대가서 전라도 사람한테 당했다는 사람은
    이해해도 사회나와서 의형제 맺자는둥 친구로 지내자는둥 하다가 당했다는
    사람은 수도없이 보았지만 알고보면 당한것들이 붕신이지요.
    내 어릴땐 과일소개도 하고 해서 전라도 장사꾼도 많이 알았는데
    당한적 한번도 없습니다.오히려 사기칠려다가 자기들이 당했지.
    공짜바라지 말고 법적으로 서류 확실히 하고 확인 안하는거 같아도
    이중 삼중으로 확인하면 심지어 돈에 관련된건 금융권까지하면
    당하고 살지 않습니다.양심으로 서로도우면 주위에서 제 조심하라고
    알려주더군요.전 전라도 친구들이 많지만 다 양심적인 놈들입니다.
    땅값올라서 부자된 몇놈은 애자식들 헌자식되어 버리기 일보직전
    이지만 정신차리겠지요.원래 없이 살다 돈이 생기면 그릇은 조막만한데
    허세가 늘어서 그런거거든요.아무튼 그래도 지 할애비보다 더 반가워 하니
    친구들이 느끼는 감정을 솔찍하게 얘기 했더니 나도 알고 있어야!
    고만 하랑께.또 했더니 고만 하랑께로 아따 술맞떨어지게.그래서 제가
    그랬지요.긍게 똑바로 살랑께 알것냐 이 들뜨어질 놈아라고 했지요.
    순천친구와 완도 고흥친구들이 생각나는군요.전 경북 의성이지만
    별로 갱상도 문등이 자슥들 별로 안좋아 합니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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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프 2006-08-20 00:18:23
    하하 최성룡님의 말씀, 무슨 말씀인지 압니다. 사실 저두 속으룬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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